중(스님)이란 무엇인가?
전에 살던 화순 용암사에서 오래된 짐들이 택배로 돌아왔습니다. 출가 초기에 코팅해서 날마다 들여다 보던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법’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신도분들 중에는 이런 의문이 드는 분도 있을 겁니다. ‘나는 중이 아니라 재가신도인데 왜 스님들이 해야 하는 중노릇을 내가 알아야하나?’ 그래서 먼저 중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님은 어떤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가? 제가 스님(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기에 신도님들도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먼저 나눠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스님은 어떻습니까? 가사나 장삼 같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고, 예불의식을 드릴 때 앞에서 집전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 신도분들이 생활이나 신행 상 문제가 있을 때 상담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스님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스님은 아닙니다. 삭발염의했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있고 점도 봐주고 사주팔자나풍수를 봐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다 스님인가?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님은 세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성직자로서의 스님, 두 번째 수행자로서의 스님, 세 번재는생활인으로써의 스님입니다.
성직자, 수행자, 생활인
첫 번째 성직자로서의 스님은 의식을 주관하고 집전합니다. 절이나 사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의 자원 즉 승보를 지키고 관리하는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스님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의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승복을 입고 신도들과 상담을 하고 사찰의 이런저런 자산을 관리하면 다 스님인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생활 은퇴를 하고 사찰에 와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분은 머리만 안 깎았다 뿐이지 매일 예불을 하고 사찰을 청소합니다. 이 분은 과연 스님입니까? 스님은 아니지요.
이런 성직자로서의 스님은 가톨릭의 신부님, 기독교의 목사님과 비슷합니다. 특정한 종교 내에서 성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다는 데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직자라는 것에서 벗어나 스님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수행자로서의 스님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2,500년 전의 인도의 왕자는 스님이었습니까? 스님이 되려고 출가를 했습니까? 그때 당시에 불교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 불교는 종교가 아니었고, 다만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의 가르침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제자들이 생겨난 것이고, 같이 모여 살면서 부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님이 없었습니다. 수행자였습니다. 즉 스님이라는 존재의 출발은 수행자였습니다. 이것이 스님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스님이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선방의 무문관에서 정진하는 스님이라면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하거나 특정한 사찰에서 매일 의식을 집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스님은 성직자는 아니지만 수행자로서 충실한 삶을 사는 스님입니다.
세 번째, 생활인으로써의 스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조계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소 종단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스님이 직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승복을 입고 삽니다. 직업 스님, 월급쟁이 스님, 자영업자 스님 모두 존재합니다. 현실적으로 모르는 바 아니며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수행하려는 자는 ‘중노릇’을 해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의 스님 중에서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의 대상은 어떤 스님일까요? 먼저 생활인으로써의 스님은 해당이 안되겠지요. 성직자로서의 스님으로 잘 살기 위해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성직자로 잘 살기 위해서는 신도들이 보기에 근엄하고 흠결이 없으면 됩니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만 훌륭한 스님으로 보이면 돼요. 그러나 수행자로서 스님으로 살아가려면 경허스님이 말하는 중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스님들만 이렇게 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머리를 깎았든 안 깎았든 내가 남은 생을 수행자로서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경허스님이 이야기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경허스님이 이야기한 것은 수행자로서의 스님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중노릇 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수행자로 사는 법’이라고 바꿔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공식적으로 조계종 스님이 아니지만, 여러분 스스로 ‘나는 수행자인가?’라고 질문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수행을 하며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든다면 경허스님의 이야기를 잘 새겨 들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부족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제가 많더라도 ‘나는 수행자다’하고 최면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남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노릇의 목표와 이유
대저 중노릇하는 것이 적은 일이리요.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야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되어 살고 죽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것이니 부처 되려면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중노릇을 왜 하는가? 왜 수행자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나와있고요. 수행자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도 나와 있습니다. 수행자로 살기 위한 원칙, 목적과 이유가 첫 번째 문단에 드러납니다.
무릇 수행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찌 사소한 일이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시작합니다. 수행자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주지하는 겁니다. 수행자로 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가? 살고 죽는 것을 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확실히 자각하지 못하면 수행자로서 올바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가야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영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불교에서 수행하는 목표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허스님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불로장생 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살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과 진시황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명확하게 알고 나면, 불교의 목표가 왜 생사를 멸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시황과 싯다르타의 공통점과 차이점
진시황은 영원히 살겠다고 신하들을 온 세계 구석구석에 보내 늙지 않는 신비의 약초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지시한 왕입니다. 그렇게불멸을 꿈꿨지만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무슨 수로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도 죽었습니다. 그러면부처님은 사기꾼이네요? 본인 자신도 죽었으면서 살고 죽는 것을 면한다는 것은 거짓말 아닙니까?
진시황과 부처님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시황은 이 몸이 영원히 죽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란 것이고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수행자는 나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자 열심히 수행한 결과 ‘그런 게 없다’는 결론을 얻어낸 것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낙담하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그러다가 늙어서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생사를 면한다는 것은 곧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시황과 고타마 싯다르타의 차이입니다. 같은 문제를 고민했으나해결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더욱이 부처님은 자신만 부처가 아니라 누구든지 이 진리를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눈이 멀어서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해서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자질, 부처가 될 종자인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잘 먹고 잘 입기 위해서 중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는 것은 중생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왜 삽니까? 죽기 위해서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삽니다.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기 위해서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이 중생들의 인생 목표입니다.
중생의 목표는 지금보다 잘 사는 것
내 소원은 오직 내 자식 잘 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기왕이면 오늘 저녁은 비싼 한정식을 먹고 싶습니다. 내 자식 잘 되는 것하고 맛있는 저녁밥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자식 잘 되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살짝 속이는 겁니다. 중생의 목표는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중생의 기준에서는 지금보다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더 잘 사는 겁니다.
중생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수행자들의 목표가 아닙니다. 중생들은 욕심에 따라서 잘 먹고 잘 입기 위해서 살지만 수행자는 이런 중생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살자고 하면 절대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절에 오래 다닌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불교에 입문해서 수십 년을 절에 다니고 참선도 하고 예불도 하고 성지순례다니며 온세상 부처님이란 부처님한테는 다 절을 했으니까 나는 훌륭한 수행자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수행과는 구만팔천 리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는 잘났다’라는 것을 불교에서 통하게끔 표현하는 겁니다. 사업가라면 ‘나는 직원도 많고 사업체도 크고 경기가 안 좋아도 잘 극복해왔다’라는 말이 곧 ‘나는 잘났다’는 말이겠죠.
구산스님이 이런 말씀을 했죠.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맛에 살건마는 이 몸은 언젠가는 한 줌 재가 되리.” 저 역시도 마찬가지죠.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법문을 하면서 내 법문에 도취가 되어야 법문이란 걸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중생은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그것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내 몸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가? 이것만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경허스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찾아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톱을 깎는다고 합시다. 손톱은 내 몸의 일부지요. 그런데 손톱을 깎아서 톡 튀어나가면 그 손톱이 여전히 ‘나’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반대로 커피를 마신다고 합시다. 잔 안에 들어 있는 커피를 내가 마십니다. 커피가 입을 지나 목구멍으로 들어가서 혈관 안으로 흡수되는데요. 내 밖에 따로 있던 커피가 어느 순간 내가 되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이렇게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을 똑같이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기를 내 몸이 내가 아닌 것 같다 이겁니다. 더불어서 ‘이 몸이 내가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나’라고 결론내립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생각에 몸뚱이는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이것은 나인 것 같아요. ‘생각하는 이것이 내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으니까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에서부터 데카르트의 모든 철학이 전개됩니다.
다시 돌아와서, 경허스님은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마음만 찾으면 된다고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어디에 가서 돈 주고 살 필요도 없고요. 몇날며칠을 걸어 가야 찾는 것도 아니고요. 24시간,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찾으면 깨달음을 얻게되고 생사를 면하게 되고 부처님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목표라고 말입니다. ‘네 마음을 찾아라. 그러면 영생을 구할 것이다.’ 이것이 ‘중 노릇 하는 법’의 첫 번째 단락의 명제입니다.
몸뚱이가 ‘나’라면 송장도 ‘나’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으로 알고,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되고 귀신도 되어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을 생각하야
중생들이 왜 ‘나’라고 하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몸뚱이가 나라는 뿌리 깊은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몸뚱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경허스님은 위의 구절을 읊습니다.
내 몸뚱이가 시체라고 합니다. 피가 돌고 살아 있는 몸뚱이가 왜 시체라는 겁니까? 표현을 조금 달리해보면요. 나는 지금 내 앞에 카메라를 보고 있고, 여러분은 나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겉이 멀쩡한 시체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시체도 눈이 있는데 카메라를 봅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는 눈이 보는 거잖아요. 코가 보는 게 아니고요. 시체도 우리와 똑같은 눈이 있는데 왜 못 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떠올려야 합니다. ‘무엇이 보는가?’ 눈이 보는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보는가? 눈이 본다면 내 몸뚱이는 내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시체도 볼 수 있어야 말이 맞습니다. 눈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시체는 볼 수도 없고 생각도 못하고 냄새도 못맡습니다. 이 사실을 내 몸뚱이에 대입하자면, 내 몸은 내가 아닌 겁니다. 왜 내 몸뚱이를 송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육체는 내가 아니다’로 연결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마음 말고는 다 허깨비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으로 알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중생들은 잘 먹고 잘 입고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밖에 있는 것들로 나를 치장하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더 큰 집, 더 멋있는 차, 더 비싼 시계, 더 높은 자리, 더 큰 명성 같은 것들로 나를 치장하는 것이 중생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나열한 것들은 다 내가 아닙니다. 허깨비입니다. 꿈과 같은 것입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풀잎의 이슬 같고 파도가 칠 때만 일어나는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이어서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것으로 알라 하는데요. 몸뚱이가 나라고 하면 나 자신과 죽음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인생의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때때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20대 30대 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죽을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젊었을 때 ‘죽고싶다’고 하는 것은 ‘정말 잘 살고 싶은데 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라는 불만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사실은 너무너무 잘 살고 싶은 마음이지요.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라면 수행자라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이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윤회… 전생, 이생, 내생도 연기한다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귀신도 된다는 구절은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면, 이 몸이 존재하는 지금 생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죽으면 아무 것도 없으니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대로 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생만이 생이 아닙니다. 그 전에 생도 있고 이후의 생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다음 생이 행복할 수도 있고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현대 과학으로 윤회가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만, 불교의 핵심사상은 연기입니다. 연기란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를 단지 공간적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시간적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100년 전, 200년 전, 10만년 전… 모든 삶들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그물이란 각각에 중심들이 있어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이 꼬여 있는 것입니다. 그물에는 각각의 주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연기적으로 보면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몸뚱이만이 내가 아닌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게 다 나입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세계일화’라고 하지요. 세계는 한 송이의 꽃이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백만 년 전, 백만 년 후가 다 얽히고설켜 있음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현대과학으로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마음을 찾고자 하면 수행하라
핵심은 내 마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 일은 꿈으로 알고, 목숨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알고, 죽으면 무슨 고통을 받을지 평상시에 생각하고 살면 하루라도 더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면 지금 당장은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생사를 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