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바탕

뮤지컬 ‘싯다르타’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직전의 싯다르타가 “죽음을 불사한 수행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나 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모습이 묘사된다.
자기 수행에 대한 확신, 수행을 하면 정각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인생의 불확실성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부처가 신이 아닌 불교에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믿음이 나온다. 우리의 삶이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 그것이 바로 초발심이고 수행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온다.

#고통, 믿음, 수행, 죽음, 행복

뮤지컬 <싯다르타>에서 발견한 믿음의 문제

얼마 전에 증심사 차원에서 뮤지컬 <싯다르타>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저는 뮤지컬이라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처음에는 녹음을 한 것을 틀어주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로 훌륭한 공연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하여 이번 호 월간 <증심>에는 뮤지컬 <싯다르타>를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적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믿음의 바탕에는 무엇이 있는지, 믿음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뮤지컬 <싯다르타>는 출가하기 전까지 싯다르타의 삶을 묘사한 1부와 출가한 이후 즉 수행자로서의 싯다르타의 모습과 깨달음을 성취하는 싯다르타를 표현한 2부로 나뉩니다. 2부의 내용 중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몇 있었습니다. 깨달음 직전에 싯다르타가 갈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고행을 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갈등을 하고요. ‘죽음을 불사한 수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수행의 결과에 대한 불확신으로고민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다 보니  20여 년 전 처음 출가하고 선방에 다니던 저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선방에 다니면서도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진짜로 뭐가 되기는 하는가?’ ‘과연 깨달아지기는 하나?’ ‘이렇게 해서 나아지는 것이 무엇이 있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몇 년을 앉아있어도 변하는 것이 없으니까 깨달음이란 게 실제 있는 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많이 게을러졌지요. 소임을 맡아 살아오면서 20여 년 전 초발심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신도님들, 불자님들 생각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불자라고 절에 다니고 있고, 또 배운 대로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뮤지컬 속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로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몸을 던질 사람이 과연 나를 포함하여 몇이나 되겠는가? 있기는 하겠는가? 

일상에서의 믿음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한 것인가? 불퇴전의 각오로 수행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신심은 분명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뮤지컬을 보다 보면 ‘불자라면 저렇게 굳은 각오와 결연한 의지로수행을 해야 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못 하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도 함께 들었습니다. 과연 모든 불자들이 싯다르타 수행자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해야 하는가? 싯다르타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는 수행자마저도 스스로의 수행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데, 우리가 어떻게 저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만약 불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이 그야말로 결연한 각오와 굳건한 신념이라면 불교는 그야말로 극소수를 위한 수행시스템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불교라면 이세상에 불자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얼마 안 될 것이겠지요. 설령 인생의 한 순간 그런 각오를 가지고 살았다 치더라도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 불교 수행을 함에 있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물러섬이 없는 불퇴전의 수행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보다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만들어가겠다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마음이라도 있으면 불자로서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의 믿음

한편, 실제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왕 파순이 저 수행자를 그냥 두면 더 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을것 같으니 세 딸을 보내서 그에게 욕정이 남아있는지를 시험합니다. 싯다르타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자 다시 마왕 파순이 근심과 불안함을 일으키지만 싯다르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화살이 쏟아지는 무력에도 싯다르타가 굴복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마왕 파순은 싯다르타에게 전륜성왕의 지위를 주겠다고 회유합니다. 

싯다르타는 그 마저도 거부하고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이룹니다. 마왕 파순의 이러한 유혹들은 기실 싯다르타 스스로의 안에 어떤 욕망이 남아있는가를 관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욕망과 번뇌가 얼마나 남아있는가를 스스로 관찰하고 확인하는 것이었지요. 

실제 경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뮤지컬 <싯다르타>에서는 믿음의 문제, 확신의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이렇게 고생을 해서 수행을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질 것인가? 자기 수행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죠. 확신은 확고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내는 마음이 곧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처음에 발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발심은결국 믿음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며 더 정확하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반드시 열반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이 발심입니다.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가만히 있으면 믿음이 생깁니까? 하루 세 번 부처님께 절을 하면 믿음이 생깁니까? 하루에 한 번씩금강경을 독송하면 일 년 안에 믿음이 생긴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어느 경전에도, 어느 누구도 이러이러하면 믿음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심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요즘 새벽예불을 하고 나오면 세상이 환해져 있습니다. 새벽에 새들의 울음소리가 무척 큰데요. 새들은 새벽에 저렇게 크게 울면 먹이가 생길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우는 것일까요? 아니죠. 그것은 본능입니다. 본능적으로 하는 데에는 믿음이필요하지 않습니다. 결과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인 행동에는 신념이나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본능과 습관은 믿음과 관련이 없다

한편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소변을 보고 옷을 입고 몇 시에 나가서 버스를 타고… 이런 행동들에도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몇 번 버스를 타면 몇 분 뒤에 어디에서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0분 뒤의 결과를 이미 알고있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 없지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경우도 그다지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 가보는 동네로 운전을 해서 간다고 할 때네비게이션을 켜고 가는데요. 여기에도 특별한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합리적으로 추론할 때 네비게이션은 GPS정보를 토대로 과학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그런 정보를 주는가에 따라서는 믿음이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무등산을 처음 올라가본다고 할 때, 중머리재를 가리키는표지판을 믿을 수 있습니까? 대체로 그렇죠. 결과가 무엇인지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국립공원, 국가라고 하는 공신력 있는 집단이 만들어 놓은 표지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림길에 누군가가 분필로 휘갈겨 놓은 안내판만 덩그러니 있다면 반신반의할 것입니다. 누가 써놓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될지 안 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누가 나에게 정보를 주는가? 내가 믿는 대상이 나에게 정보를 주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집니다. 나에게 정보를 준 대상이 국립공원이라면 여태까지 믿을만 했으니까, 또 그런 정보를 주라고 만들어 놓은 조직이니까 믿음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이 믿음을 유발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신이 아닌 이상 죽었다 깨어나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막론하고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으니까 점쟁이라도 찾아가는 것이죠. 

예를 들어 ‘나는 1년 뒤에 광주 시내에서 번듯한 카페 사장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칩시다. 스스로도 나의 다짐, 꿈을 믿지 못합니다. 왜냐? 미래를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과학적으로 따져봅니다. 내가 가진 자본이 얼마이고 수요는 얼마나 될 것이며 상권 분석은 어떻게 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성공할 확률을 가늠하는 것이지 확실한 믿음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점쟁이가 “어느 동네에 카페를 차리면된다.”고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그 점쟁이를 믿는다면 믿음이 확 갈 겁니다. 

이렇게 누가 그 정보를 나에게 주는가에 따라 정보가 담고 있는 결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누가’ 중에서 가장 믿고 신뢰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역사적으로 가장 신뢰했던 대상은 신입니다. 인간들끼리는 어떻게 하면 풍년이 들고 비가 내리는지를 알 수 없는데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능히 다스립니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이 신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만드는 존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후에 인간이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신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당연합니다. 네가 나를 믿어야 나도 너에게 원하는 바를 해주겠다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얻어낼 것이 있는데 모든 것을 그 사람이 틀어쥐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사람의 눈에 드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떠는 수밖에 없지요.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신에게 한 것은 오로지 그것입니다. 무언가를 갖다 바치면서 비는 것이지요. 신에게 드리는 것이 클수록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언제부터인가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대한불확신과 두려움이 작아집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예 없어지는 이유입니다. 신이 다 해줄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불자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열반을 증득하려면 열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으려면 깨달음에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부처님은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제일 쉬운 것은 불교 안에서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낸 관세음보살님 같은 신적인 존재를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관세음보살님에게기도하겠어.” 이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발원하고 발심하면 됩니다. 

더 근본적인 생각을 해봅시다. 어쨌거나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당신이 수행한 방법과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안 가는 것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아무리 봐도 도무지 믿음이 안 갑니다. 믿음은 과언 어디에서 오는가?

싯다르타 수행자가 수행을 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네 개의 성문 밖을 나가면서 병든 사람, 늙은 사람, 죽은 시신, 수행자를 봤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은 이런 것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긁고 병들고 죽는 문제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수행을 선택했다 이겁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에서 믿음이 나온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면 싯다르타 태자처럼 하면 됩니다. 싯다르타가 수행을 결심한 것은 인생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바로 열반을 향한 의지입니다. 우리의 수행에대한 믿음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흔히 말하기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행복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이런 면이 있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인생은절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이상 욕망이 나를 고통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인데 영원한 행복을 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말이 안 맞습니다. 그러니다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돌이켜 봅시다. 영원한 행복이란 것은 번뇌의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입니다. 번뇌를 완전히 종식한 것입니다. 고통이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행복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처음 출가를 결심하고 수행을 하고자 했을 때의 그 마음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을. 이런 마음이 수행에 대한 믿음,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똑같은 이야기를 티벳불교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제일 처음 믿음을 내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것입니다. 죽음에 대해 항상 명상하는 것. 이것이 하사도라고 하는 수행에 들어갈 때 제일 첫 단계입니다. 

왜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가?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 그 끝은 죽음이라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두렵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우리 삶이 고해의 바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무상하다는 것을 깊이 마음으로 느껴야 비로소 열심히 수행해야겠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은 믿음이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음의 바탕은 경전을 많이 보고 부처님 말씀을 외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고해의 바다라는 것을 매번 깊이 명상하는 데에서 믿음이 옵니다.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내 안에서 열반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생기고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발심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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