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초기불교의 이해

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8 (完)

수행에 대한 몇 가지 문제의식

오늘은 수행편입니다. 이 책 <초기불교이해> 275쪽부터 나오는 제3편 초기불교의 수행 파트는 큰 무리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실참에 관련해서는그 전에 <참선요지>나 <참선요지> 이전에 했던 실참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책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몇 가지 말씀드리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가수 박진영의 이야기를 봤습니다. 하기 싫지만 몇 십 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실천한 게 두 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간헐적 단식입니다. 하루에 4시간만 먹고 나머지 시간은 금식을 하는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배고파 죽겠다.” 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아침에 일어나면 꼭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요. 또 입에 달고 사는 말이 “힘들어 죽겠다.” 랍니다. 

“배고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라고 하면서도 가장 하기 힘든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이유는 무대에 섰을 때의 쾌감, 관중들의 반응에서 오는 행복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대에 서는 것은 일 년에 한 번 정도지만 그 무대 위의 순간을 위해 일 년 동안 힘든 일을 해나가는 것이라고요. 

요즘 사람들 치고 매일 운동을 하고 식단관리를 해야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몇 십 억 인구 중에 박진영 만큼 꾸준하게 운동하고 체중관리를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하면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악물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알고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생각만 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만 하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은 동기부여가 얼마나 강하냐의 차이라고 봅니다. 

수행, 그리고 동기부여

사실 박진영처럼 1년에 한 번 무대에 서서 팬들의 환호성을 받는 사람은 아주 특수한 케이스일 겁니다. 무대에 서고, 호응하는 관중이 있고, 인기를 누리는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보니 특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까. 보통사람은 그러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불교를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은 불교의 수행이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알지만 안 하는 것이죠. 사념처 수행을 어떻게 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책만 조금 보면 됩니다. 심오한 철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비슷한 예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져서 운동을 하다 보니 과도하게 운동하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운동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목숨을 위협당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광적일 정도로 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안 하는 것을 모두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돌려야 하는가?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은 다 의지가 약한것인가?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단지 의지가 강해서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도 하고, 발심이 중요하다는 말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교학체계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면 이해를 하는 만큼 수행에 동기부여가 생기는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을 보면, 잘 알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 알고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선방에 다니는 스님들 같이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가자든 소임을 보는 스님이든 정말 열심히 수행에 일로매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의 의지나 불교에 대한 이해 말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하고 있습니다. 

유대문명과 인더스문명

제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현대의 문명은 크게 보면 중국의 황하문명, 인도의 인더스문명, 지금의 중동의 메소포타미아문명, 그리스 로마문명 등4대 문명으로 나뉩니다. 인류문명의 주류를 이루는 서구사회는 이 중 2개의 문명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종교로 대표되는 유대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합리적 이성과 과학의 영역은 고대 그리스문명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두 문명을 뿌리가 다르게 때문에 항상 갈등이 일어납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주류를 이뤘던 문명은 유교로 대표되는 황하문명입니다. 유교 시스템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시스템입니다. 철학이나 종교라기보다 현실적인 삶을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회를 잘 꾸려서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학문입니다. 

인도의 인더스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깊고 다양하지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문명입니다. 인더스문명이 불교라는 옷을 입고 세계화되었습니다.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로 넘어와 어떻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가? 이 부분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 종교의 근간이 되는 유대사회와 인더스문명을 비교해보면 많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척박한 환경입니다. 유대문명은 사막이고 인도는 건기와 우기가 극단적이지요. 이런 환경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유대사회의 경우에는 지상의 모든 영광을 절대적인 신에게 돌림으로써 이곳에서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괴롭지만 신의 종이 되어서여호와의 품에 가면 모든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도사상의 핵심, 정신적인 수행

인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후나 삶이 척박하고 힘든 것은 비슷했지만 개인의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도 브라만교에서도 일관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현세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이 인도철학, 인도사상의 목표입니다. 그 틀 안에 불교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번뇌에서 벗어날 것인가?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게 열반을 성취할 것인가?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문화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 역시 개인의 수행에 있습니다. 

한쪽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벗어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정신적인 훈련이나 노력을 해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인도사상이 불교라는 외피를 입고 세계화되었다는 말씀을 앞서 드렸는데요. 인도사상의 핵심은 정신적인 수행입니다. 

그런데 황하문명권의 유교사회는 개인의 정신적인 수행을 통해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사상적 베이스가 약합니다. 우리나라를 잘 보면 불교가 지배적인 통치 시스템으로 정착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고려가 불교국가라고 하지만 통치 시스템은 유교였습니다. 다만 백성들의 정서와 신앙을 불교가 책임졌던 것이지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남은 불교의 모습, 또 중국에 남은 불교의 모습은 주술성을 기반으로 한 제례의식입니다. 아주 드라이하게 핵심적으로 말하면 불교가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서브컬쳐, 서브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이지요. 

우리 종교의 특징, 주술성 기반의 제례의식

인도불교의 특성은 현세의 괴로움을 개인의 수행으로 극복하겠다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정착한 불교는 주술성을 기반으로 한제례의식이라는 말씀도 함께 드렸습니다. 

동아시아의 현실적인 사회 통치 시스템은 유교 문화권이었고, 불교는 말하자면 비주류로써 흡수되었습니다. 우라나라의 경우 무속신앙 토속신앙과 결합했고 중국의 경우에는 도교와 결합했습니다. 기존에 있던 이러한 기복신앙에 불교는 풍부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나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수행 중심의 불교와 주술성을 바탕으로 한 기복신앙으로써의 불교가 공존해왔습니다. 어떤 때는 기본신앙이 강했다가 어떤 때는 수행 중심의 불교가 강한 모습을 보여왔는데요. 이 두 가지가 통일되어서 하나의 모습으로 이어져오지는 않았습니다. 

수행 중심의 불교는 굳이 표현하자면 엘리트 불교, 출가자 중심의 불교였습니다. 화두 참선 자체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중국의 화두 참선 교과서라고 하는 <대혜보각선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혜 보각 선사와 선과 참선에 대한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은 당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수행 중심의불교는 동아시아에서는 엘리트 중심으로 소수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반적인 사회와 결합된 형태는 불공, 제사 등 주술성을 기반으로 한 제례의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이러한 제례의식에 풍부한 사상적, 문화적 요소를 제공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 불교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찰의 지배적인 신행양식은 기도, 제사, 불공입니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일종의 반복적인 주술입니다. 기도하고 축원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주류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수행의 전통이 남아있는 곳은 조계종, 그중에서도 선방입니다. 중국이나일본에서는 수행하는 전통 자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나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불교의 수행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개인에게 열심히 수행하라고 해도 문화적인 환경이나 사회 시스템이 수행을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도와 우리나라의 차이입니다. “불교는 수행하는 종교야. 좌선하고 참선해.”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운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안 된 사람에게 열심히 다이어트 하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직수입한 서구의 명상 역수입

최근 불교의 흐름 중 새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앞서 19세기 중반 서양에서 초기불교를 문헌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니까야, 범어 그 자체로초기불교를 받아들이는 독일이나 일본의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특히 유럽이 동남아시아를 대거 식민지화 하면서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요소를 자기 식으로 연구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였습니다. 

우리나라 같이 몇천 년에 걸쳐서 티벳이나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초기경전을 원전 그대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초기불교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대승불교 개념인 유식, 중관, 화엄사상 등을 거치지 않고 초기불교가 곧바로 전파된 것입니다. 조금 더 지나면서 남방불교와 티벳불교가 서구로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서구에서는 불교를 종교나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교의 실천적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개인의 힐링 차원으로 수행을 하는 흐름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기존 방식 즉 인도나 티벳, 중국, 우리나라, 일본과 같이 승가조직을 통해 불교가 확장되는 양상고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책이나 명상센터같은 매개를 통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받아들이는 개인 중심의 불교가 역수입되어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도 힐링의 한 측면으로써의 명상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애시당초 인도에서 수행을 하는 목적은 고해의 바다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흐름은 번뇌의 종식이라는 당초의 목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구에서 명상은 산업이고 비즈니스입니다. 종교적인 부분은 많은 부분 탈색되고 ‘지금 내가 지치고 정신적으로 힘들다’, ‘쉬고 싶다’, ‘내려놓고 싶다.’ 이러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역할로 불교가 변질된 것이지요. 

지금 우리사회에서 불교는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모습인 주술성에 바탕한 제례의식, 조계종 내 선방이라는 특수영역에서 진행되는 소수의 수행적 측면, 종교적 이유나 승가 조직과 전혀 관련 없이 개인의 필요에 따라 명상을 하는 모습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불교적 수행이란? 

이런 상황에서 불교적 수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을 할 때에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개인이 동기부여를 확실하게 해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굳건한 서원을 세워서 자신을 다그치며 수행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겠고요. 이런 방식은 소수의엘리트 지향적 수행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주술성에 기반한 제례의식을 넓은 의미의 수행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염불도 수행이고 기도도 수행입니다만, 그것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일상화되어야 하고 집중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절에 와서 천수경 읽는 것이 수행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 예불에 동참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최소한 박진영이 매일 운동하고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처럼 매일 절에 와서 예불하고 염불하고 독경을 해야 비로소 수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지요. 

셋째. 넓은 의미의 명상을 수행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목적을 열반을 성취하는 것에 둔다기보다, 정신적인 치유를 하고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정도도 수행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아렇게 크게 세 가지 정도를 현대의 불교적 수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도 올바른 의미의 수행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각기 문제를 가지고 있죠. 

어떻게 수행을 하는 것이 좋은가?를 고민하기 전에 우리사회에서 불교적인 수행을 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개인개인이 고민하고 21세기 한국사회에 맞는 수행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엄연한 불교국가입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고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불교적 기반이 단단한 환경에서 수행을 생각하는 것과,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종교 없는 사람이 종교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회에서 불교적인 수행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 종교적 수행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에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의 수행의 의미를 고민해보는 것으로 8회에 걸쳐 진행했던 초기불교이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부족하나마 초기불교라는 낯선 장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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