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7

12연기를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 쉽다고 착각하지만 12연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일이다. 마치 너무 맑고 투명한 호수는 언뜻 보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12연기를 설명하는 네 가지 방식 중에서 남방불교에서는 ‘분위연기’를 채택한다. 12연기의 12개 요소가 과거, 현재,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을 상속한다고 풀이하는 해석이다. 이 같은 분위연기적 해석은 삼세양중인과설로 이어진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인과가 두 번 반복되는 것으로 과거의 인이 현재의 과가 되고, 현재의 인이 미래의 과가 된다.
이때 등장하는 무명 행 식 명색 촉 수와 같은 12연기의 요소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개념과 달리 아비달마만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언어로 12연기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실참수행을 통해 12연기를 체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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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연기를 알아봅니다. 교재 209쪽부터 이어지는 14장, 15장, 16장의 내용입니다. 

제14장. 어떻게 해탈,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제15장.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 12연기 1
제16장.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 – 12연기 2

12연기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삼세양중인과 같은 경우, 임종 시에 다음 생으로 재생 상속연결된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윤회인데, 이것을 어떻게 21세기의 과학적 방법과 현대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는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지만 납득이 안 되는데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믿어집니까? 첫 번째 이런 문제가 있고요. 

두 번째, 12연기를 이해하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관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통 남방불교에서는 삼세양중연기설이 있습니다. 윤회의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고 소멸하는가를 과거 미래 현재 삼생에 걸쳐서 설명하는 관점입니다. 그런가하면 20세기 들어서 <아함경>을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서구나 일본의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이중표 교수가 전개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12연기와 이해의 빈틈

논리적인 관점으로 12연기를 풀어낼 때 이중표 교수의 책을 들여다보면 ‘무명’, ‘행’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식’부터 설명합니다. 어떻게 세계가 우리 마음에 인식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풀어나가는데요. 여기에서는 무명과 행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는 문제점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일어나고 ‘생’에 의지해서 ‘노사’가 일어난다고 하는데요. 

내가 있다는 생각에 의지해서 ‘생’이 일어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됩니다. 찰나 생 찰나 멸하는 생각, 망상, 번뇌와 같은 ‘식’의 관점에서 생멸하는번뇌심이 일어난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요. 그렇게 이해하자면 ‘생’ 다음에 ‘노사’가 아니고 ‘멸’이든 다른 표현이 나와야 합니다. 

각묵스님이 서지학적으로 정확하게 고증을 하기를, 12연기의 ‘생’은 한 번 태어나는(birth) 것으 말하는 것이지 찰나 찰나 생멸하는 그 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빠알리어의 어원 자체가 다른 것이라고요. 이런 논리적인 상관관계로 접근할 때는 ‘무명’, ‘행’, ‘식’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유’에서 ‘생’, ‘노사’로 넘어가는과정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식’에서부터 ‘유’까지는 이어지는 과정 즉 어떻게 이 세계가 우리에게 인식되는가? 인식하는 과정에서 인식하는 주체와 객체가 나눠지는 과정은 충분히 납득이 되는데 앞뒤 부분은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양쪽 모두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저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웃음) 이것을 먼저 전제로 하고요. 

12연기의 어려움

부처님이 12연기에 대해 설법하시고 설법을 들은 스님들이 돌아가고나서 시자인 아난존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12연기가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듣기에는 그렇게 대단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말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네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12연기야말로 실로 매우 어려운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아주 깊은 호수가 있을 때 그 물이 아주 맑고 투명해서 언뜻보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다. 12연기도 이와 같다.”

투명하고 깊다는 표현을 할 때 ‘심심(甚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천수경에도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매우 깊다는 표현인데요. 아주 투명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12연기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고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투명하고 깊은 호수처럼 그 바닥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을 쓴 위숫디막가 스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비달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연기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연기에 대해 주석을 달고 해석하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무겁다.” 

이처럼 12연기는 부처님 교리의 핵심인데 우리들이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고요. 

대승불교의 오류 : 12연기와 연

각묵스님 같은 경우는 12연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통 남방불교의 입장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연기와 연을 구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12연기와 제법의 상호관계를 이야기하는 연을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초기불교에서 12연기는 윤회의 괴로움이 어떻게 생성하고 소멸하는가의 키워드입니다. 생성하는 것은 12연기에서 유전문이 되고, 소멸하는 것은 환멸문이 되는. 결국에 연기는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대승불교에서 제법의 상호관계로써,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중중무진법계, 인드라망 같은 것을 두고 ‘연’이라는 독립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예 단어 자체가 다른 거죠.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니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대승불교 중에서도 초기, 북방 아비달마나 유식에 대해서는 이런 12연기를 계승, 승화시켜서 ‘연’에 대한 내용으로 발전시켰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처음에는 연기와 연이 확실히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12연기를 계승 승화시켜서 연으로 발전시켰다고 하니 이 역시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느낌은 듭니다. 

남방불교 아비달마의 삼세양중연기설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연기설 중에서 남방불교 아비달마에서는 삼세양중연기설을 채택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방 아비달마도 마찬가지로 설일체유부 같은 경우에는 삼세양중연기 인과를 채택해서 설명합니다. 

결국 이 책에서 연기설을 이야기할 때, 제16장에서 12연기를 이야기하고 제15장에서 12연기를 구성하는 각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제14장에서는 대승불교에서 12연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바가 이런 것이다 하는 각묵스님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12연기가 구체적으로 각각의 요소들이 어떻게 연관되어서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 핵심인데 실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삼세양중인과에 대한 입장에 동의한다거나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남방불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고 대승에서도 구사론이나 유식까지는 인정되고 있는 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하는 정도로 오늘 강의를 진행할까 합니다. 

12연기를 설명하는 네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 찰나연기 2. 원속연기 3. 연박연기 4. 분위연기 입니다. 아비달마에서는 네 번째 분위연기로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찰나연기는 한 찰나 안에 12연기가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고요. 원속연기는 이것이 여러 생에 걸쳐서 시간을 뛰어넘어서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연박연기는12 찰나에 걸쳐서 동류와 인류의 인과로서 연이어 상속한다는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위연기 : 12요소가 삼생에 걸쳐 5온을 상속

마지막 분위연기는 12연기의 열 두 개 요소가 과거 현재 미래의 생에 걸쳐서 5온을 상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12연기가 일련의 5온의 흐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연기의 각각의 두드러진 상태가 각 요소로 명명되었다고 봅니다. 5온인데 ‘유’의 상태가 두드러지고, ‘수’가 두드러지는 등 12연기를 5온의일련의 상속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부분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전 시간에 5온 12처 18계가 모두 같은 인식된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틀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12처가 5온과는다른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결국 경험된 세계, 일체를 설명하는 틀이라고 말입니다. 

5온이 인식된 세계, 경험된 세계를 설명하는 틀이라고 본다면 그 매 찰나, 5온이 각각 서로 상속하는 과정을 12연기라고 하자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앞에서 말한 관념적 존재를 법으로 해체해서 먼저 아공을 체득하고, 해체한 각 개별의 법의 성질을 깊이 통찰해서 무상과 고, 무아를 체득해서 열반에 이르는 법공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 5온이라는 틀을 제시한 것이죠. 이 부분과 12연기가 상관성을 가지고 연결된다는 설명입니다. 

앞서 5온은 12처로 설명할 수도 있고 18계로 설명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5온이 일련의 흐름으로 표현되는 것을 12연기라는 틀로 설명한다고 이해하면전체적인 아비달마 교학의 철학적인 체계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위연기가 설득력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삼세양중인과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중요한 것은 무명이 무엇이고 행이, 식이 무엇인지를 삼세양중인과설에서는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상관관계로 설명하는 것과 삼세양중인과설로 설명하는 것이 개념적인 정의 자체가 다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납득하기가 힘든데요. 

삼세양중인과설로 해석하는 12요소의 상속성

삼세양중인과설에서 무명이라 하는 것은 과거생에서 일어난 온갖 번뇌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표현을 쓰면 중유의 최후 찰나를 거쳐 현생의 의식으로 잉태되기 전까지의 오온입니다. 

생유는 태어나는 찰나, 사유는 임종의 찰나, 생유와 사유 사이가 우리가 살아있는 기간 즉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이 본유입니다. 그리고 사유와 태어남의 순간이 중유입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중음신이죠. 이것이 49재의 근거가 되고요.

어쨌든 남방불교에서는 임종의 순간에 마음과 식이 바로 다음생의 재생연결식으로 상속된다고 합니다. 북방 아비달마나 대승불교로 넘어가면 이 사이에 중유가 들어갑니다. 중유는 중음신이고, 그래서 오온을 설명할 때 첫 번째는 과거의 번뇌 내지는 북방 아비달마에서는 중유의 최후 찰나의 오온이 무명이라고이야기합니다. 

상식으로의 개념과 아비달마에서의 개념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무명’, 즉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의 개념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무명’을 ‘알지 못함’, ‘밝지 못함’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면, 그 ‘무명’이 왜 ‘행’이라는 심리현상의 조건이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과거생에 일어난 온갖 번뇌 혹은 중유의 마지막 찰나로써의 오온으로 이해하면 구체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렇듯 아비달마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12연기를 이해하기가 제가 볼 때는 수월합니다.

그 다음 ‘행’은 과거생에 지은 온갖 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번뇌가 업을 만드는 것이죠. 과거생에 만들어진 번뇌를 조건으로 해서(인으로 해서)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 ‘행’입니다. 이렇게 ‘무명’에서 ‘행’까지는 삼세 중에서 과거생에 해당합니다. 이 과거생의 원인이 ‘식’ ‘명색’ ‘촉의’ ‘촉 ‘수’까지의 현재생의 결과를만들어냅니다. 

삼세양중인과설에서는 ‘식’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일반적인 아비달마에서 식은 아는 과정, 인식 행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5온 중에서 모태에 잉태되는 찰나의 5온을 ‘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이 시작되는 생유의 단계지요. 왜? 그때에 ‘식’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때 가장 두드러지는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들이 21세기의 과학적 방법과 언어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데 몇 줄의 문장만 가지고는 추론하기도 사실 힘듭니다. 왜 잉태되는 순간에‘식’이 가장 두드러지는가?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땐 온전한 육체를 갖춘 상태가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 라고 하는 추측은 결과를 상정해놓고 하는 추측이지요. 때문에 과학적 측면에서 수용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일단은 구사론이나 아비달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생유 다음에는 본유가 시작됩니다. 임신을 한 후 3주, 4주 하며 점점 아이가 커지지 않습니까. 그때, 잉태 이후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을 ‘명색’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인식과정에서 ‘명색’이라 하면 명은 이름이고 색은 모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색이라 하면 이름과 모양을 인식하는, 이렇게 생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단계를 의미하는데요. 아비달마에서는 개념 구성 자체가 다르지요. 잉태 이후 안의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6처)이 생성되기 전단계의 5온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화합하기 전까지의 5온인 것이죠. 

삼세에 펼쳐지는 12요소의 연결 단계

‘촉’은 6근, 6경, 6식이 화합하는 것입니다. 6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수’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단계입니다. ‘수’는 괴롭다, 즐겁다, 즐겁지도 괴롭지도않은 느낌입니다. ‘촉’은 그런 느낌이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의 5온이며 3~4세 정도의 단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수’는 즐겁다 괴롭다라는 느낌은 있지만 좋다 싫다 라는 ‘애’, ‘탐’을 일으키지 않은 전 단계입니다. 5~7세부터 14~15세까지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식’에서 ‘수’까지는 ‘무명’과 ‘행’이라는 과거생의 원인으로 인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수’로 인해서 ‘애’가 일어납니다. 삼세양중인과설에서는 ‘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애탐이 생겨나지만 아직 널리 추구하지 않은 상태의오온으로 16세부터 성년에 이르기 전까지입니다. ‘취’는 성년의 단계입니다. ‘취’라고 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애’의 단계가강해지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애’와 ‘취’는 과거생의 ‘무명’과 동일합니다. 애는 갈애이고 취는 집착입니다. 갈애와 집착은 다시 말하면 번뇌입니다. ‘무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과거생의 갖가지 번뇌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삼생에 걸쳐서 인과 과가 두 번 중복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인은 과거생의 ‘무명’과 ‘행’이고 그 과는 ‘식’ ‘명색’ ‘육입’ ‘촉’ ‘수’입니다. 두 번째 인은 현재생의 ‘애’와 ‘취’입니다. 

다음에 오는 ‘유’는 과거생의 ‘행’에 해당합니다. 업이지요. 번뇌가 업을 만드니까요. ‘유’는 ‘취’에 따라 미래 존재를 낳게 되는 업을 조장합니다. 굳이 이것을‘유’라고 이야기한 것은 다음생을 조작,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과 ‘노사’는 다음생에 대한 내용입니다. 

양중 : 삼생에 걸쳐 인과가 두 번 반복됨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 삼생에 걸쳐 인과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을 양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삼세양중인과라는 개념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5온이 상속되는 과정을 12요소가 서로 연기하며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목적은 윤회의 괴로움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고, 윤회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을 역순으로 밟아야 함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비유를 듭니다. <밀란다왕문경>에서 밀란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윤회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때 나가세나 존자는 윤회를 촛불이 옮겨가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A라는 촛불의 불이 켜졌다가 꺼지고 B라는 촛불이 켜졌다가 꺼진다고 할 때, 각각의 촛불은 각자 생멸하되 A촛불이 B촛불로 상속되어서 마치 불이 전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윤회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풀어서 생각해보자면 영화를 떠올리면 됩니다. 영화는 1초에 24장의 사진이 영사기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실제로는 24장의 사진이 특정한 자리에 있다가 없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뛰어다니고 개가 짖는 연속적인 동작으로 보게 됩니다. 스크린에서 누군가가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 가고 하는 것들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하나의 5온이 영사기 앞에 드러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죠.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A라는 사진이 보이고 사라지고 B라는 사진이 보이고 사라지는데 왜 그것이 이어지면 아무 것도 아닌 스크린 위에서는 무언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까. 첫 번째, 영사기가 강하게 빛을 비추기 때문이고 두 번째, 우리의 눈이 사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너무 빠른 순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윤회를 놓고 보면 어떻게 해서 지금 찰나의 5온이 다음 찰나의 5온으로 상속되는가? 이것이 현실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이지요. 

이해의 한계, 실참수행의 필요

굳이 21세기의 과학으로 설명하자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뇌세포라는 물질의 활동입니다. 인식활동은 곧 뇌세포의 활동이라 이겁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나의 의식을 다른 육체로 옮기고 싶다고 하면 어떨까요? 나의 뇌파를 온전히 저장장치에 저장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육체의 뇌에 옮길 수 있을겁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물질적인 매개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5온의 일련의 흐름은 뇌의 활동 자체가 여기에서 저기로 전이한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에 토대하지 않은 활동이 상속되고 움직이는 거죠. 이런 부분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사실은 필요합니다. 상속이라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마는데, 상속이라는 것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진행되는가 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만약 5온의 상속이라는 매커니즘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부처님께서 부정했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식활동이 그 자체로 이어진다는식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부처님께서 12연기가 아주 심오하고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은 5온이 상속하는 과정을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체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득을 현대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상속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 말로 “5온이 상속한다”고 하면 별 것 아니게 들립니다. ‘5온이라는 것이 물 흐르듯이 상속하는구나.’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버리죠. 그런데 상속이라는 말을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행속에서 체득해야지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칩니다. 관념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그냥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2연기가 부처님의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했고요. 후대의 스님들이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또 12연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2연기를 이해하기까지는 더 많은 공부와 실참수행이 필요할 것입니다. 찰나의 순간에 자기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그나마 12연기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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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8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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