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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五戒) : 불투도(不偸盜)

오늘은 오계 중 두 번째 항목인 불투도에 대해 법문하겠습니다. 우선은 계와 율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이후에 불투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계와 율, 무엇이 다른가?

흔히 오계(五戒)라고 하면 불자라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계라고 하지 오율(五律)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계율이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오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과연 계와 율은 어떻게 다를까요?

송광사 강원에 다닐 적에, 새벽예불을 하면 이른 바 전투모기라고 하는 아주 지독한 모기들이 달려들어서 예불이 끝날 때까지 대여섯 방 정도는 예사로 물어뜯습니다. 예불문이나 천수경을 할 적에 팔이나 목이 물리면 그런 대로 참을만합니다만, 예불이 끝나갈 무렵 반야심경을 하면서 긴장이 살짝 풀렸을 때 발등을 물리면 순간적으로 살기가 치솟을 만큼 아픕니다. 차마 법당에서 모기를 잡을 수는 없고,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지요.

예불이 끝나고 나면 강원 큰방에 모여 간경을 합니다. 큰방의 모기들은 하도 배불리 먹다보니 언제나 고도비만 상태로 날렵하게 날지 못합니다. 책을 보면서 가볍게 손을 휘젓기만 해도 툭 맞아서 피가 터져 죽습니다. 내 피를 먹지는 않았지만 내가 휘두른 손날이 맞았으니 내가 죽인 것이지요.

이런 경우 첫 번째, 법당에서 모기에게 물려서 순간적으로 살의를 느꼈다면 이것은 계를 어긴 것일까요, 어지기 않은 것일까요? 모기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냈기 때문에 계를 어긴 것입니다.

두 번째, 법당에서 나와 큰방에서 간경을 하다가 모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단지 쫓기 위해서 휘두른 손에 모기가 맞아서 죽었다면 계를 어긴 것입니까? 어기지 않은 것입니까? 이것도 어긴 것입니다. 내가 직접 죽였기 때문입니다.

계戒, 나 자신과의 약속이자 도덕

이렇게 계라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불살생의 계율로 비추어 볼 때 ‘나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일종의 도덕과 윤리인 것이지요.

율이라는 것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 송광사 스님들이 모여서 모기를 죽이는 살생을 범하면 지장전에서 참회를 해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면 이것은 일종의 강제조항입니다. 법, 법령과 마찬가지이지요. 죄를 지었을 때 그에 따른 처벌 조항이 바로 벌입니다. 다시 말해 계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고 율은 규칙이고 법률입니다.

앞서 오계라고 이야기하지 오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계라는 것은 벌칙이 따르는 법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발적으로 불자라면 이것을 행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 이것을 어기면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律, 어기면 벌칙이 강제되는 공동체의 규칙

반면 스님이 되었을 때 지켜야 할 것 중에 율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율장은 계장이라고 하지도 않고 계율장이라고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장이라는 것은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면 이러이러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경찰, 공무원 등은 어떠한 잘못을 했을 때 정직, 감봉, 시말서, 경고 등의 처벌 형식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승단이라는 공동체를 이룰 때에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가장 심한 죄를 범했을 때에는 산문출송 즉 절을 떠나도록 하는 벌이 있습니다. 정직 비슷하게 소임을 내려놓아야 하는 조항도 있고요, 경미하게는 참회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율입니다.

정리하자면 계는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사회적인 표현으로는 도덕, 윤리와 같고요. 율은 법령이나 법칙을 말합니다. 어기면 벌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율은 강제조항입니다. 계율을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계를 어기면 벌을 받지는 않지만 내 안에 죄책감 혹은 죄의식이 생깁니다. 죄의식이 생기면 참회를 합니다. 이것이 계와 율의 차이입니다.

계와 율을 혼동하지 않기

불자라면 계와 율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생활해야 하는데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도님이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는 도중에 모기를 잡았다고 합시다. 이때 스님이 화가 나서 “모기를 죽이다니! 법회 끝나고 108배 하세요.”라고 강제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스님이 계와 율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 것이지요.

이때 만약 증심사에 ‘불자가 법회를 보는 동안 모기를 죽이면 한 달 동안 법회 출입을 금한다’는 규칙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공동체가 정한 계율을 어긴 것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불자들은 계와 율을 정확하게 알고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는 내 안의 윤리의식이자 불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했을 때 스스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탐내지 말라

불투도(不偸盜)라는 말을 직역하면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불교가 한자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생긴 말이고, 원래 인도말로는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가지지 말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줍지 말라. 남을 시켜서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줍지 말라. 내가 아닌 남이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줍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말라.’ 이것이 불투도의 내용을 부연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습니다. 이 두 번째 계율에 속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과대포장입니다. 100g을 넣어야 하는데 80g만 넣고 과대포장해서 남에게 준다면 그것은 남에게 가야 할 100g을 뺏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기 치는 것, 속이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불투도에 해당합니다.

사기를 쳐서 마치 많은 것을 주는 것처럼 속이지만 실상 갈취하는 것도 두 번째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직원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는데 사회가 정한 월급보다 못한 월급을 주는 것도 직원이 당연히 가져야할 것을 빼앗은 것이므로 불투도에 해당합니다.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평등의 개념, 공정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불투도계의 전제는 ‘소유’?

그런데 불자라면 한 발짝 나아가서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갖지 말라는 계를 지키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것, 저것은 남의 것이라는 분별입니다. 소유를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불투도라는 계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무명에서 비롯되며, 무명으로 인해 우리 안에 집착이 생기고 번뇌가 생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무소유, 즉 소유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했다면 뭔가를 소유하면 안 됩니다. 불투도라는 계를 놓고 볼 때 부처님 말씀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실적인 측면, 두 번째는 연기적인 측면입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과 윤리를 제시한다

첫 번째, 현실적인 측면입니다. 오계는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술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만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에도 열 가지 십계라고 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마음속으로도 간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종교의 틀 안에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덕관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도덕 없이 법만 있다고 하면 세상이 너무나 각박하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법으로 따지기 이전에 개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한 기준 즉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가 훨씬 원활하게 굴러갑니다.

예를 들어 전쟁 상황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도덕을 챙길 겨를이 없습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요. 그러나 이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회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도덕관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종교에서나 기본적인 도덕관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불투도계는 연기사상에 맞닿는다

두 번째, 연기적인 측면에서 불투도를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이 시계를 내가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이 시계가 내 것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시계를 샀기 때문에, 즉 나의 노동, 나의 노력현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인 것이지 소유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계 어디에도 ‘내 것’, ‘중현이의 것’ 이라는 표시는 없습니다. 누군가 ‘아니다, 이건 내 것이다’ 우겨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는 것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생각이 나온 출발점은 이 시계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들인 나의 노력과 공력입니다. 단지 나의 공력만 들어갔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톨의 쌀이 내 밥상에 올라오려면 농부가 농사를 지어야 하고 운송을 해야 하고 마트에서 판매를 해야 합니다. 차가 다니기 위한 도로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기 위한 비료가 필요하고, 농부가 쓰는 핸드폰을 만드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따지다보면 내가 먹는 밥 한 톨에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노력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야기하기를, 단순히 남의 것이니까 손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여기에 기울인 노력이 얼마 만큼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기에 기울인 노력이 거의 없는데 그것을 가져가거나 뺏어가거나 훔치는 것은 여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들의 공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투도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귀가하면서 “엄마, 밥 주세요!” 하면 바로 밥이 나옵니다.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밥 한 끼를 먹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일해야 합니다. 한 끼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요.

불투도계를 성숙하게 이해한다는 것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사상을 모를 때의 우리는 마치 아이와 같습니다. 단순히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도둑질이야’라는 수준에서 불투도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연기법을 알고 난 상태에서는 ‘여기에 내가 보탠 노력이 없는데 이것을 내가 취하는 것은 숱하게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의 땀과 정성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투도는 후자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실천적으로 볼 때 주지 않은 남의 것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무주상보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모든 것에는 숱하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땀이 들어갔기 때문에 나의 노력도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에게 제공됩니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안다면 자비의 마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제공해줄 수 있으면 제공해주면 좋은 것입니다. 그 전에 ‘내 것을 준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무주상보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으면 저 사람이 필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내가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불투도계는 결국 무주상보시로 귀결됩니다. 주지 않은 남의 물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도덕규범이고, 그 내용을 더 깊이 들여다볼 때에는 연기사상에 맞닿아 있는 계입니다. 연기사상을 올바로 이해할 때 불투도계는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계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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