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4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관자재보살은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공(空)을 비어있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공은 곧 연기다.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으며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무언가에 의지해서 생긴다는 진리다.
내 안에 괴로운 감정이 생기는 것은 연기의 이치이다. 이것을 똑바로 비추어 보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하며, 마음의 여백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중생의 고통이 시작된다. 모든 것이 조건 지어져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아는 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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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에 대하여

반야심경 첫 번째 구절을 놓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공(空)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불교의 핵심은 반야심경에 다 들어있고 반야심경의 핵심은 첫 번째 문장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금강경, 천수경, 열반경 아무 것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반야심경의 첫 번째 문장의 내용만 정확하게 이해해도 여러분은 불교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불교의 목표는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를 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이며 계정혜 삼학이며 팔정도입니다.

이것을 하면 오온이 공한 이치를 비추어보며, 그런 상태가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반야심경의 첫 번째 문장을 읽어주면 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공 ≠ 비어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오온이 공한다는 것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공은 ‘비어있다’는 뜻의 한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인도어에서 공은 ‘연기’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연기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고 쉽게 번역되는 이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무언가가 있다’고 하는 오해와 오류에 빠지게 하기 십상이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연기 대신에 ‘공’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불교 경전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비슷한 용어를 찾아보니 빌 공(空)이라는 단어를 차용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불교의 공을 이해할 때, ‘공 = 비어있다’, ‘공 = 아무것도 없다’는 공식을 완전히 지워버려야 합니다.

공이라는 단어를 중국에서 사용하던 개념으로 차용하다 보니 흔히 한자어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한자어의 뜻이 아님을 완전하게 머리에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교의 공이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만 완전하게 알아도 공의 절반은 이해한 것입니다.

공 = 연기

그렇다면 원래 부처님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공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연기법이고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입니다. A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B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기의 정확한 뜻은 무언가에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대웅전 밖에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이 배롱나무만 있을 수 있습니까? 배롱나무가 있으려면 먼저 땅이 있어야 합니다. 말라죽지 않으려면 물이 있어야 하고요, 숨을 쉬려면 공기가 있어야 하고요, 광합성을 하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려고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나무 아닌 것들에 의지합니다.

현대생물학에서 생명을 정의하기를 항상성을 지키는 존재라 했습니다. 수분의 정도, 몸무게, 세포 수, 체온 등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존재를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체온을 유지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만 필요합니까? 정보도 필요합니다. 밥을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전한 곳에 있으려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다양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인간도 무언가에 의지해서 자신의 존재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이며 다른 말로 공입니다.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존재한다

공은 조건 지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무언가에 의지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흙도 없고 물도 없고 공기도 없는 상태에서 나무가 홀로 존재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조건 지어져 있다는 것은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조건 지어져 있는 존재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냥 그럽니다. 원래 그럽니다. 부처님이 단지 이 법칙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부처님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혹은 모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나요? 공이 무엇인지, 나무가 홀로 존재하는지 그럴 수 없는지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중요한 것입니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마음입니다.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서 말했듯, 결국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괴로움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다는 공의 개념은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똥이라는 직장 동료가 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개똥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가 그를 너무나 미워하게 만든다고 할 때,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 괴롭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괴로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개똥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원인이 되어서 내 안에 미운 감정이 생기고, 미운 감정을 참으려다보니 괴롭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감정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에 구속되어 있다

이 말을 잘 뜯어봅시다. 이 말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는 나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미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면 괴롭지 않은데,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없으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미운 마음은 내 밖에 있는 개똥이의 언행에 의지하여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공입니다. 의지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흙이나 물, 햇볕과 같은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우리 인간 역시도 내가 아닌 것들, 예를 들면 타인, 아주 더운 날씨 같은 것에 구속되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연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안다면 내 안에서 미워하는 감정, 슬퍼하는 감정, 두려움, 우울함, 즐거움 같은 감정들로 인해서 괴로울 때, ‘아! 인간 역시 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구나.’ 라고 체감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있는 연기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잡한 조건들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이 세상인데, 중생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연기란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 지어져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나 아닌 것들에 의지해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면, 나 아 아닌 것에 의해서 나의 감정도 들었다 사라지고 내 몸도 유지되는 것이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조견(照見),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하다는 것을 단순히 알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개똥이 미워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난다면, 연기의 이치 즉 나와 이 세계가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 단지 그뿐입니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하지 않고 ‘비추어 보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를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은 단어들을 쓰지만 사실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라고 이야기 할 때 ‘자유’라는 말의 참 뜻을 정확하게 알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다’라는 말의 느낌, 뉘앙스만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는 조견, 비추어 본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슴푸레한 무언가를 또렷이 보는 힘

비추어 본다는 말, 무슨 말일까요? 어둑어둑한 밤에 무언가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빛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후레쉬를 켜서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둠 속 어슴푸레한 무엇이 고라니 새끼인지 멧돼지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대상을 또렷하게,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후레쉬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추어 볼 때 후레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힘입니다. 건전지가 간당간당한 것보다 새로운 건전지를 끼우면 후레쉬 빛이 환하게, 멀리 나가겠지요. 마음도 힘이 좋아야 잘 보입니다.

마음의 힘은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왔다갔다 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있거나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거나 잡생각 없이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런 상태에서는 잘 볼 수 없습니다.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한 상태일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고요한 상태는 산란하지 않은 상태이며, 깨끗한 상태는 두려움이나 슬픔 등의 감정에 얼룩져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에 있으면 나를 포함한 이 세계가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후레쉬에 무언가를 비추어 보려면 내 앞에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내 바깥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언가가 있을 때만이 후레쉬를 비추었을 때 그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의 감정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 감정이고 내 생각이고 내 마음입니다.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가 나면 아무리 비추어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보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비추어보기 위해서는 내 마음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거리를 둘 수 있을까요? 물리적 거리를 두라는 것이 아니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만일 화가 난 상태가 온통 내 자신이라면 나 자신을 볼 수 없겠지만, 내 마음에 빈공간이나 여유 공간이 있다면 화가 나더라도 그 빈 공간을 통해서 화가 난 마음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에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빈 공간, 여백, 여유를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여백을 통해서 내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여백으로 감정과 거리두기

수행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 조건, 즉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과 마음의 빈자리를 만들어두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내 안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의지해서 내 안에 어떠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연기에 이치이지만, 그러한 감정이 온통 나 자신을 덮어버리면 나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고, 비추어 보지 못하면 영원히 중생으로서 괴로워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내 밖의 나 아닌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내가 어떠한 감정을 일으킬 때, 수행을 통해서 그 감정을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비추어 보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 요약입니다. 공이라는 말을 듣고 비어있다, 없다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공은 연기입니다. 무언가에 의지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무언가에 조건 지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공입니다. 반드시 모든 존재는 다른 무언가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공의 진리를 나 자신에게 적용하면, 나의 감정과 상태는 나 아닌 것 즉 타인, 날씨, 물건 등에 의지해서 결정됩니다. 중생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의지해서 존재하므로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야 하며,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힘이 강해야 하고, 내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마음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며, 내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내 마음에 일정한 공백과 여백을 만들어두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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