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곡(參禪曲) – 경허선사
허튼소리 우스게로 이날 저날 헛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볼까
죽을 제 고통 중에 후회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낸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寒心慘酷)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저 지옥과 저 축생(畜生)의 나의 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 차타(蹉跎)하여
다시 인신(人身) 망연(茫然)하다
첨선 잘한 저 도인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앓도 않고 선세(蟬蜕)하며
오래 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하며
항하사수(恒河沙數)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消遙)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에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푸주(抱廚)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지난 세 강의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공부를 하되, 육칠십 살 먹은 노파가 죽은 자식 생각을 하듯이 간절하게 나라는 놈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하여 깨달은 후에는 인연 따라 살면서 인연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며 살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또 다시 당부의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공부 안 하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푸줏간에 죽으러 가는 소처럼 우리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 살아있을 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을 때의 고통 안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것
참선곡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매일매일 옆에 두고 읽으면 스스로의 마음과 행동에 스며들어서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참선의 방법과 수행법을 잘 안다고 해도 수해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 참선곡과 같은 선대 스승의 가르침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수행하는 것을 생활화하면 그것이 바로 깨치는 길일 것입니다. 참선곡과 같은 선대 스승의 게송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지금 살아있을 때는 모르지만 죽을 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것을 안다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 중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아니라 음식으로 생각하지요.
요즘 마트에서 파는 생선을 떠올려볼까요? 머리, 꼬리, 지느러미를 모두 떼어내고 조리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판매합니다. 이것이 물속에서 파닥파닥 살아서 헤엄쳤던 물고기라는 생각은 잘 못 합니다. 그런데 어릴 적 집에서 생선을 먹을 때는 어땠습니까? 어머니나 할머니가 칼로 생선 대가리를 단번에 쳐내고 요리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장면을 보는 충격도 상당히 컸었고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생명체는 우리와 똑같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듭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보다 더욱 고등한 생명체가 있어서 인간을 음식으로 섭취한다고 가정하면 어떻습니까? 그 생명체는 인간을 요리할 때 우리가 돼지나 소, 생선을 요리하듯 인간을 손질할 것입니다. 몸을 토막내고 내장을 제거하고 뼈를 발라내고 살점을 먹겠지요. 우리도 다른 생명 있는 것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참선곡에서 표현한 죽음의 고통
이처럼 죽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선곡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낸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죽을 때는 팔과 다리가 백 마디로 쪼개지고 머릿골이 쪼개지고 오장육부가 타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선을 먹을 때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손질한 생선을 굽지 않습니까? 생선 입장에서는 오장육부가 타는 것이지요. 마치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가 인간을 그렇게 조리하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이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앞에 닥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죽는 순간부터 썩고 부패하고 진물이 나오고 벌레가 좀먹습니다. 고통 속에서 변해가는 것이 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경허스님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천만겁 차타(蹉跎)하여 다시 인신(人身) 망연(茫然)하다
백천만겁 차타한다는 것은 한번 어긋나서 그릇되면 백천만겁으로 차이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생에 한 생각 어긋나면 나중에는 다시 사람의 몸을 받을 길이 막연한 것이지요.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처음에는 5분만 돌아오면 되지만 1년, 2년이 지난 후에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잘 못 든 길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첨선 잘한 저 도인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앓도 않고 선세(蟬蜕)하며
선어록이나 조사어록에 보면 참선을 열심히 하신 스님들은 서거나 앉아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 없이 죽습니다. 실제 참선을 열심히 하면 육체적인 고통이 없이 죽을까요? 그것은 확인할 바가 없지만 미루어 생각하기에는 육체적인 고통을 정신적인 고통으로까지 이어가지 않는다는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마음까지 아프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겠지요. 그런데 육체의 고통을 단지 육체의 고통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육체의 고통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선세(蟬蜕)는 매미의 허물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매미가 허물에서 쏙 빠져나와 날아가듯이 깨끗하게 간다는 것이지요.
매미가 허물 벗듯 자유롭게 임종하려면
항하사수(恒河沙數)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消遙)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에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항하사수는 인도의 갠지스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하면 나고 죽는 데에 얽매이지 않아, 살 때에도 번뇌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하게 자적합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눈코를 쥐어뜯는 심정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참선곡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은 죽음의 고통을 모르지만, 죽을 때의 고통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안다면 살아있을 때 열심히 공부해야만 참선 잘 한 도인처럼 고통 없이 다음 몸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푸주(抱廚)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바로 우리 인간의 신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자국 하나하나는 사지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발자국은 하나하나가 곧 죽음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디 명심하여 열심히 참선을 하라는 이야기를 경허스님이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참선을 하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꾸준히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해 유혹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나태하거나 헤이해지거나 다른 일로 마음이 바쁠 때에 이러한 게송을 바탕으로 마음을 잘 다스립시다.
참선곡의 내용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치 내가 참선곡에 등장하는 인물이 된 듯, 참선곡의 내용을 마음속에 새겼으면 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참선곡을 읽으시라는 마음으로 참선곡 강의를 꾸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