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영가전에

영가전에 1

백중맞이 <영가전에> 특강 1

한국불교에서 ‘백중’은 사월초파일과 함께 한 해의 큰 행사로 여겨지기에 불자들은 백중 때 절에 가서 영가 접수를 하고 위패를 모시고 재를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백중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백중을 지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백중을 지내기도 합니다. 증심사는 2020년 백중 49재를 맞이하여 <영가전에>를 구절별로 살펴보면서 백중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영가시어 저희들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무명업장 소멸하고 반야지혜 드러내어

생사고해 벗어나서 해탈열반 성취하사

극락왕생 하시옵고 모두성불 하옵소서

<영가전에>는 영가에게 읊어주는 독경

영가란 무엇입니까? 돌아가신 분의 넋, 영혼을 의미합니다. 백중 기도 동안 입재를 포함하여 여덟 번의 제사를 지내는데, 민간신앙으로 치면 고인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 찾아와서 차례상을 드시고 가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백중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면 절에 다니지 않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불자라면 영가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영가(靈駕)는 3년이 지나기 전에 환생한다는데…

만약 영혼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백중 기도를 봉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가가 없다면 영가를 위하여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가는 있을까요?

북방불교에서는 누군가 돌아가시면 49일 동안 중음계에 있다가 환생을 한다고 믿습니다. 49일 안에 환생을 하지 못한 영가를 위해서 100재를 지내고, 1년이 지난 후에 다시 재를 지내고, 3년이 지난 후에 또 지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숨을 거두는 즉시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만약 10년 전에 어떤 조상님이 돌아가셨다면 불교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당연히 3년 안에 환생했을 것입니다.

백중 제사를 지낼 때는 ‘극락왕생 하라’고 축원합니다. 죽은 후에 3년이 지났으면 어떤 식으로든 환생을 한 뒤일 텐데 이미 다른 몸을 받은 영가에게 극락왕생하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미 환생한 영가의 극락왕생을 바라면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우리는 단지 먼저 돌아가신 조상님만을 위해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축원하는 조상의 영가들은 이미 다른 몸을 받아 환생을 해서 지금 이 시간 어디선가 중생으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생에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전생에는 어떤 이름으로 살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 내 전생의 이름으로 나를 축원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영가를 위한 기도, 모두를 위한 기도

환생을 한 영가는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악당이나 사기꾼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환생했을 수도 있고, 벌레나 나무로 환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사람만 중생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중생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영가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딘가에 살아있는 불특정한 누군가, 곧 모든 중생을 위해서 축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영가전에>는 ‘영가시여!’ 하고 부른 후에 ‘모두 성불하옵소서’라며 마무리 합니다. 영가님만의 극락왕생이 아니라 ‘모두’ 성불하게 해달라는 의미를 담아 염불하고 축원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다고 한다면 백중기도나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해서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환생한 그 영가가 어딘가에서 살면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도록, 성불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힘을 보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모두 성불하소서’의 의미입니다.

다시금 말하자면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전생의 내 이름으로 말입니다. 결국 백중기도는 모든 중생이 성불하게 해달라는 마음임을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내가 아는 조상님들 몇 분의 극락왕생을 아무리 빌어봐야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분들은 이미 환생한 뒤입니다. 다만 그 조상님이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좋은 몸을 못 받았을 확률이 높을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조상님이 지금 받은 그 몸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해달라고 발원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윤회: 영혼이 육체를 갈아입는 것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윤회를 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요?”

일반적으로 ‘환생을 한다’고 하면 사람이 옷을 갈아입듯이 영혼이 육체를 갈아입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이라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계속 바꿔 입는 것으로 윤회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 인도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관점입니다. 이를 재육화(再肉化)라 합니다. 똑같은 영혼이 몸을 다시 받는다는 관점이지요.

불교의 윤회: 조건 생, 조건 멸

불교의 관점은 다릅니다. <밀란다왕문경>에 쉬운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윤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나가세나 존자가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를,

“초에서 초로 촛불이 옮기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불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나 실제 각각의 촛불은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합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방금까지 기분이 몹시 안 좋았는데 컨디션이 좋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집니다. 그렇다면 친구가 가진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나에게 이동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친구의 즐거운 심리가 조건이 되어서 내 마음도 즐거워진 것입니다.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윤회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기(緣起)라는 것이 조건 생(生), 조건 멸(滅)이듯 윤회 역시 그러합니다.

보통 연기를 이야기할 때 공간적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실은 시간적으로도 작용합니다. 부처님은 영원히 윤회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식(識)이 재생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마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생의 찰나의 마음이 그 다음 생의 찰나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재생한다는 것은 전생의 찰나의 마음이 그 다음 생의 찰나의 마음의 조건이 되어서 다음 찰나의 마음이 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윤회도 찰나 생, 찰나 멸합니다. 찰나찰나 생하고 멸하는 마음이 윤회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윤회가 확장되어서 생사윤회가 되는 것이지요.

‘무명업장 소멸하고 반야지혜 드러내어’

‘무명업장 소멸하고 반야지혜 드러내어’라는 문구는 동어반복입니다. 무명업장을 소멸하는 것이 곧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야라는 말이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강조하고 있지요.

무명업장은 업(業)이 장애가 된다는 말입니다. 선한 업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만 악업은 나에게 장애가 됩니다. 내가 이전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서 지금 내가 받는 장애와 고통이 업장입니다.

업장은 무명에서 나옵니다. 업은 곧 행(行)인데, 지혜에 따라 행하면 반야행이 되는 것이고 탐진치 삼독에 물든, 결과적으로 무명에 물들어서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적으로 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무명업장을 소멸해야 반야지혜가 드러난다는 것은 선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명업장을 소멸하는 것 자체가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명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이고 반야지혜를 드러낸다는 것은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이 둘은 같은 말이지요.

‘생사고해 벗어나서 생사열반 성취하야’

‘생사고해 벗어나서 생사열반 성취하야’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것과 생사열반을 성취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사고해를 벗어나서 그 후에 저기에 있는 열반의 땅으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선후를 따져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곧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탈은 우선은 열반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해탈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봤을 때 해탈이라 함은 중생이 열반을 이루었으되 무명업장을 소멸하지 못해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고, 구경해탈지라 할 때는 특별히 열반을 증득한 상태에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 경지라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는 열반에 들어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보살님은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지만 중생들이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고통 받고 있으니 그런 중생을 버리고 나 혼자 해탈할 수 없다는 원력을 세워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들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굳이 구분한다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고해’는 고통의 바다를 말합니다. 어디가 고통의 바다입니까? 정확한 불교적 용어를 쓰자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중 욕계가 바로 고통의 바다입니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생과 사의 윤회가 계속되는 곳입니다. 스스로 무명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윤회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생사고해를 벗어나 윤회의 고통에서 헤매지 않는 것이 곧 해탈의 경지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극락왕생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성불하는 것입니다.

성불(成佛), 부처를 이룬다는 말은 깨달음의 경지를 의인화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반을 성취한다’와 ‘성불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은 모두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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