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2019)

인생은 욕계와 사바세계 사이에서의 줄타기이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사바세계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세상이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살면 이 세상에는 고통밖에 없지만 욕망을 잘 다스리면 세상은 자비로 가득 찬다.
<보왕삼매론>은 아주 평이하고 쉬운 경구이지만, 역으로 읽으면 사바세계의 현실이 오롯이 드러난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장애가 됨을 알고,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임을 알자. 봉사하는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로 보살이 되는 길을 걷자.

#경전, 기도, 무아, 보왕삼매론, 봉사, 수행, 의지

https://youtu.be/FrkvSK1o7WA

오늘은 초사흘을 맞이해서 <보왕삼매론>으로 법문을 하겠습니다. 보왕삼매론은 모두 다 아는 내용이고 내용도 아주 평이합니다. 그러나 법정스님이 말씀하셨듯 종교생활은 복습입니다. 영원한 복습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예습은 없습니다. 영원한 복습입니다. 아는 것도 다시 하고 또 하고, 할 때마다 처음 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자신들의 묵은 습을 버리고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깨닫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새로 공부한다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불자의 자세입니다.

보왕삼매론의 구성

먼저 <보왕삼매론>의 첫 번째 구절을 예로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보왕삼매론>은 한 항목이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는 ‘바라지 마라’고 합니다. 금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왜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고, 세 번째 문장은 ‘~를 하라’라는 명령 혹은 권유입니다.

첫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 첫 번째는 부정으로 세 번째는 긍정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중복되는 이야기를 빼고 나면 두 번째 문장이 핵심입니다. 열 개의 항목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에 입각해 각 항목의 핵심만 추려서 <보왕삼매론>의 열 가지 항목을 독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2.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3.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4.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5.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6.친구를 사귀는데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7.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8.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9.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10.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이들 항목은 ‘~하면 ~해진다’ 하는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해진다’는 항목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탐욕이 생기기 쉽고, 사치한 마음이 일어나고,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고, 서원이 굳건하지 못한다는 등의 마음입니다. 이 같은 마음은 괴로운 마음입니다. 번뇌라고 합니다.

왜 이 세계는 욕계이면서 사바세계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바세계이면서 욕계입니다. 욕계(欲界)란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란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왜 참고 견뎌야 합니까? 괴로움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란 무엇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욕망입니다. 같은 세상인데 욕계이면서 사바세계라는 것은 무언가 맞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이 <보왕삼매론>에 들어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4고(四苦) 혹은 8고(八苦) 라고 이야기합니다. 4고란 무엇입니까? 생로병사입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네 가지 고통입니다. 거기에 네 가지를 보태면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라는 괴로움 입니다. 이 여덟 가지 고통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팔고 八苦

1.생고 (生苦) 태어나는 괴로움

2.노고 (老苦) 늙어가는 괴로움 

3.병고 (病苦) 병들어 아픈 괴로움 

4.사고 (死苦) 죽는 괴로움 

5.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6.원증회고 (怨憎會苦) 원수와 만나야만 하는 괴로움

7.구부득고 (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괴로움

8.오음성고 (五陰盛苦) 오온에서의 집착에서부터 생기는 괴로움

먼저 4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태어나는 것을 고통이라고 했을까요? 갓난아이는 태어날 때 울면서 태어납니다. 왜 그렇게 악을 쓰면서 태어날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습니다.

“아, 내가 또 고통덩어리인 몸뚱이를 가지고 사바세계에 태어났구나. 내가 한 생각 깜빡 잘 못 하는 바람에!”

티벳불교에서 윤회를 이야기 할 때, 죽는 순간의 마지막 식(識)이 그 다음 생을 정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죽는 순간에 스님이 독경을 해주면 좋다는 것은 마지막 식이 불법을 들으면서 청정해지고 그로 인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다음 생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마지막 순간에 배우자가 ‘아이고 당신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라고 한다면 마지막 식이 누구를 생각합니까? 배우자 즉 이성에게 끌리면서 그 다음 생에도 또 육신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순간 ‘아차! 한발 늦었구나. 내가 그 때 한 생각 안 했으면 됐을 텐데.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냐!’ 하며 대성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은 고통입니다.

이렇듯 이 사바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왜 괴로움으로 가득 찼습니까? 이 세상이 욕계이기 때문입니다. 욕계란 내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하다보면 세상엔 고통밖에 없으니 참고 견뎌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욕계는 참고 견뎌야 하는 사바세계인 것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욕망을 잘 다스리면 중생이 아니라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중생은 욕망으로써 살아가지만 보살이나 부처님은 자비심으로써 살아갑니다. 우리는 먹어야 살고 잠을 자야 살고 자손들을 낳아야만 자손을 통해 영원히 내가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살이나 부처님은 자비심이 살아가는 이유이기에 육신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욕망대로 하면 욕계는 사바세계인 것이고, 내 욕망을 잘 다스리면 이 욕계가 바로 불국토가 됩니다. 욕망을 잘 다스리면 욕망이 자비심이 되는 것입니다.

보왕삼매론 거꾸로 보기

다시 <보왕삼매론>의 구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보왕삼매론>의 문장은 앞으로도 읽고 뒤로도 읽어야만 내용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왕삼매론>의 각 조항들은 문장을 뒤집어서 읽어도 말이 됩니다.

1. 탐욕이 생기면, 쉽게 몸에 병이 걸린다.

2.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면, 세상살이에 곤란이 일어난다.

3.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면,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

4.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면, 수행하는데 마가 생긴다.

5. 뜻이 경솔하면, 일이 어렵게 꼬인다.

6. 친구를 사귀는데 의리를 상하게 되면, 내게 이로울 것이 없다.

7.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면,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지 않는다.

8. 공덕을 베풀 때 불순한 생각이 생기면, 과보를 바라게 된다 .

9. 어리석은 마음이 있으면,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

10. 원망하는 마음을 키우면, 곤란한 일에 처하기 쉽다.

예를 들어 첫째 항목에서 ‘몸에 병에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몸에 병이 없기를 욕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문장을 뒤집어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탐욕이 생기면 몸에 병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의심이 든다면 두 번째 항목을 봅시다.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있으면 세상살이에 곤란이 생긴다’ 이것 역시 말이 됩니다.

또 다른 예로 ‘배우는 것이 넘치면 공부하는 데 장애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배워도 다 흘려버리고 남는 게 없으면 공부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원이 굳건하지 못하면 수행하는 데 마가 생긴다’는 어떻습니까? 서원이라는 것은 욕망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큰 욕망, 즉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자타가 일시에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맹세가 굳건하지 못하면, 공부를 하다가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듭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다음에 하지’ 하며 중간에 멈추어 버립니다. 이게 마장이지 다른 게 마장입니까?

<보왕삼매론>은 이렇게 앞뒤를 바꾸어도 말이 됩니다. 앞뒤를 바꾸었을 경우, 앞부분은 마음이 욕망에 이끌려 번뇌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뒷부분은 그로 인해 생기는 장애입니다. 이는 내 마음 밖에서 오는 장애와 내 마음 안에서 생기는 장애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뒤집어서 보면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중생들이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중생, 욕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

만약 중생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스스로의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이라면 우리 사바세계는 이런 모양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다스리지 못하니까 억지로라도 다스리라고 <보왕삼매론>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번 항목인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겨 근심과 혼란으로써 세상을 살게 된다’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평소 일이 술술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가보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니까 당연히 잘 풀리나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업신여기는 생각입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잘 되니까’라는 마음이 있으면 사치를 하게 됩니다. 사치를 해도 마음만 먹으면 또 잘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주변의 친구나 물건의 소중함을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잘난 체 하는 마음,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해도 이야기가 됩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오랜 친구와 물건을 소중히 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평탄할 수 없습니다. 잘난 체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과 누가 같이 일을 도모하려 하고 도와주려고 하겠습니까?

욕심이 과해지면 탐욕이 됩니다. 우리 중생들은 욕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탐욕으로 갑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말은 즉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생기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놓았으면서 장애를 탓하고 장애가 그저 소멸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장애가 생깁니다. 이를 정리하면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보왕삼매경>은 ‘~을 하지 말라’는 금기 조항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탐욕이지, 욕망이 아니다.

여러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장애가 생긴다는 말씀을 지금까지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장애라고 여기는 것들은 장애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일 것입니다. 몸에 생기는 병이나 세상살이 살아가는 데 생기는 곤란함 같은 것은 나를 가로막는 것[장애]이 아니고 그냥 어쩌다가 발생한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문제는 중생들이 바라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최대한 즐기다가 가야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인생은 짧으니까 최대한 즐기자’ 등입니다. 이런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이는 내 욕망에 내 마음의 눈이 먼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틀 속에 마음이 갇힌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욕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욕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탐욕이자 쾌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욕망은 중생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을 너무 탐하면 식탐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인연을 맺어서 자손을 만드는 것은 건강한 욕망이지만, 섹스 그 자체를 탐하면 그것은 쾌락이 됩니다. 욕망은 우리 생활의 원동력이지만 쾌락과 탐욕은 장애물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중생은 욕망으로 살아가고 보살은 자비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보살이 되면 나는 욕망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욕망을 자비심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이 대목에서 <법구경>에 나오는 13번째, 14번째 게송을 함께 독송하겠습니다.

13.

지붕을 엉성하게 이은 집에

비가 새는 것처럼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14.

촘촘하게 지붕을 잘 이은 집에

비가 새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이 게송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난다 비구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버지인 숫도다나왕의 초대로 카필라성에 머무르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인 숫도나아왕과 자신의 아내였던 야쇼다라에게 설법을 하고 수행처에 머무르던 부처님은 이튿날 당신의 이복동생인 난다의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는 곳으로 탁발을 나갑니다. 부처님은 난다에게 발우를 건넨 후 공양물을 담은 발우를 돌려받지 않고 뒤돌아 걷기 시작합니다. 난다는 차마 발우를 직접 돌려주지 못하고 그저 부처님께서 돌아보시기만을 바라면서 부처님의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끝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수행처에 당도하십니다. 수행처까지 따라간 난다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날로 삭발을 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엉겁결에 수행자가 된 난다는 돌아가겠다는 말은 못 하고, 앉아는 있는데 공부는 안 되고, 매일 신부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난다를 불러다 앉혀놓고 원숭이를 보여줍니다.

“이 원숭이가 아름다운가, 네 신부가 아름다운가?”

“제 신부가 더 아름답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난다를 데리고 천상으로 갑니다. 어지간한 인간 미녀는 발꿈치도 못 따라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예쁜 천녀들이 500명이나 있으니 난다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이 천녀가 아름다운가, 네 신부가 아름다운가?” “부처님, 제 신부는 이 천녀들에 비하면 아까 본 원숭이만도 못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십니다.

“네가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천녀들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그 때부터 아난은 치열하게 공부를 합니다. 물론 주위에서는 이런 소문이 돕니다.

“난다는 천녀를 얻으려고 수행을 한단다! 명색이 수행자가 저러면 되겠는가?”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가 도는 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난다가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난다는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수행을 하고, 이윽고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난다가 아라한이 되고 나니 이전에 본인이 생각한 것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아난이 부처님을 찾아가 말합니다.

“부처님 저는 깨달음을 얻었고 지난날의 과오를 알고 있습니다. 이전의 약속은 부디 철회해주십시오.”

부처님이 대답합니다.

“네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나는 이미 그것을 철회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 난다 비구에게 이 게송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지붕을 엉성하게 이은 집에 비가 새는 것처럼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전 난다 비구처럼 그저 앉아만 있을 뿐 신부 생각만 하고 수행을 하지도 않고 공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촘촘하게 지붕을 잘 이은 집에 비가 새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는 것은, 수행을 열심히 해서 깨달음을 얻은 난다 비구처럼 더 이상 신부나 천녀를 탐하는 탐욕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왜 하는 것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보살이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안 하면 마치 엉성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 듯이 내 삶의 원동력이 탐욕이 되고 집착이 되고 애착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수행을 하면 그 욕망은 자비심이 됩니다. 왜입니까? 수행을 열심히 하면 지붕을 촘촘하게 지은 지붕처럼 탐욕이나 분노나 회의나 나태와 같은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의 원동력이 자비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일상적인 수행, 봉사와 도덕적인 삶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수행은 절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수행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넓게 보면 생활 자체가 수행입니다. <보왕삼매론> 3번 항목을 보면 ‘공부하는 데 마음의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부라는 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공무원시험과 같은 공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뭔가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業)이라고 합니다. 업을 짓는 것이 공부입니다. 인생이 곧 공부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넓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수행이며 좋은 업을 짓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이 수행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항상 잊지 말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내 안의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봉사하는 마음은 공덕을 베풀 때 내 안의 자비심을 기른다는 생각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자원봉사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과 내 일상이 봉사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마저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두 번째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계에 나와 있습니다. 살도음망주(殺盜淫妄酒)의 다섯 가지 계율입니다.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욕망이 탐욕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욕망이 집착이나 애착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이 바로 우리 불자들의 삶이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왕삼매론>을 매일매일 읽으라는 당부를 드립니다. 다 아는 이야기라고 지나치지 마시고 매일매일 옆에 두고 읽으십시오. 알아도 읽으십시오. 자기 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하다못해 양심의 가책이라도 조금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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