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습니까?

사람들은 왜 운명을 믿는가?
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를 바꾸는 어떤 노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라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조차 미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인연설은 어떠한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연설을 숙명론이나 운명론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인연설은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여 미처 우리가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의지와 비전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연기, 의지, 정체성, 희망

용한 점쟁이의 예언

어떤 사람이 새해를 맞아 올해 신수를 보려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은 올해 여름 물에 빠져 죽을 상이니 물가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초부터 재수 없는 소리라고 한 귀로 흘려버렸는데 봄이 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점쟁이 말이 귀에 맴돌아 불안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고 삼복더위가 오니까 이 사람, 바다와 강, 계곡은 물론이거니와 방 밖으로도 안 나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방안에서 세숫대야에 코를 빠뜨린 것입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 숙명 혹은 운명결정론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든 모양입니다. 오늘은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운명; 모든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먼저 가정을 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운명이 있다, 즉 모든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내가 나의 미래를 알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아도 미래는 결정되어 있고 몰라도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에서처럼 점괘가 나쁘다고 하면 살아있는 내내 불안하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으면 시큰둥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결정된 미래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힘들게 미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내가 미래를 미리 알아서 바꾸어 버린다고 하면 그 미래는 결정된 미래일까요, 아닐까요?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최종적으로 바뀐 미래만이 결정된 미래이며, 그 이전에 나의 노력에 의해 수정된 미래는 미래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수정된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는 전제를 벗어납니다. 그래서 미래가 미래가 아니라는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결정된 미래를 가정한다면 미래를 바꾸는 어떤 노력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미 결정된 미래는 없다?

반면 결정된 미래가 없다고 가정하면 어떻습니까.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말은 곧 시간의 선후관계에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우연히 모든 일이 생긴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알 수도 없을뿐더러, 굳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노력해서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결정된 미래가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신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이 세계를 만들 때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 연관 관계가 없도록 만들었다고 칩시다. 신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들이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맞는데, 신은 ‘전지전능’, 즉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 신이 미래를 안다고 하면 신은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을 완전하게 우연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부분은 본인이 미래를 결정짓는 것으로 한다면 본인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은 전지는 하더라도 전능하지는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지 않은 것이 신일 수 있습니까? 신이 아닌 겁니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결정론에 입각해서 보면 미래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어서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도 모릅니다. 신도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결정된 미래가 있건 없건 우리는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됩니다.

불교의 인연설과 인과응보는 운명론인가?

불자라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나인 인연설과 인과응보 역시 운명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연설이 무엇입니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인이 있으면 연이 있고 업이 있으면 과보가 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론 아닙니까? 가령 A라는 사람이 나쁜 일을 했을 때 분명히 과보가 있다고 한다면 현재와 미래에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인연설도 숙명론이나 운명론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하는데 왜 불교는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운명에 대해서 불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불자들은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설은 중중무진법계라,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너무나 촘촘합니다. 어떤 원인이 있으면 결과는 일어나는데 부처님도 그것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입니까. 인연의 고리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인과 연의 고리는 분명히 있으나 이 세상은 인과 연의 서로의 연관관계가 너무나 촘촘하기 때문에 마치 많은 부분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해서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운명론과 불교의 인연설이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부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운명을 찾는 이유

운명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앞서서 쭉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운명을 찾습니다. 어떨 때 운명을 믿습니까? 나와 관련된 일이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운명으로 정해져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이 가고 나면 가을이 옵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예측했다고 해서 용한 점쟁이입니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내가 ‘내일 오후 3시 스타벅스 종로점에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카페라떼를 시킬 것이다’라고 예측했다고 칩시다. 설령 그게 맞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미래입니다. 이런 데 대해서 사람들은 운명을 찾지 않습니다.

한편 나와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통제 가능한 범위에 들어 있는 나의 미래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에 사형 스님들과 저녁을 먹을 것이다. 왜?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라는 것은 내가 통제 가능한 나의 가까운 미래입니다. 이런 것은 운명이라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통제 범위 안에 원하는 미래를 넣으려는 욕심

반면 ‘내일 내가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을 것이다’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앞의 예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여성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짝사랑하는 남자와 한마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이 여성의 희망일 뿐입니다. 이 경우, 이 여성이 희망하는 미래는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은 자신의 희망이 정말로 실현될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점쟁이를 찾아가 ‘그와 잘 될 수 있을까요? 내일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겁니다. 점쟁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죠.

이렇듯 나하고 관련된 일인데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미래를 궁금해 합니다. ‘내 딸이 시험에 떨어질까 붙을까?’, ‘군대에 있는 아들이 건강하게 있을까?’ 이것들은 나와 관련되어 있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사안입니다. 이런 경우에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어떻게든 나의 통제 범위 안에 내가 원하는 미래가 들어오게 하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한마디로 욕심이지요.

인간이 운명을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는 이유는 나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 큰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와 내가 원하는 미래가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 간극을 메우고 싶은 마음이 내가 원하는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공인된 큰스님이라던가 용한 점쟁이 등이 내가 원하는 미래를 보장해주면,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운명론적, 결정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본질은 우리의 욕망,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욕망을 의지와 비전으로 바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 욕계(欲界)입니다. 욕망이 없고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욕심이 우리 삶의 동력입니다. 다만 ‘욕심’ 그 자체와 욕심대로 했을 때의 ‘보상’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욕은 꼭 필요합니다. 종족 유지를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족 유지가 되지 않아서 인간은 멸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쾌락이라는 것은 성욕에 대한 보상입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성욕이 너무나 중요하니까 거기에 따르는 큰 보상을 만든 겁니다. 그러나 성적 쾌락에만 매달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성욕까지 터부시하고 배척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욕망은 욕계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운명에 대해서 갈구하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라는 삶의 동력 때문입니다. 다만 욕망과 욕망에 따른 보상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듯이, 욕망과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운명적 믿음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근거 없는 믿음, 운명에 대한 믿음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욕망을 의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새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할 때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시키고 자리를 잡고 싶은 것이 그 사람의 욕심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업이 술술 잘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만 믿으면서 맨날 놀러 다니기만 한다면 사업이 잘 됩니까? 성공하려면 고민하고 연구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업 성공에 대한 내 안의 욕망이 의지가 될 때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조직이나 사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에서 비전을 제시하여 내부 구성원들이 이를 공유하고 각자가 의지를 불태우면 그 조직은 비전대로 갈 가능성이 커지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경제라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남한이라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겁니다. 평화경제라는 비전을 공유하고 각 개인이 평화경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면 문재인 대통령의 비전 제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집단을 놓고 보자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운명을 믿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한여름날의 기우제

제가 송광사 선방에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그 해가 몇 년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엄청나게 가물었던 여름이 있었습니다. 하안거를 지내는 스님들끼리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마을의 면장이 절에 올라와 주지스님을 찾아뵙고는 절에서 기우제를 지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절의 입장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안 오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고, 그렇다고 면장까지 올라와서 부탁하는데 박복하게 거절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때 주지스님께서는 기우제를 지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기상청에 연락해서 주암면 일대에 비가 올 확률이 높은 날짜를 받은 후 그 날짜에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실재로 기우재를 지낸 그날, 완전히 해갈될 정도는 아니지만 기우제가 끝날 무렵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기우제 그 자체를 놓고 보면 말 그대로 도박입니다. 요즘같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입니다. 당시 주지스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조금이나마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날을 받아 행사를 치른 것입니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기만 할 뿐 아니라 실현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법을 찾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운명을 믿고 운명을 따르고 숙명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가족, 비전과 전망을 공유하는 사이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히겠습니다.지금 이 법당에 앉아계시는 많은 분들에게는 어른이 다 된 자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에 오시는 분들의 제일 큰 고민 중 하나는 자식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제가 이야기한 맥락에서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상적인 부모는 자식에게 비전과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 부모로서 같이 열심히 노력할 수는 있지만 자식의 미래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식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식을 달달 볶게 됩니다. 본인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실제로 노력하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사랑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 자식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이며 과도한 집착입니다.

오늘은 운명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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