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의 현황

불자인 우리는 불자들을 주로 만나게 되기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우리나라에서는 무교인의 비율이 56%로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많으며, 그중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점차 늘어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종교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흐름 속에서 불자인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수행, 정체성,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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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에서의 나, 세계종교에서의 불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태양계에는 태양이 있고 그 옆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등이 쭉 정렬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무게를 놓고 보면 태양계 무게의 99.98%는 태양이고 나머지 0.02%가 나머지 행성과 소행성의 무게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태양계는 그냥 태양입니다. 태양의 중력으로 인해 자잘한 행성들이 모여 있는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지구이며 그 지구 중에서도 여기 이곳에 우리가 모여 있는 겁니다. 이렇게 태양계에서 실제 자신의 위치를 놓고 보면 정말 보잘 것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불자이고 주변에서도 불자들만 주로 만나게 되므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 지구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은 이런 궁금증을 바탕으로 우리가 현재 불자로서 위치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상의 인간을 100명으로 축소해서 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이 16명이고 84명은 종교가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10명 중 9명은 종교가 있는 겁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인간은 참 종교적인 동물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나라와 달리 유(有)교보다 무(無)교인 한국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가 없는 사람의 비율이 2015년을 기준으로 56%를 차지합니다. 전세계적인 통계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4배 이상의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 남한이라는 사회이고 이 사회에 유독 종교가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비율로 무신론자가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중국입니다. 중국 인구가 14억 정도라고 하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종교가 없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의 비율 또한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를 10명으로 놓고 보면 6명은 종교가 없고 3명은 기독교이고 1명은 불교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16%이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28%입니다.

왜 중국과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에 비해서 무교가 많을까요? 불교가 역사적으로 사회와 완벽하게 일치되지 못한 채 통치권자의 국론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역할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가의 필요로 도입된 불교…사회와 완전히 일치되지 않아

불교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50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중국이나 한국은 유교라는 통치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통치시스템이 있는 가운데 단지 전 국민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시킬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던 때에 마침 들어온 것이 인도에서 넘어온 선진적인 종교인 불교였던 것입니다. 국론통일을 위해 불교를 가져왔기 때문에 불교가 어떤 때는 국가적으로 융성하기도 했고,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왕권을 침해할 정도가 되면 탄압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불교가 정치나 경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경우에는 해방이라는 상황, 중국의 경우에는 서구 세력이 들어오면서 기존에 있던 토착 사상들이 혼돈에 빠지고, 그 과정에 서양의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힘이 약해집니다. 더구나 중국은 20세기 중반에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나면서 종교가 근 50년 이상 금지되었으니 더더욱 불교의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요.

다시 말해 우리나라나 중국의 불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사회와 완전히 일치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불교의 힘이 약화되고, 그 자리에 기독교 혹은 무교의 사람들이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종교 순위와 변화 추이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85%의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데 이들이 믿는 종교의 분포는 기독교 30%, 이슬람교 23%, 무신론자 16%, 힌두교 15%, 불교 7%, 토착종교 5% 순입니다. 순서로 따지면 불교가 5위이며 비중 또한 높지 않습니다.

종교학자들이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인 2050년 경 종교의 비율을 예측했습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30.4%로 1위입니다. 2위는 여전히 이슬람이지만 기존의 23%에서 7% 가까이 증가한 30%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원래 무신론자가 차지하고 있던 3위는 힌두교가 차지합니다. 불교는 7%에서 더 줄어들어 5%가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기독교는 비슷한 숫자를 유지하지만 무신론자들을 흡수한 이슬람과 힌두교는 일부 늘어나고 불교는 오히려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종교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정설입니다. 왜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비율은 늘어나고 불교는 줄어들까요? 제일 큰 이유는 인구 증가율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가 가장 많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장소는 의외로 아프리카입니다. 사하라사막이나 르완다, 수단 등 우리가 잘 들어보지 못한 아프리카 대륙에 기독교와 이슬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이 지역의 여성 한 명당 출산율은 3.1명입니다. 우리나라 평균인 0.9명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종교 자체의 특성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슬람교의 특징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윤리, 도덕 등 모든 가치기준이 종교와 일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정일치 체제입니다. 이슬람교도는 하루 5번 기도를 해야 하고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은 히잡을 써야 하고 남녀는 생활을 완전히 분리해야 하는 등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지만 다 지킵니다. 이슬람 사회에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무조건 이슬람교가 됩니다. 아프리카 이남지역 즉 우리가 제3세계이라고 말하는 개발도상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면 대부분이 기독교 아니면 이슬람교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 낳지 않는 기독교, 아이 많이 낳는 이슬람교

무신론자는 왜 줄어드는 것일까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출산율이 낮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고령화된 사회일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무신론자들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아서 인구가 정체되는데 이슬람의 경우는 오히려 늘어납니다. 지금 미국을 지배하는 종교는 유대교라고 합니다만 이민자의 나라이기에 점차 이슬람교가 많아지고 있으며 10~20년 후 미국의 제2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지금도 인간들은 지극히 종교적이지만 앞으로 30년 뒤에는 더 종교적으로 변할 것이 자명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별로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 기독교의 중심은 미국나 유럽 등의 서구였지만 이들 지역의 기독교 비중은 떨어지는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아프리카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니까 기독교에서는 아프리카에 집중적으로 선교사업을 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1위 자리를 계속 유지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변수입니다. 14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의 절반이 무교인데, 그 절반 중 2~3억 명만 기독교로 개종하더라도 세계 종교의 판세가 달라질 겁니다.

기독교의 볼모지 개척, 이슬람/힌도교의 인구 증가

힌두교는 인도에서만 3천 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는 종교입니다. 카스트제도를 대표로 한 인도사회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절대다수가 믿는 이면에 다른 사회로는 전파가 되지 않습니다. 힌두교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카스트제도가 같이 가야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나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인도 인구가 늘어나는 한 힌두교 인구 역시 늘어날 것이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힌두교는 세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과거 불교국가 쪽으로 분류됐던 나라들을 보면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두바이 등 전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슬람이며 한 번 이슬람은 영원한 이슬람입니다. 힌두교처럼 이슬람교 역시 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무신론자나 무교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슬람교가 전파될 때는 사회가 통째로 옮겨가야 합니다. 정치경제 시스템은 그대로 있고 종교만 이슬람인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정복전쟁을 했습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들었습니다. 일단 칼을 들고 정복한 후에 알라신을 믿으면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으로 종교를 믿도록 만든 다음 사회 자체를 이슬람사회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후 상당 기간 동유럽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종교 갈등을 겪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쪽에서는 이슬람교가 인도대륙에 온 후에 힌두교와 엄청난 종교 전쟁을 벌입니다. 두 종교 모두 사회와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 끝에 이슬람이 졌기 때문에 인도 동쪽으로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않았고 그 대신 아래쪽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쪽으로 내려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도가 감소하는 이유

그렇다면 불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 한국, 일본, 태국, 미얀마 등 아시아의 불교국가들은 20세기 후반 들어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출산율이 낮아져서 종교 인구가 감소합니다. 우리나라는 불교 인구가 감소할 뿐 아니라 기독교가 불교에 비해 월등하게 많습니다. 실제로 교회와 절의 숫자를 비교하면 수도권의 경우 10:1, 경상도 쪽의 도심은 2:1 시골은 1:1, 광주는 9:1 정도 비율로 나타납니다. 전라도 지역은 20:1입니다. 예를 들면 화순군에 교회가 20개면 절이 1개라는 말입니다.

다음은 결속력입니다. 이슬람교나 힌두교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종교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취직을 하고 이사를 하는 등의 모든 일상 대소사를 종교의 틀 안에서 합니다. 기독교도 일상과 종교가 분리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도들의 결속력이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 종교가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차이냐 하면 기독교는 2015년 기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는 신도의 비율이 85%입니다. 10명 중 8명은 일주일에 한 번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가는 겁니다. 불교는 그 비율이 6%입니다. 이 비율이 과연 맞는 것인지를 증심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증심사에 최소한 1년에 한 번 등을 올리거나 기도를 접수하는 세대가 약 2,200세대 정도 됩니다. 각 세대마다 1명으로 신도수를 가정하면 대략 2200명이 나옵니다. 이 신도의 6%는 130명 가량됩니다. 그러나 한 달에 한번 하는 초사흘 법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많아야 100내외입니다. 다른 법회는 50명을 밑돌고 있습니다.

이 시대 불자의 태도

수치상으로 봐도 기독교와 비교하면 불교의 결속력은 상당히 떨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도 ‘오늘부터 기독교처럼 신도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상부상조하자!’고 하면 그렇게 될까요? 우리는 사실은 누가 신도인지도 모릅니다. 법회 때 얼굴이 보이는 사람들을 빼고 나면 누가 증심사 신도인지조차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맞게 우리의 신행활동을 꾸려가야 합니다.

신행생활이라고 할 때 굳이 절에 나와서 법회하고 기도하라고 정해놓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 할 수 있으면 집에서 하면 됩니다. 내 스스로 내가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내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서 신행생활의 기준을 정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하루 한 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다던가, 어딘가를 향해서 삼배를 한다던가, 이정도의 소속감만 가지고 있어도 엄청난 발전일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불교의 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나라의 불자라고 하는 사람과 이 전 지구를 통틀어 불교를 믿는 사람은 소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수인 와중에 결속력도 강하지 않다는 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불자다’라는 양심에 비추어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집에서, 직장에서, 절에서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불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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