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가 우는 이유, 고딩이 화내는 이유
머리가 아프면 아스피린을 먹고, 소화가 안 되면 정로환을 먹듯이, 불교에는 화가 나면 화를 없애 주는 특효약이 있습니다.
갓난아기로 돌아가 봅시다. 갓난아기는 배가 고파서 울 수도 있고, 졸려서 울 수도 있고, 기저귀가 축축해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갓난아기가, ‘지금 배가 고파서 죽을 거 같은데 엄마가 밥을 챙겨 줘야지. 태어난 지 열흘 밖에 안 된 내가 어떻게 챙기냐고! 열 받네’ 이러면서 막 울까요?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울까요? 그냥, 지금 상태가 자기한테 생명의 위협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행동의 근본에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 본능이 우리들을 움직입니다. 거기서 에너지가 나옵니다. 우리가 ‘에너지를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겁니다. 인간만 그러는 게 아니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은 살기 위해서 힘써 노력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살아 있으니까 살고 싶은 겁니다. 신생아는 화가 나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살고 싶은 본능이 그 아이 안에 있는 에너지를 끌어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 고등학생이 됐습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야 되는데 늦잠을 잤습니다. 잠이 깨는 순간, ‘오늘 지각이네.’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밥 먹고 가라는 엄마를 보니까 괜히 화가 납니다. “왜 안 깨웠어!” 하며 엄마에게 짜증을 냅니다. 엄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화가 바깥을 향하는 이유
이 고등학생은 왜 화를 낼까요? 이 나이에는 사회생활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지각을 하면 책임감이 없고 게으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그렇게 되면 뒤쳐진 인생이 되는 겁니다. 생존에 이롭지 않은 조건이 생기는 셈입니다. 신생아가 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같은 점은 둘 다 하나의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모두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힘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건 뭘까요? 일단 화가 확 나면 그 에너지가 어딘가로 분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의 경우, “어제 밤늦도록 게임을 해서 늦잠을 잤구나.”라고 이유를 따져서 자기 자신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 눈 앞에 제일 만만한 상대에게 에너지를 쏟아냈습니다.
‘주변 상황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는구나’ 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뜻대로 안 되게 돼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산다면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설령 나 혼자 산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내가 아무리 여름에 눈이 보고 싶다고 원하고 원해도 눈은 겨울에 내리는 겁니다. 나 혼자 살아도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여럿이 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가슴 깊이 새겨도 모자란데 우리 중생들의 가장 큰 소원은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화가 날 소지가 항상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상일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난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발생시킵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잘못된 생각이 그 에너지를 엉뚱한 데로 돌리고 있는 겁니다. 화도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화가 나면 나도 힘들고 남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이 다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 화가 나면 안 좋구나. 화를 내면 안 되겠구나. 화를 안 내도록 노력해야 되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화, 끌려갈 것인가 다스릴 것인가?
화를 없애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내 뜻대로 하지 않더라도 억지로 끌고 가는 겁니다. 힘이나 돈이나 아니면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돈과 권력을 거머쥔 독재자조차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내 스스로가 내 뜻을 포기하면 됩니다. 화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화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그 에너지를 없애려고 하면, 사람이 무력해집니다. 없을 무(無), 힘 력(力). 즉 무기력해집니다. 우울증은 매사에 의지가 없는 겁니다. 밥도 먹기 싫고, 밖에 나가기도 싫고, 청소하기도 싫고, 머리 감기도 싫습니다. 나중에는 숨 쉬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살합니다. 화는 포기한다고 제거되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올라오는 하나의 힘입니다.
세 번째로 화가 나면 ‘화를 내지 말자.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해서 화를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화를 내지 말자’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더 납니다. 왜 그럴까요? 자, 지금 화가 납니다. 그러면 ‘아, 지금 내가 화를 내는구나. 화를 내면 안 되는데… 화를 내지 말자.’라는 새로운 희망사항을 만듭니다.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는데 또 화를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거지요.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겁니다. ‘화를 내지 말자.’라고 스스로 강제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키우는 겁니다.
화를 제거하는 방법: 보면 사라진다
그러면 화를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누가 나한테 심한 말을 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좋아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마음이 아픈 이런 정신적인 고통은 처음의 느낌이 내 안에서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는 대략 75분의 1초라고 합니다. 아주 아주 짧은 순간입니다. 한 찰나에, ‘저 사람 보기 싫어!’라는 생각이 반짝 하고 들었다가, 또 그 다음 찰나에 ‘저 사람 보기 싫어!’ 그 다음 찰나에 또… 이렇게 계속 이어져서 쌓이는 겁니다. 이렇게 쌓여서 일상적으로 느낄 정도의 고통이 되는 겁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라는 감정이 내 안에 쌓이니까 나한테 고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법은 간단합니다. 쌓이지 않게 하면 됩니다. 아무리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상황의 출발은 아주 미미한 짜증에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처음 출발하는 이 느낌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화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내가 화가 났구나’ 라고 알게 됩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면 찰나의 순간에 생겼다 사라지는 생각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됩니다. 10분 정도 기도하는 사이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면 그 10분 동안 오로지 한 생각만 합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얼마나 마음에 큰 타격을 주겠습니까?
불교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면 사라진다.” 내 감정을 내가 알아차려서 보면 그 감정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감정이 여기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한 찰나에 하나의 생각이 한 번 생겼다가 사라지고 그 다음 찰나에는 생기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찰나에는 직전 찰나의 생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찰나에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생각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최소의 순간이 찰나이기 때문입니다. 화나 슬픔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화를 치료하는 특효약: 마음 관찰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대개 마음의 여유가 없고, 뭔가 내가 의도한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화가 나기 십상입니다.
마음을 바라보려면 평소에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내가 나한테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화를 없애는 특효약입니다. 이 빈자리를 만들려면 평소에 꾸준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평소에 내 여건에 맞게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훈련을 하면 화를 내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강도도 약해집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감정의 작고 미묘한 변화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화를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