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을 유지하는 법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회의 여러 이슈가 발생하고, 이에 마음이 일희일비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유일한 방법은 수행하는 것이다. 업에 의한 행동하는 유혹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하며, 수행의 첫 단계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희일비 할 때는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관찰하고, 괴로움이 있을 때는 괴로워하는 마음을 정확하게 관찰하자. 관찰로 시작해 깊어진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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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과 일희일비

어제 우리나라의 국가적 운명을 가르는 총선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보면 당장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 것 같이 이야기하는데 막상 오늘의 우리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코앞에서는 엄청난 변화와 폭풍이 일어난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미동도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속세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모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법은 마음법(心法)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해여 하는가를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언제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노예제에서 민주주의로 바뀌고,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나라가 뒤집히고, IMF가 옵니다. 사람의 일에는 언제나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가 우리가 평생 해야 할 공부입니다.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어나는 세상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난 초하루법회에서 불교에서 재화를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법문했습니다. 용수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저축하는 것이니 있는 족족 보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반박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인데 왜 부처님은 금욕하라고 하고 청빈하게 살라고 합니까?” 용수스님이 답합니다. “돈을 벌되 선한 계를 어기지 않고 선업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악업으로 번 돈은 천만금을 보시하더라도 그 보시에 가치가 없다.”

보시의 동기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선하게 번 돈을 선하게 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다시 토를 달았습니다. “계를 지키면서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그 돈으로 중생들을 위해 보시한다면, 돈을 버는 행위 그리고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용수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돈에 대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돈의 양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은 인간이 가진 가장 비참한 질병으로, 가난하면 도를 이루지 못합니다. 배가 고프면 굶주림을 면하는 것이 먼저이지 수행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돈에 눈이 멀기 십상입니다. 돈의 양극단에 빠지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돈에 대해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말씀은 좋은 말씀이지만,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천이 안 되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돈이 없으면 아쉽고 돈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업이 행을 만든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불현듯 ‘아! 내가 살이 많이 쪘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살을 빼기 위해 헬스장에 다니고 개인 트레이닝도 받는데 살이 안 빠지는 겁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평소에 가진 식습관과 행동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가 잘 때 몰래 살찌게 하는 주사를 놓아서 살이 찐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살찌게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 겁니다. 

불교에서의 행동[업業]은 몸과 말, 생각을 포함한 신구의 삼업을 의미합니다. 내가 왜 살이 쪘는가? 내가 살찌는 업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살을 빼는 방법은 실은 간단합니다. 나의 행, 나의 업을 바꾸면 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살찌지 않는 방향으로 바꾸면 살이 빠집니다. 아주 간단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변하지 않고 다른 요행을 바랍니다. 약을 먹기도 하고 의료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방식으로요. 

돈 문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처님께서 재화에 대해 평상심을 유지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평소 돈에 대해 평상심을 갖지 못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돈이 좀 생기면 더 많이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자체가 우리를 유혹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돈에 대한 욕망을 불려갑니다. 이런 욕망에 따라 살면 돈이 없을 때는 없어서 힘들고 돈이 많을 때는 더 많이 가지고 싶어서 아둥바둥하게 됩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재화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답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막대한 재화를 획득하고서도 거기에 취하지 않고 방일하지 않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고 중생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적습니다. 막대한 재화를 획득하고 거기에 취해서 방일하고 욕망에 빠지고 중생들에게 죄를 짓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 후에 게송으로써 말씀하시기를,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 물들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홀려서 

마음을 빼앗겨 사람들은 과오를 깨닫지 못하네.

사슴이 쳐진 그물을 모르듯

과오는 나중에 쓴맛이 된다네.

결과가 악하기 때문이라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깨달음의 고리

우리는 그물이 쳐 있는 줄 모르고 그물을 향해 달려가는 사슴과도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물이 보이는데 당사자는 정신이 팔려서 내 앞에 쳐 있는 그물을 보지 못하고 질주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마음속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갠지스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호미와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 ‘우리는 이 갠지스강이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임하게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많은 사람들이 갠지스강을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임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제자들이 답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갠지스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임하는데 단지 많은 사람들은 단지 많은 사람을 피곤하고 혹하게 할 뿐, 서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임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익히면 그에게 왕이나 용의 신하나 친지나 친척이 재물을 가지고 와서 ‘어찌 이런 가사가 그대를 괴롭힌단 말인가? 왜 삭발하고 발우를 들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세속의 생활로 돌아가서 재물을 즐기고 공덕을 쌓자’라고 수행자를 유혹한다고 치자. 그래도 수행들들이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익히면 그가 배움을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마음이 오랜 세월 동안 멀리 떠남으로 향하고 멀리 떠남으로 기울고 멀리 떠남으로 임하면 실로 세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속의 사람들이 아무리 재물로써의 보시를 들어 수행자를 유혹하려 해도 깨달음의 일곱가지 고리를 익힌 수행자는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갠지스강을 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흐르게 하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수행하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의 수행승은 탐욕을 제어하고 성냄을 제어하고 어리석음을 제어하고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임하는 이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는다. 이와 같이 수행승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깨달음의 고리를 익힌다.”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곱가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더 간단하게 줄이면 “수행을 하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이야기에도 다만 수행하라고 할 뿐, 무언가 다른 요행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약을 7일 동안 먹으면 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조건 수행을 하라고 합니다. 

의지가 굳어져 마치 갠지스강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갠지스강을 서쪽으로 흐르게 바꾸려 해도 안 되는 것처럼, 수행의 길에 들어서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수행자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수행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수행을 해야 재물이나 아름다운 이성, 명예와 권력 같은 것들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다스릴 수 있을까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첫 번재부터 일곱 번째까지 단계를 밟아서 진행되며, 제일 마지막 단계의 수행을 했을 때 온갖 유혹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한문으로는 칠각지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재물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넓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유위법 중 하나입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넓게 해석하자면 유위법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평온함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수행을 왜 하는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로부터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번뇌의 소멸은 하늘에 뚝 떨어지는 행운도 아니고, 용한 약물을 복용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이 수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습니다. 

관찰에서 수행이 시작된다

근사한 이성이 내 앞에 있어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누군가 나에게 천 억 원을 주면서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이 다 쓰시오.’ 해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칠각지를 이루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일곱단계의 수행 중에서 첫 단추를 끼는 가장 첫 단계를 알아보겠습니다. 

칠각지의 처음 단계는 염각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75가지, 82가지, 100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슬프다, 괴롭다, 질투난다, 화가 난다, 짜증난다는 등의 마음의 종류를 아주 세밀하게 나눠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감정의 덩어리 가지고는 나 자신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75가지 각각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고, 두 번재는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관찰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각지가 출발할 수 있습니다. 각지의 출발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을 “화난다.”고 단순하게 표현하면 안 됩니다. 경전에 명시된 표현으로써의 분노인가, 해태심인가, 슬픔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수행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수행은 집중력으로 발전하고, 환희심, 고요함으로 발전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고요해지면 비로소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춰집니다. 이때의 상태가 바로 해인삼매입니다. 바다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내 마음이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그 위에 무엇을 비춰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일희일비를 관찰하는 수행

이 정도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 더이상 욕망이나 어리석음, 분노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탐진치 삼독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게 유지되는 지혜의 출발은 내 마음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항상 내 마음을 관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 있었던 총선에서 누가 당선되고 누가 낙선했냐에 일희일비하는 것보다 그런 결과들을 보면서 내 안에서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적 관점입니다. 

돈, 권력, 명예에 모두 대입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내 자식에 대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적으로 어느 어버이가 자식을 앞에 놓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자식을 보지 않고 내 마음을 봐야 합니다. 자식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분노나 집착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관찰하는 데에서부터 수행이 시작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

가장 서두에 ‘비만한 나’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나’는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닌 한 한 달 전, 1년 전, 십 수 년에 걸쳐 잘못된 식습관과 행동을 해온 나의 업의 결과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나의 행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행을 바꾸는 첫 단추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힘이 약하면 머리로만 생각하고 말만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매 순간순간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을 같이 산 가족을 보면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그 사람을 관찰하다 보니 그의 말투, 행동, 그에게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대응이 나온다는 것이 예측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렇게 똑같은 사고 패턴과 행동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구나.’ 하고요.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것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눈에는 안 보여요.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관찰하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의 출발은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것임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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