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잘났다고 망녕되이 뽐내지 말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인을 닦고 인을 얻음은 겸양이 근본이요.
벗을 사귀고 어울리는 일에는 공경과 신의가 으뜸이니라.
사상산이 높아지면 삼악도의 바다는 더욱 깊어지리니,
겉으로 나타내는 위의는 존귀한듯 하더라도
안으로 참된 수행이 없다면 썩은 배와 같으니라.
벼슬이 높을수록 마음을 낮게 가지고, 도가 높을수록 뜻을 더욱 낮게 하라.
너와 나의 분별이 무너지는 곳에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언제나 마음을 겸손히 하면 만복이 저절로 돌아오느니라.
송하여 이르되
잘났다고 교만하여 지혜는 묻혀 지고 너와 나 분별 속에 무명만 자라는구나.
저 잘난 체 안 배우고 덧없이 늙은 뒤엔 병들어 신음하여 한탄만이 있으리라.
본능적인 욕망의 뿌리는 ‘생존’
지금까지는 본능적인 욕망을 잘 다스리라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여섯 번째 구절부터는 잘난 체 하지 말라, 뽐내지 말라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여태까지 해온 본능적인 욕구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만, 잘 생각해봅시다.
먹고, 자고, 성행위를 하고, 물욕을 일으키는 본능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생존과 번식입니다. 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왜 잡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왜 성행위를 합니까?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왜 물욕을 일으킵니까? 더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모든 욕망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단어로 귀결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생존입니다. 종족 번식을 하는 것도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나의 복제본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고 생존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본능은 생존이라는 키워드 하나에 이릅니다.
누가 생존합니까? 나입니다. 본능은 나를 위해서 움직입니다. 내가 모르는,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 본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나’입니까? 아마 어린아이들조차도 직관적으로 이 몸뚱이를 가리킬 것입니다.
생존 욕망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아상이 자란다
본능적으로 살면 남을 업신여기고 내가 잘났다고 으스대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더 잘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본능이라는 생존 욕망을 자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잘난체하는 인간, 아상이 높은 인간, 남을 무시하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흔히 ‘졸부’라고 할 때, 그 단어 안에는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을 비꼬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변사람들을 무시하고 천대하더라는 것이지요.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서 뽐내는 것은 본능이 확장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경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즘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육아 강좌를 보면 자식의 인정욕구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존감이 높은 아이, 자신감이 있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혼자만 생각할 때는 확신할 수 없으니 주변에서 인정해줘야 합니다.
아상, ‘나 잘났다’ 말해달라는 인정욕구
아상에는 인정욕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습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공간입니다. 특히나 어르신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이상하고 불쾌하게 느낍니다.
기실 이 어르신들은 참으로 험난한 인생사를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전쟁에 징집당하기도 했을 것이고, 다른 나라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을 겁니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를 일궈온 분들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나니 어디에 가도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억눌린 인정욕구가 지하철이나 길거리, 시위 현장에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아무도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뿌리에는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남을 업신여기고 내가 잘났다고 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문명은 현대화, 인간은 원시 그대로
화가 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에서 화가 납니다. 누구 한 명이 잘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많아야 몇 십 명이 함께 살면서 채집으로 연명했습니다. 곰이라도 마주치면 몸이 먼저 흥분하고 긴장하여 싸움태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8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몸처럼 얽히고설켜 살고 있습니다. 문명화된 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원시적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왈칵 화부터 납니다. 본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계된 것입니다.
만약 인류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구상에 살아남는다면, 화내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원시적인 본능은 많이 사라지고 공감하는 능력,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유전적으로 발달하여 진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2500년 전 부처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원시 그대로 살지 말고 문명화된 사회에 맞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고통에서의 영원한 해방입니다. 고통은 ‘내가 있다’는 헛된 생각에서 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정혜 삼학을 닦고 내 안의 원시적 모습을 다스려서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라는 수행의 길을 제시한 것이지요.
누군가 남을 업신여긴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 저 사람은 아직 원시인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라고요. 어진 마음은 남에게 공감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겸손한 마음,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나옵니다.
아상이 클수록 삼악도에 갈 확률도 커진다
이어서 사상산이 높아지면 삼악도의 바다는 더욱 깊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사상산(四相山)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크면 클수록 죽은 후에 삼악도에 떨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어떤 사람의 모습이 겉으로 보기에 능력 있고 잘나보이고 폼나보여도 수행이 없다면 썩은 배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잘 다스려서 서로 공감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회화된 세상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고 할 때, 100명 모두 본인이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80%는 ‘나는 원래 잘났지만 여러 사회의 기준으로 남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지요. 80명이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머지 20명의 ‘나 잘났다’는 생각은 더 커집니다.
벼슬이 높을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잘난 체 하기 쉽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도가 높을수록 뜻을 더욱 낮게 해야 한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수행이 깊어졌을 때 맞닥뜨리는 가장 큰 마장은 아상(我相)입니다.
‘내가 도를 이루겠다’, ‘나의 도력으로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아상을 낸 순간 도로아미타불입니다. 그러한 뜻일랑은 아예 세우지 말고 오로지 공감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자경문에서는 경책합니다.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분별을 버려야
‘내가 중생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너와 나라는 분별을 아직 버리지 못한 데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분별이 무너져야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마음을 겸손히 하면 만복이 저절로 돌아옵니다. 불교에서의 복은 재화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은 업에 따르는 과보가 바로 복입니다. 선업을 지으면 만복이 되어서 돌아오고 악업을 지으면 재앙이 돌아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선업을 지으라는 이야기지요.
수행에서도 나 잘났다는 마음, 수행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내면 그나마 지은 지혜는 묻히고 너와 나라는 분별 속에서 남보다 뛰어나다는 생각만 자라납니다.
비참한 노년을 피해가는 방법
젊었을 때는 열정도 있고 욕망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열정은 사라집니다. 기본적인 욕망이 쇠퇴해가는 가운데 인정받고 싶은 마음만 성성합니다. 좋은 말로는 명예욕이랄 수 있고 나쁜 말로는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는 인정욕구라 할 것입니다.
잘난 체 하며 배우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몸이 병들고 나면 마음에 추잡한 욕망만 남습니다. 말년에 인생을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인 셈입니다.
아상이라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은 생존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고, 생존에 충실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아상이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을 명심하고 항상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상에 빠지는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