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허상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떠올리는 그 사건은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 그대로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나 자신이 만들어서 고정해 놓은 생각이다.
시간에는 실체가 없다. 눈으로 보고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을 수 없다. 실체가 없지만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은 실제 눈 앞에 있는 연기실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마음을 고정하여 머물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고정하는 순간 애착과 집착이라는 번뇌가 발생한다. 고정 없이 있는 그대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과 느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알아차림이 있을 때 허망하고 허망한 시간의 함정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과거, 마음, 미래, 생각, 시간, 현재

과거에 만들어진 정형화된 생각

템플스테이 참가자들과 차담을 하면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게 “스님은 출가를 왜 했나요?” 입니다. 참가자들에게 주로 들려주는 이유가 몇가지 있습니다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 대답들은 실제 출가를 할 당시의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한 후에 머릿속으로 정리한 생각들이더군요. 엄밀하게 말하면 도대체 나는 내가 왜 출가를 했는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출가를 하던 시점의 상황이나 마음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고, 그 이후에 머릿속에 정리한 생각들을 ‘나의 출가의 이유’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힘든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누구나 꽃길만 걷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나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괴롭고 힘들고 슬펐던 감정이나 느낌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몇 번 되새김질을 하다 보니 스스로 ‘그래. 그때의 나는 이러이러했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게 되고, 그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과거의 언젠가에 만들어진 정형화된 생각을 바탕으로 과거의 판단이나 결정을 후회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마음에 두고 애착하고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한다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어느 시점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에요. 

최근에 저에게 환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고 동글동글한 것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왠지 섬뜩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같은 공포심을 느끼는 증후군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일부 사람들만 유난히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타고 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현상도 따지고 보면 과거의어떤 시점에 마음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셈이지요.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국에 혜능스님이 계실 당시에 덕산스님이라는 스님이 살았습니다. 이 스님은 나름대로 평생 금강경공부를 한 사람이라서 금강경에 대해서는 자기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남쪽에 혜능이라는 스님이 금강경에통하여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더라는 소문을 듣고 혜능스님을 만나러 나섭니다. 

덕산스님은 몇 달을 부지런히 걸어 마침내 혜능스님이 계신 조계산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고파 길에서 떡을 파는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떡이 파는 떡이요?” 노파가 답했습니다.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 불가득이요 미래심 불가득이라 하였는데 당신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 혜능스님이 계신 동네는 수준이 이 정도인 겁니다. 떡을 사러 왔는데 노파가 금강경을 읊으니 덕산스님이 대답을 못하고우물쭈물 했다고 합니다. 

노파가 왜 이런 반문을 했는가? 예전에는 먹고살기가 어려워 세 끼를 다 먹지 못했습니다. 보통 아침과 저녁만 먹고 점심은 마음에 점을찍는 정도로만, 허기를 면하는 정도로만 요기를 했지요. 그러니 노파가 물은 것은 지금 당신이 먹을 것이 아침인지, 점심인지, 저녁인지를묻는 것이지요. 

시간은 실체가 없다

노파의 질문은 두 가지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간이 흐른다’는 말을 씁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간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코로 냄새 맡거나 혀로 맛볼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시간이 당연하게 흐른다고 말합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할 때, 시간이 여기에 있다가 저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것을 보고,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세상 만물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할 뿐이지요. 

시간 자체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도 같습니다. 마음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없는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나 마음이나 실체가 없지만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일체는 실제 눈 앞에 연기실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시간이나 마음이나 일체는 결국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과거라는 시간도 실재하는 게 아니고 이 마음도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것을 잡고 만지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얻고자 하면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대상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겁니다. 현재를 두고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이야.”라고 말한다 한들,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됩니다. 만약 현재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고정하지 말고 머문  없이 머물라

화염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불망치 과거법 하고 욕불탐착 미래사 하야 불어현재 유소주하면 요달삼세 실공적이라.” 마음이과거에 대한 것들을 망령되이 취하지 않고, 미래의 일도 집착하거나 탐내지 않고, 현재에 머무는 바 없다면 삼세가 실로 공적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대상으로 삼아서 과거 어느 시점에 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겁니다. 이 생각이 고증되면 자연스럽게 그 생각에 집착하고 애착합니다. 집착과 애착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지요. 번뇌와 고통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우리집 어른들은 다들 고혈압으로 쓰려져서 갈 때도 참 힘들게 가셨는데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 놓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합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머무는 바 없이 머문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시계를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시계가 하나 있는데, 시계를 보는 순간 ‘이 시계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아니네.’ 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출발점은 ‘이것은 시계’라고 생각을 고정하는 시점입니다. 고정한 생각 위에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쌓여갑니다. 

고정된 생각은 고정된 관념입니다. 내가 만든 선입견입니다. 또는 편견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는 것의 대부분이 이러한 고정된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입견과 편견들에 집착해서 번뇌에 시달립니다. 기쁨과 슬픔 분노 우울과 같은 감정들이 발생합니다. 

자식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대여섯 살 무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귀여운 모습을 내 자식이라고 고정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의 자식은 이미 클 대로 다 큰, 이미 내 덩치보다도 커지고 말도 안 듣는 녀석인데, 내 머릿속의 ‘자식’은 어릴 적 귀여운 그 아이입니다. 그 모습에 집착하고 있으니 현재의 변화한 자식의 모습을 마주하면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겁니다. 

고정하면 애착이 생긴다

마음이나 생각, 혹은 시간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여기면 자동적으로 거기에 대한 애착심이 발동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대상들을 취해서 가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어느 순간 고정된 생각, 고정된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내 안에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순간순간들의 느낌을 그냥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시간에 대한 애착과 집착, 마음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눈이 많이 온 겨울 아침에 눈 쌓여 깨끗한 마당을 바라보면서 ‘내가 왜 출가했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기억도 안 나는과거의 일을 떠올리려고 안달복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 그대로 두고, 지금 이 순간 순백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지금 이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내가 왜 출가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른 자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지금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일들을, 또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것들을 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겠습니다. 시간은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각자 고심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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