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⑨ | 멸성제 – 해탈 (解脫)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한 것이고 집착 없음이고 해탈이다.
해탈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사문]들이 두루 사용했던 개념이나, 해탈에 대한 정의는 당시 사문들과 부처님의 그것이 확연히 다르다. 당시 사문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나인 ‘아트만’을 상정했고, 아트만이 돌아갈 곳인 세상의 근원 ‘브라흐만’을 상정했다. 사문들에게 ‘해탈’이란 아트만이 카르만의 조종으로 윤회를 거듭하지 않고 본래 근원인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되, 다만 세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무시무종으로 이어지며 윤회한다고 전제했다. 멸성제는 부처님의 고유한 깨달음으로써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설명이며, 괴로움이 소멸할 때 해탈 즉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남은 절로 획득되는 것이다.

#멸성제, 바라문, 범아일여, 브라흐만, 사문, 사성제, 아트만, 윤회, 인도사상, 해탈, 힌두교

해탈과 열반

초전법륜경에 멸성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가 남김없이 떠나 소멸함, 버림, 포기, 해탈, 집착 없음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이고 괴로움의 소멸은 갈애의 소멸이고 갈애의 소멸은 집착의 소멸이고 집착의 소멸은 해탈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라는 말도 쓰지만 열반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해탈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당시 인대의 수행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던 수행의 목표였습니다. 부처님도 당연히 해탈을 추구했는데요. 부처님이 깨달은 해탈은 기존의 다른 수행자들이 생각하거나 느낀 경지와달랐습니다. 해탈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부처님이 정의하는 해탈과 다른 수행자들이 정의하는 해탈이 달랐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은 해탈을 ‘열반’이라는 고유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과연 해탈과 열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당시 인도의 사문들이 공통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해탈은 범아일여(梵我一如)입니다. ‘범’은인도인들이 생각했던 창조주 브라흐만을 뜻하고 ‘아’는 내 안의 진정한 나로 상정한 아트만을 뜻합니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일여’ 하나가되는 것이 해탈이라고 2,500년 전 인도의 수행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당시 수행자들은 어떻게 하면 윤회의 끊임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범아일여가 그 방법이었습니다. 우주의 궁극적인근원인 브라흐만과 개인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아트만이 결국 같은 것임을 깨달으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부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부처님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해탈]이 범아일여가 아닌 갈애의 소멸, 즉 집착 없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아트만생명을 가지게 하는 존재

부처님 당시 인도의 수행자들의 가지고 있던 윤회에 대한 생각, 다시 말해 범아일여 사상을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인도 사람들 생각에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육신에서 아트만이 빠져나가 새로운 육신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아트만의 방향을 업[까르마]이 조종합니다. 

아트만은 단순하게 영혼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영혼과 다릅니다. 영혼은 실체가 없지만 아트만은 실체가 있다고 여겼기때문입니다. 인도인들은 아트만의 크기가 좁쌀만하다고도 하고 바늘 끝에 올라갈 수 있다고도 합니다. 크기가 있기 때문에 머무는 장소가있고, 그곳이 바로 심장이라고 여겼습니다. 

아트만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 육신을 빠져나오는데 이때 업이 아트만에 묻어서 같이 나옵니다. 업도 무언가 실체가 있어서 아트만을 조종하여 어떤 새로운 육신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고, 이 과정을 통해 아트만이 새 육신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트만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개아(箇我)라고 합니다. 개별적인 나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불멸입니다. 깰 수도 없고 성질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언뜻 ‘아, 그럼 이것이 영혼 같은 것이구나. 생명이 있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을 아트만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아트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트만을 볼 수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아트만 그 자체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트만은 그냥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으면 업과 함께 죽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육신으로 갑니다. 

이 말은 아트만이 있어야 육체에 생명이 있고 아트만이 빠져나가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에 생명을 가지게 하는 일, 이것이 아트만이 하는 일인 겁니다. 아트만이 육신에 들어오면 육체는 쾌락과 고통을 느낍니다. 아트만이 쾌락과 고통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트만이 육신을 빠져나가면 쾌락과 고통에서도 해방됩니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아트만이라는 것을, 자아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브라흐만세상의 근원이자 돌아갈 

아트만과 합일한다는 브라흐만이란 무엇일까요? 인도 사람들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브라흐만은 그 자체로는 정의할 수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이 브라흐만 안에서 나왔고 세상 모든 것은 브라흐만 덕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본질이라여긴 것이지요. 

이 브라흐만에서 아트만이 나와 육체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도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브라흐만에서 나온 아트만이 존재하는 것들 속에 있다가 언젠가는 브라흐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요. 아트만이라는 개별과 브라흐만이라는 개별 두 개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범아일여의 뜻입니다. 

비유 들기를 한 주먹의 소금을 물 속에 넣으면 소금은 형체도 없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이 아트만이고 물이 브라흐만입니다. 물속에 완전히 융화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수많은 강들이 흘러갑니다. 흘러간 끝에 바다에 들어간 수천 개의 강들은 강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바다 안으로 융화되어 들어갑니다. 바다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고요. 

정리하자면 고대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시작과 끝이므로 그것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트만은 크기를 가지고 육신 안에 있으니까 알 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트만을 알면 브라흐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범아일여 사상은 명상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아트만을 체험하면 브라흐만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죽으면 아트만이 브라흐만에게 돌아가 합일하므로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개념입니다.

카르마아트만을 윤회로 향하게 하는 과보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사문]들은 이러한 범아일여 사상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아트만을 알 수 있는가에 천착했습니다. 아트만을 알기위해 사문들이 수행한 방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마타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하고 마음을 한 군데 집중하여아트만을 정신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트만을 정신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인도사상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품에 안았을 때 그 여성 외에는 아무 욕망이없는 것과 같다.” 아트만에 대한 욕망, 브라흐만을 알고자 하는 욕망 이외에는 가정, 재산, 권력 등의 갖가지 욕망이 다 사라지는 정신적인체험을 하는 것이 범아일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트만을 조종하여 이 육신 저 육신으로 가게 하는 것이 카르마[업]라면 윤회의 굴레를 완전히 끊기 위해서는 아트만에서 카르마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카르마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당시 수행자들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고행(苦行)입니다. 

부처님도 출가 초기에는 고행을 했지요. 피골이 상접한 고행상을 다들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신체를 극한의 한계로 몰아가는 고행을 하던 부처님은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완전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자타가 쑤어 준 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지요. 

그리고 부처님은 어린 태자 시절 농경제를 할 때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 후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지금 식으로 표현하자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고행아트만을 조종하는 카르마의 제거

당시의 수행자들이 왜 고행을 했는가? 아트만에 붙어 있는 업을 털어내기 위해서 했습니다. 왜 업을 털어내려고 했습니까? 업이 남아있으면 업이 아트만을 조종하여 윤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업이 더 많이 털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극단의 고행을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은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할 때 그 의도가 과보를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반면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행동도 업으로 작용하여 과보가 되어 아트만에 달라붙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란 무엇입니까? 눈에 안 보이는 벌레를 밟는 것입니다. 손을 휘휘 저었는데 모기가 맞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내가살생의 의도를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위한 것들이 모두 업이 되어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으로 업을 짓지않아야만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지요. 당시 수행자들의 고행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반기(反旗): 아트만/브라흐만을 부정

이런 전통적인 수행관에 부처님은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트만? 그런 것 없다!”라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당시 수행자들이 행했던 집중 수행[사마타, 삼매]만으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빠사나라는 고유의 수행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관(觀)으로써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보니까 아트만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아트만의 부정은 브라흐만의 부정과 같습니다. 당시 인도 수행자들은 브라흐만이 시작이고 브라흐만이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연기법을 말했습니다. 연기법은 무시무종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삶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윤회의 굴레 속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작 자체를 상정하지 않는 겁니다.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존재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어요. 브라흐만이 없으면 내 안의 아트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해탈과 불교의 열반의 차이입니다. 

열반과 윤회불교의  기둥

해탈은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해탈은 필연적으로 윤회를 전제로 합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탈은 이야기할 필요도없는 것입니다. 윤회가 없다고 하면 불교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무아와 윤회라는 두 개의 큰 기둥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에게 “스님은 윤회를 믿습니까?”라고 물어온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부처님의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윤회를 인정하고 윤회를 전제하여 말씀하고 있어요. 

부처님은 수행의 과정에서 숙명통과 천안통을 획득하여 윤회를 확인했습니다. 전생을 보는 능력 숙명통으로 부처님께서는 여러 수행자에게 과거 생의 모습과 그 과보인 현재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다음 생을 보는 능력인 천안통으로 다음 생 어느 때에 수기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부처님의 수행에는 일절 미치지 못하므로 윤회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말씀이므로 윤회를 믿습니다. 95%는 믿음 5%는 실제 수행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해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윤회를 인정해야 합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열반을 우리말로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없이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불교와 깨달음의 상관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에 대한믿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자들에게 윤회란 이렇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멸성제윤회의 사슬의 소멸

부처님이 생각한 해탈이 바로 멸성제입니다. 부처님도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이 해탈임을 인정했으나, 해탈이 기존의 관념처럼 ‘나의 아트만이 계속 윤회하지 않고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트만도 부정하고 브라흐만도 부정한 채로 어떻게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나타난 부처님의 해탈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갈애의 소멸과 집착의 소멸입니다. “괴로움의 소멸, 이것이 해탈이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갈애가 생기고 집착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12연기인 것이지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은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생기는 유전문으로 설명하고,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는 환멸문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성제입니다. 

사성제는 고성제와 집성제, 멸성제와 도성제가 각각 세트입니다. 고성제와 멸성제는 결과이고 집성제와 도성제는 원인입니다. 또 다르게짝지으면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상은 이런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이고 집성제와 도성제는 ‘이렇게 하면 행복하게 세상을 살 수 있어.’라고알려주는 것입니다. 

고성제에서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는 것,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고 선언합니다. 고성제의 원인은 집성제입니다. 왜나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인가? 갈애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괴로움은 소멸할 수가 있습니다. 그 소멸의 방법이 도성제입니다. 멸성제의원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해탈의 원인입니다. 원인을 획득하면 해탈하는 것이지요. 괴로움의 소멸에이르는 진리가 도성제입니다. 

Previous

사성제와 팔정도 ⑧ 집성제 (集聖諦) 4  욕계, 색계, 무색계

사성제와 팔정도 ⑩ | 멸성제 – 해탈 (解脫) 2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