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④ – 사성제의 구조 3

고성제의 중심인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는가? 괴로움의 반대에 놓여 있는 행복을 들여다 봄으로써 괴로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을 느낌으로 인식한다. 감각적으로 즐거운 느낌, 충족되는 듯한 느낌, 좋은 느낌 등이다.
반면 부처님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괴로움, 감각정으로 느끼는 즐거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 모두를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범주의 행복이 불교적 관점에서는 괴로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감각에 의지하여 느끼는 감정들은 조건이 바뀌면 변화한다. 조건에 의지하는 것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불완전한 것은 괴로움이다. 세간에서 생각하는 행복조차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지점이 바로 고성제, 그리고 수행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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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과 행복

고성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고성제는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 과연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은 괴로움의 반대 지점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을 추상적인 가치로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숭고한 무엇, 이상적인 무엇.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이타적인.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 포함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가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심리학에서는 행복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굳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로 정의하자면 쾌락이 행복입니다. 즐거움에대한 느낌입니다. ‘배가 고픈데 밥을 먹어서 포만감이 오면 기분이 좋아’, ‘그동안 승진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드디어 승진이 되어서 기분이좋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서 기분이 좋아’라는 생각들이 다 행복입니다. 

심리학에서 행복은 가치 아닌 느낌

현대심리학에서는 행복에 대해 너무 추상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가뜩이나 고달픈 인생에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하나 더 늘어나면 행복 결핍 증후군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행복을 성취해야만 하는 추상적인 가치로 설정해버리면, 행복은 내가 절실히 갈망하지만 결코 내 곁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그냥 즐거운 느낌으로 상정합니다. 

백사장에서 금속탐지기로 탐색을 하면 금속을 만났을 때 알림이 울립니다. 울리는 자리를 찾아보면 반지도 나오고 핸드폰도 나오고 목걸이도 나오고 동전도 나옵니다. 금속탐지기가 울리면 이 밑에 동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행복은 금속탐지기의 ‘삐삐삐’ 하는알림음입니다. 동전이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는 소리가 행복입니다. 

우리 몸 자체에 금속을 탐지하는 기능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백사장을 걸어갈 때 모래 속에 금속이 있으면 발바닥이 찌릿찌릿하면서 알림이 온다고 합시다. 금속이 감지되면 기분이 좋고 금속에서 멀어지면 좋은 기분이 끝나고 평범한 기분이 되겠죠. 현대심리학에서는 이런 좋은 느낌이 곧 행복입니다. 

좋은 느낌에는 무엇이든 포함될 수 있습니다. 먹이를 발견했다던지 안전한 주거지를 찾았다던지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났다던지, 생존과번식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 나타나면 기분이 좋고 그 반대의 경우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행복은 가치가 아니라 느낌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정의한 괴로움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이 이야기한 괴로움도 이와 같은 것일까요? 고성제의 괴로움이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부는 맞으나 전부는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간의 괴로움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이고 둘째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이고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감각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일반 상식으로는 행복이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일까요? 행복한 느낌은 항상 대상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즐거움은 조건에 의지하는 데에서 생기는 느낌입니다. 조건에 의지하는 것들은 무상합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느낌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타지에 사는 자녀가 본가에 내려오면 마음이 참 흐뭇하고 즐겁지 않습니까? 맛있는 것도 해 먹일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요. 그런데 이 녀석이 하룻밤 같이 자고 이야기도 나누고 가면 좋겠는데 밥만 먹고 바쁘다고 얼른 떠나버리면 어떨까요? ‘이렇게 아쉽게 올 거면차라리 오지를 말든가 괜히 와서 속을 확 뒤집어놓고 가네.’ 서운합니다. 

또 행복한 느낌에는 항상 집착이 따라옵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그 순간 감정이 끝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음에 또 이 맛있는 것을 먹어야지, ‘이게 어디에서 만든 거지?’, ‘하나 더 없나? 조금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이런 생각이 집착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그 자체로 괴롭기 때문에 집착하는 일이 적은데, 즐거운 느낌에는 언제나 집착이 함께 합니다. 행복의 뒷면에는 집착이라는 괴로움이 반드시 붙어있습니다. 

이렇게 행복은 대상에 의지합니다. 행복에는 집착이 따라 붙습니다. 집착이 발생하면 현재의 느낌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행복을추구하다보면 상대적 발탈감에 빠져듭니다. 예를 들어 30년 전만 해도 냄비 하나, 숟가락 두개 놓고 반지하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해도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 이렇게 결혼생활을 시작한다고 하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모들도 그 결혼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조건이 바뀌면 행복한 느낌도 바뀝니다. 조건에 의지하는 것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것은 괴로움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부처님은 행복한 느낌도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온한 상태 역시 언젠가는 괴롭거나 즐겁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조건에 의지하는  모두 괴로움

불자의 경우에는 행복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불자이고, 평생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며 살아왔고, 하루에 한시간씩 참선하면서 살고 있다 합시다. 수행의 즐거움으로 매일이 즐겁고 세속적인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때 이 사람에게는 세속적인행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벗어남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벗어남의 행복은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이역시도 괴로움일까? 생각해봅시다. 

벗어남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세속적인 행복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괴로워도 수행을 해야 합니다. 꾸준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타지에서 자식이 왔는데 ‘나는 이 시간에 천수경 독송을 해야 하니까 너는 한 시간 동안 방에 있어라’고 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진정으로 정진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조건입니다. 셋째, 수행을 하는 동안 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든 주력을 하든 염불을 하든 그것을 하는 동안 마음이 고요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세속적인 행복에서 벗어나 벗어남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조건에 의지하는것이 다 괴로움이라고 했습니다. 조건이 변하면 느낌 역시 변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벗어남의 행복이 세속적인 행복보다 훨씬 질이 좋은행복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영원한 행복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적으로 괴로운 느낌은 당연히 괴로움이고, 행복한 느낌도 괴로움이고,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도 역시 괴로움이라고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아리송합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뚱이가 있으면 눈, 코, 입, 귀, 피부 같은 것들이 달려있지요. 이런 것들이 하는 일은 감각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면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다시 말해 몸뚱이가 있는 한, 정신이 있는 한, 마음이 있는 한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괴로움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괴로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느낌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의 지멸이 행복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내지는 부처님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한 느낌이 왜 행복이 아닌가? 왜 벗어남의 행복도 행복이 아닌가? 경전에서는 지금 현재 괴로움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괴로움이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중생들이 생각하는 괴로움과 부처님이 생각하는괴로움의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지금 현재도 괴로움이 없고 앞으로도 괴로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 괴로움의 지멸(止滅), 괴로움이 그치고 멸한, 완전히 뿌리 채 뽑혀서 더이상 괴로움이라는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 부처님이 생각하는 행복, 중생들이 생각하는 괴로움과 부처님이 생각하는 괴로움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오늘 이 시간에 짚어보았습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수행의 시작인 고성제로 한 걸음을 내딛기 어려운 것이고,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야만 수행을 고성제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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