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는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성제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는 괴로움이 멸하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부처님이 수행한 끝에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었는데 왜 사성제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셨습니까? 중생들이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통찰: 중생의 속성은 괴로움
불교의 모든 수행은 계정혜 삼학으로 귀결됩니다. 가장 먼저 계(戒)를 통해서 나의 행동과 마음을 다스리고 정(定)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야만 혜(慧)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밝아집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신통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누진통, 천안통, 숙명통, 천이통, 타신통 등이지요. 숙명통은 전생을아는 통찰이고, 천안통은 후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를 꿰뚫어 보는 통찰입니다. 누진통은 번뇌를 소멸하는 능력입니다.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왜 번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누진통이란 아주 작은 번뇌까지도 샅샅이 다 살피는 능력이에요.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신통력으로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를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누진통으로 중생들의 괴로움과 그 번뇌의 뿌리를 통찰하셨어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자각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요.
사성제는 방편이 아닙니다. 중생들의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괴로움과 함께 살아갑니다. 중생들의 세계는 괴로움의 세계이고, 괴로움 자체가 중생들의 존재 특성이라는 것을 부처님은 누진통으로써, 지혜의 눈으로써 통찰했습니다. 괴로움을 중심으로 사성제라는 구조를 만든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이야기할 때 “이렇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 않고 “일체는 괴로움이다”라는 것을 강조한 첫 번째 이유가여기에 있습니다.
팥빙수 봉사와 “안 믿어요!”
둘째. 같은 듯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이야기할 때 괴로움을 이야기하되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밖에 안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달 한 학교에 팥빙수 봉사를 갔습니다. 그날은 기온이 34~35도에 습도도 상당히 높은 날이었습니다. 당연히 실내에서 진행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야외 공간에 팥빙수 제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날이 너무 더운데 밖에서 행사를 하려니까 솔직한 마음으로 짜증이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팥빙수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한 아이가 팥빙수를 받아가면서 “안 믿어요!”라고 말하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증심사에서 팥빙수 봉사를 하는 것은 포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더운 날 아이들에게 즐거운 이벤트가 됐으면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의도를 부정당하자 충격과 언짢음이 배가 되었습니다.
사실 스님들은 살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겪습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과는 달리 머리를 빡빡 밀고 승복을 입기 때문에 정체를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다 합니다. 스님이 지나가면 “사탄이다!” 하기도 하지요. 일상생활에서는 개의치 않게 넘어가고 흘려 들을 수 있는데, 그날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평소와 달리 불편했습니다.
왜 그 초등학생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 학생이 보기에 나는 스님입니다. 그 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왜? 승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를 다른 사물에 적용해볼까요?
대상화, 관념화, 개념화를 배재한 ‘멸성제’
여기에 시계가 있습니다. 시계의 입장에서 오늘은 ‘내가 시계가 아니라 흉기로 역할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시계를 보고“시계네!”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흉기이고자 마음 먹었던 시계 입장에서는 기분이 언짢겠지요. 팥빙수 봉사를 간 날, 저는 제 스스로 봉사자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단지 스님일 뿐인 겁니다.
시계를 보고 시계 아닌 다른 무엇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술가들이 그렇습니다. ‘시계를 이용해서 잉크를 묻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시계는 시계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이야기할 때 멸성제의 내용이 거의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멸성제의 내용에 번뇌의 소멸밖에 없는 이유는 열반이라는 것의 상을 만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열반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열반을 대상화하고 관념화하고 개념화합니다. 열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가지기 위해,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열반에 욕심을 내고 열반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열반을 이룰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바로 집착, 욕심, 또는 개념화 시키는 데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화 시키는 것 자체가 번뇌를 만들어내는데, 열반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면 열반은이름만 열반일 뿐 번뇌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그 어디에도 열반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습니다. 그냥 ‘멸성제’이고, 멸성제란 다만 ‘괴로움을 멸하는 데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제목을 풀어 쓸 뿐입니다. 열반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나 이미지를 일부러 제시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사성제 중 고성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 부처님은 욕계 중생들이 깨치는 길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있다고 보시고, 괴로움을 중심으로사성제를 체계화했습니다. 두 번째, 열반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면 그 자체로 번뇌가 되기 때문에 열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성제는 아주 체계적으로 짜여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