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요리경연대회
반갑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마음속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난주 토요일 자비신행회가 주관하는 가족요리경연대회에 우연찮게 참석했습니다. 가족요리경연대회에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과 30대 젊은 부모들이 참가했습니다. 요리를 심사하는 시간을 때우려고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참가자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일이 있고 과정이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 시험의 경우는 어쨌거나 결과가 중요합니다. 맹탕 놀았어도 대학에 붙으면 그만이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시험에 떨어지면 꽝입니다. 오늘 요리대회는 참여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와 부모가 요리를 함께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지 누가 무슨 상을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같이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정말 화복하고 행복이 넘쳐 보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같은 출가수행자들은 자비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을 해야만 하지만, 여러분들은 여러분 가족 안에 이미 사랑이 넘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잘 지키면 그것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사랑을 잘 지키길 바란다는 내용의 법문을 했습니다.
젊은 가족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이 제3자가 보기에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뭔가를 함께하면 행복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번에 우리 증심사 신도님들과 함께 다녀온 제주도 2박3일 ‘길 따라 절 따라’ 견학 역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할 때 행복하다
사람이라는 것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의 존재라고 봤을 때, 다른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와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무엇인가를 할 때 행복해하는구나 하는 것을 가족요리경연대회와 길 따라 절 따라를 통해서 느꼈습니다.
가족요리경연대회 이후에 절에서 어떤 부부와 상담을 했습니다. 처음 뵙는 분들이었는데, 보기에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이고, 바깥 분은 사업을 하시고, 보살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문득 요리를 하던 그 젊은 가족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20년이 후에는 이런 50대 부부 같은 모습이 되어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들은 이제 수능을 준비하고, 남편 사업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아내는 항상 걱정이 많은 모습 말입니다.
20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왜 행복했던 가족이 수심에 가득 찬 부부가 되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할 땐 이렇습니다. 20년 동안 식구들이 같이 지내면서 뭔가가 쌓인 것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내 가족이다, 우리 가족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요리하고 웃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 행복의 기억들과 추억들이 소중할수록 그 소중함과 행복함을 계속 간직하고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애착은 소유욕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족이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애착이 생깁니다. 애착이 굳어지면 소유욕이 됩니다. ‘저 애는 내 자식이야. 저 남자는 내 남편이야. 절대로 남들은 우리 가족을 해치면 안 돼. 왜? 우리 가족이니까. 우리 것이니까.’ 이런 소유 심리가 생기게 됩니다. 소유심리가 생기면 100% 불안해집니다. 불안한 마음이란 결국은 소유욕에서 나온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젊은 가족이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생기는 것은 결국 ‘우리가족’이라는 소유욕입니다. 소유욕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은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생깁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애착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애착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 행복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안한 마음은 인간의 인지상정입니다. 보살님들이 불안하다고 해서 내가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을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 불안한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봅시다.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불안한 마음이 커진다고 스님이 말하는데, 진짜로 그럴까?
제가 출가하기 전의 일입니다.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때 나라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1월에 IMF가 터졌는데, 저는 그로부터 몇 달 전인 여름에 회사를 관뒀습니다. 당시 통장에는 150만 원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내 집도 없었습니다. 애인도 없고 가족들과도 떨어져서 혼자 서울에 있었습니다. 가만 보면 가진 게 하나도 없이 완전히 몸뚱이 하나만 달랑 가지고 IMF를 맞이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나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어차피 가진 게 없으니까 IMF가 터지나 안 터지나 다른 게 없는 겁니다. 가진 게 없으면 불안한 마음도 없구나, 뭔가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구나라는 생각을 그 때 했습니다.
소유욕은 불행의 씨앗
이 경험을 반대로 말하면 우리 보살님들이 매사에 마음이 불안한 것은 뭔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표현은 ‘내 가족’이라고 하지만 ‘내 것’이라는 소유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시어머니 대열에 들어갔지만 며느리 시절을 상기해보십시오.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올라오면 우리 집 살림살이를 가만히 안 둡니다. 꼭 자기 식대로 청소를 해야 하고 냉장고도 한번 확 뒤집습니다. 며느리 입장에서 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오지만 말을 못 합니다.
며느리는 왜 열불이 터집니까? 내 것이거든요. 이 부엌은 내 스타일대로 세팅이 되어 있는 내 것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라고 와서는 ‘얘야 부엌이 이게 뭐니?’ 하고 손을 대니 열불이 납니다. 우리 가족이라고 말하고 우리 집이라고 말하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시어머니의 행동에 반발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소유욕의 내막
여기에서 ‘내꺼다’라고 하는 것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시계가 있다고 합시다. 제가 ‘이건 내 시계다’라고 말하면 그렇게 됩니까? 시계를 봤을 때 ‘중현이 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무언가 보입니까? 만지면 내꺼라고 하는 촉감이 있습니까? 이 시계가 내꺼라고 하는 소리를 냅니까? 전혀 없습니다. 내가 그냥 내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샀으면 내 것이지!”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내 돈으로 차를 사서 애인을 줬다면 내 차입니까, 애인 차입니까? 애인 차입니다. 줬으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애인이 아니라 내 차라고 하더라도 지금 잠깐 내가 타고 다니는 것일 뿐입니다. 내 돈을 썼으니까 내꺼다 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은 어떤가? 이건 내 땅이고 등기부등본에 올라 있고 나라에서 내 땅이라고 인정한 서류도 있다. 그렇다면 땅은 내 것이지 않은가!”
정말 그렇습니까? 이 땅이 내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는 내 것이라는 표시가 전혀 없습니다. 국가에서 서류로 증명한다고 해서 땅 자체에 물리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생각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가 생각합니다. 조금 더 확대하면 그런 내 생각을 사회가 인정해주고 법적으로 보장해줄 뿐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그저 생각
눈을 감고 생각해봅시다. 지금 내가 가진 내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시고, 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진짜로 내 것인지를 제가 조금 전에 말했던 여러 가지 이유들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면 여러분들도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내 생각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스님 말이 맞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스님이 지금 소유, 애착 이런 것을 버리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야. 뻔하지 뭐. 그런데 누가 몰라서 안하나? 안 되니까 안 하는 거지. 안다고 할 수 있으면 다 도인이게?’
여러분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아는데 잘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안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수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수박을 처음 본 사람에게 수박 맛을 말로 설명해줬다고 합시다. 그 때 설명을 들은 사람이 ‘아, 수박 맛이 이런 거구나’라고 한다면 그가 수박 맛을 아는 것입니까? 수박 겉을 핥아봤다고 해서 수박 맛을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박을 먹어봐야 비로소 수박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데이터가 많다 해도 그 데이터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만 스마트폰이 되고 내비게이션이 되는 것이지, 안 하면 모르는 겁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일본의 사회학자 아베 긴야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발심하는 것이고 한 번 발심하고 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미미하더라도 직접 해보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닙니다. 직접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소유욕이 있구나’,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면 소유욕과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누가 몰라서 안 하나? 안 되니까 안 하지’라는 것은 내 안의 소유욕이나 애착의 실체를 아직까지 제대로 본인이 파헤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본인이 내 안에 있는 불안함을 대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겁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하면서 별 문제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것은 모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고 칩시다. 내 차도 내 것이 아니라 잠깐 타고 다니는 것일 뿐, 우리 가족도 이제 다 컸으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순리야,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라고 생각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과연 불안감이 없을까요?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내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다고 하는 그 순간조차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애착이 두려움을 낳는다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하여도 목숨만은 죽는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목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애착을 버리고 소유를 버리고 또 버려도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이 바로 이 목숨에 대한 애착입니다. 표현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안을 달고 삽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갓난애들이 왜 배가 고프면 웁니까? 배가 고프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니까 우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안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이 집착, 애착을 버리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집착에 붙잡혀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네.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문 앞에서 슬피 울고 있구나.
물이 말라 가는 연못의 고기와 같이
집착에 사로잡혀 떨고 있구나.
‘내 것’이라는 이 소유의 생각을 지워버려라.
생존에 대한 이 모든 애착을 털어 버려라.
<숫파니파타 게송 776~777>
부처님께서는 비유를 정말 잘 듭니다. 이 게송에는 물이 말라가는 연못의 고기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물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차라리 불안감에 벌벌 떨면 좀 낫습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당장의 욕망에 눈에 멀어서 물이 말라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삽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의 삶은 물이 말라가는 연못의 고기와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말라가는 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은 고기에게 있어서 내 것이라는 집착, 애착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힘이 없을수록 말라가고 사라지니까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의 게송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하고 갑시다. 인생이란 물이 말라가는 연못의 고기와도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 하나만 잘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