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 2
3.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4. 수행하는 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부라는 것은 마음공부를 말합니다. 대학 시험공부, 공무원 시험공부, 교수들의 연구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공부를 하는데 장애가 있어 피하려고 하면 배움이 넘치게 되는 장애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알쏭달쏭합니다. 이 구절의 전문을 살펴볼까요?
마음공부에 장애가 없으면 배움이 등급을 뛰어넘게 되고 배움이 등급을 뛰어 넘으면 반드시 얻지 못하고서도 ‘얻었다’고 하게 되느니라.
이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하여져서 장애에 걸릴 것이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을 자유롭게 거닐어라” 하셨느니라.
마음공부의 단계를 건너뛰는 것은 불망어죄
마음공부에 장애는 당연히 있는 것인데, 장애가 없이 수월하게만 공부가 되면 배움이 등급을 뛰어넘게 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나의 수행력을 진일보시켜야 하는데, 이를 훅 뛰어넘어버리면 얻지 못하고서도 얻었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율에서 말하는 불망어죄입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대표적인 오계입니다. 이 중 ‘거짓말 하지 말라’는 대목은 본래 불망어죄입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입니다.
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짓말이 나올까요?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는데, 공부가 너무 쉽게 된다는 것은 내가 수행의 장애를 피해버린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았다고 스스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잘 못 알아서 한 거짓말입니다.
보왕삼매론의 공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여러 부분에서 장애가 생깁니다. 이 장애를 장애라고 생각하고 이를 피하려고 하면 마음의 장애가 생깁니다. 이것이 보왕삼매론에서 이야기하는 처세의 공식입니다.
마음공부에 장애는 자연스러운 현상
세 번째 구절에 이 공식을 적용을 시켜보겠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는데 있어 장애는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피하거나 혹은 그것이 장애인 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해버리면 수행의 내공이 깊어지지 않고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다만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애라고, 고통이라고, 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이전 시간에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공부 하는 데는 장애가 따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장애에 너무 끄달리거나 그것을 억지로 피하려 하다 보면 앞서 이야기 한 사달이 나게 됩니다. 마음공부를 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 우리가 장애라고 말하는 현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참선을 할 때의 마장
예를 들어 참선을 하려고 앉아있으면 마음속에 오만가지 망상이 생겨납니다.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심할 때는 망상에 빠져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게 지난 일들이 떠오릅니다. 후회되는 일들이 떠오르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 일에 대한 생각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주로 불안감을 동반하지요. 그런 것들은 모두 망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 때 이것이 장애라고 생각하여 장애를 일으킨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면 병이 납니다. 상기병이 생기기도 하고 심하면 정신착란, 피해망상과 같은 정신적인 병이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장애라고 생각하면 고통이 됩니다.
‘이렇게 참선하고 앉아만 있다가 세월이 까무룩 가고 말았는데 어느 세월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과 ‘이렇게 수행을 한다고 해서 정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마장
저도 2003년부터 2009년까지 근 6년 동안 철마다 결제에 들어가 참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앉는 것 자체가 힘들다가, 그 다음에는 앉는 것이 몸에 익고 화두에 대한 감도 조금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불신이 생겨나고 공부에 재미도 없어집니다. 긴가민가 싶던 차에 도반이 소임을 살아달라고 하여 선방을 나온 후로는 선방을 못 가고 있습니다. 확신이 없고 공부가 재미없어지는 것, 그것이 마장입니다. 그것이 장애입니다.
‘한 철만 소임 살고 선방으로 돌아가야지’ 하여도 막상 선방 밖으로 나오면 다시 화두 참구에 매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됩니다. 잠깐 소임 살고 돌아가려 했지만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버렸고, 나이 60이 다 되어 가고, 몸은 고장이 났습니다. 이제와 돌아가 참선하려고 해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마장입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는 잘 모릅니다.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수경 일독을 하려고 해도 돈 벌러 가야하고, 청소해야 하고, 식구들 밥 챙겨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핑계입니다. 내가 포기하고 물러서는 마음을 내는 것이 수행의 장애입니다.
장애와 마장을 거스르려 하는 것이 진짜 장애
여기에서 말하는 수행의 장애란 진짜 장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을 장애라고 인식하니까 피하고 싶고, 피하고 싶으니 마음의 장애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망상에 끄달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망상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수행의 장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정도 선에서 주변 조건이 갖춰지면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수행에서 물러납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다른 현상도 나타납니다. 참선하려고 앉으면 상기가 되고, 참선하려고 앉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수기를 줍니다.
더 수행을 하다보면 부처님이 겪으셨던 것처럼 마구니들이 나타나서 회유를 하기도 하고, 중생들이 이 깨달음을 함께 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어느 정도 수행을 성취하면 ‘내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아상,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불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다. 번뇌는 손님이며 티끌에 불과하다.” 마음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며 티끌이 아니라 티끌이 떠도는 허공입니다. 아무리 티끌이 허공에서 요동치고 흔들려도 허공은 변함이 없고, 아무리 많은 손님이 다녀가도 주인은 여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심성본정心性本淨 객진번뇌客塵煩惱
번뇌를 허공이고 주인이라고 생각하니까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을 씁니다.
그것이 수행의 장애입니다. 손님은 하룻밤 자고 나면 떠납니다. 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물러서는 마음이나 유혹 같은 것들이 수행에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은 불성을 이야기합니다. 불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고 불성은 본래 청정하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초기불교와 후기 대승불교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책에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책에는 마음 같은 것은 본래 실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불성을 이야기할 때 유의할 것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대승불교와 선종에서 말하는 불성이 무엇인지 그 차이점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이 나오게 된 맥락과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성(佛性), 제대로 이해하기
초기불교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조건 생 조건 멸입니다. 조건에 따라 생기고 조건에 따라 멸합니다. 또한 마음은 찰나 생 찰나 멸입니다. 마음은 한 찰나에 생했다가 멸합니다. 한 찰나에만 존재하고 다음 찰나의 마음은 이전 찰나의 마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 찰나는 1/75 초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를 더 잘게 쪼갤 수도 있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요.
이렇듯 마음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고 한 찰나에 생멸하므로 실체를 파악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에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연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마음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대상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왜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초기불교가 태동하던 시기의 주류는 바라문교였습니다. 이들은 이 세계를 관장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브라흐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 존재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불생불멸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근원적인 존재, 브라흐만, 그런 것 없다!”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바라문교를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 불교입니다. 근원적인 존재란 없으며, 마음에는 실체가 없고, 마음은 찰나찰나 생멸하는 것이라는 것이 당대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연기라는 말로 정의한 것이지요.
마음은 찰나생멸, 마장도 찰나생멸
이렇게 태동한 불교가 1천 년 이상 존속되어 오며 힌두교와 교류하기도 하고 힌두교의 많은 부분을 수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래장사상이나 불성과 같은 개념이 등장합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엄밀하게 말하면 여래장사상이나 불성은 불교가 아니라고 공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불성은 분명 친숙하고 가까운 개념입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는 불성이 곧 공이고 연기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불성이라는 말을 대할 때 ‘무언가가 있다’고,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존재라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성이 공이고 연기라는 말도 엄밀하게 따지면 완벽하게 호응하는 말이 아닙니다.)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불성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해야 수행에 따르는 마장을 마음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과 함께 생겼다 사라지고, 마음은 한 찰나 생멸하는 것임을 명심하면 망상이나 포기하는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 유혹에 넘어가는 마음 모두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이처럼 장애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해져서 장애에 걸릴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네 번째 구절의 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교해지지 못하고, 서원이 견고하지 못하면 반드시 증득하지 못하고도 증득했다고 하느니라.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 보고 마 자체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이라” 하셨느니라.
마장을 견뎌야 서원이 단단해진다
수행을 하는 데 마장을 피해버리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합니다. 수행이 잘 안 되면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수행에 마가 없이 잘 되어 버리면 깨달음에 대한 서원이 물렁해지는 것입니다. 온실 속 화초가 노지에 나가면 얼어 죽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장이라는 것의 시련을 견디며 서원이 단단해져야 끝까지 수행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흔히 마장이라고 하면 환각이 보이거나 환청이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이런 것들의 근본은 퇴불심입니다. 물러서는 마음으로 유혹이 넘어가거나 포기해버리니까 그런 것들이 보입니다. 유혹이나 물러서는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중생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습관대로 수행을 하니 포기하게 됩니다. 내 업을 잘 보고, 내 자신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정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행은 끊임없는 반복이며 수행은 매일매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삶을 살아갑니다. 익숙한 생활 속에서는 자신의 습관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익숙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나 자신이라는 인식으로써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일상생활을 낯설게 바라봐야 합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힘이 크면 익숙한 생활 하나하나를 낯설게, 처음 접하는 것처럼, 세심하게 관찰하게 됩니다. 그래야지만이 몸에 익은 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중생의 습을 성찰하는 것이 수행
두 번째, 왜 수행을 하는 데 마장이 당연하냐하면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살이고 부처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자비이고 무주상보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깨달음과 부딪치게 됩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부딪치면 깨닫지 못함이 주저앉게 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고, 또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을 때 까지는 절대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인 입장에서야 마장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깨닫기 전까지는 999번 제대로 수행하다가도 1번 삐끗하면 도루묵이 되어서 처음부터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해야 어느 정도의 수행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