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협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
신축년 정초기도를 맞이하여 보왕삼매론을 다시금 읽고 해석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보왕삼매론의 정식 이름은 <보왕삼매염불직지>입니다.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에 활동하셨던 묘협스님이 지은 책인데요. 왕조가 바뀌는 시기의 나라는 얼마나 어지러웠을 것이며 민초들의 삶은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묘협스님께서 염불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책을 지었다고 합니다.
<보왕삼매염불직지>는 모든 수행 중에 염불이 삼매에 들어가는 데에 가장 뛰어난 수행법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문은 상당히 두꺼운 책인데 중 제17장 ‘10대 애행(碍行)’만 따로 떼어서 보왕삼매론이라 일컫습니다. 10대 애행이란 열 가지 큰 장애(障碍)를 어떻게 하면 수행(修行)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며,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축약한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왕삼매론입니다.
보왕삼매론의 구성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장애를 피하고자하면 오히려 마음에 그와 관련되니 장애가 생기니, 그 장애를 피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개의 장애를 먼저 언급하되, 각각 세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같은 뜻을 달리 말한 것이며 중간의 두 번째 문장이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첫 구절 ‘몸의 장애’에서 시작하여 열 가지 장애가 이어집니다.
보왕삼매론의 개괄
1. 몸의 장애
2. 세상살이 곤란함의 장애
3. 마음공부의 장애
4. 수행에서 생기는 장애
5. 일을 도모하는 데에서 생기는 장애
6.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 정을 나누는 데에서 생기는 장애
7.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에서 생기는 장애
8. 공덕을 베풀 때 생기는 장애
9. 이익을 취하려 할 때 생기는 장애
10. 억을한 일을 당했을 때 생기는 장애
이런 장애들을 피하려고 하면 오히려 마음에 장애가 생깁니다. 어떤 것들일까요?
1. 탐욕하는 마음
2. 업신여기고 사치하는 마음
3. 배움이 넘치는 것
4. 서원이 굳건하지 못한 것
5. 마음이 경솔한 것
6. 의리가 상하는 것
7. 교만한 마음
8. 불순한 생각
9. 어리석은 마음
10. 원망하는 마음
모든 문제는 장애가 내 앞에 있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장애가 없으면 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고, 마음의 장애[번뇌]가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장애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애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보왕삼매론 독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자연과 장애
시골에서 운전을 할 때 어떻습니까? 앞에 가는 차가 도회지에서 나들이를 나온 차인지 동네 사람의 차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길을 다 알고 있고, 어느 지점이 위험지역인지 알고 있습니다. 늘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기도 합니다. 반면 외지인들의 경우에는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하러 나온 것이라 아주 느긋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뒤따라갈 때는 답답해서 짜증스럽게 여기기도 하지요.
시골길, 풍경이라는 것은 똑같은데 어떤 사람은 풍경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가로막는 장애가 됩니다. 똑같은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장애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애가 아니기도 합니다.
어떤 장애도 날 때부터 ‘누군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본분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 장애로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합니다. 하늘이 높고 호수가 푸른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꽃 피고 눈이 오고 바람 부는 것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장애라는 생각에서 장애가 온다
인간의 몸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듯이 인간의 몸도 때가 되면 늙고 때가 되면 병들고 죽습니다. 우리는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늙고 ‘내가’ 병들고 ‘내가’ 죽는 것을 받아들일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합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는 일을 장애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장애가 생깁니다. 번뇌가 생기면 다시 평범한 자연현상도 나에게 다가오는 더 큰 장애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생들의 삶은 이렇게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청정하고 깨끗한 정토(淨土)가 아니라 번뇌와 고통으로 얼룩진 예토(穢土)를 사는 것입니다. 예토는 자기가 만든 장애 속에서 쳇바퀴를 돌게 되므로 고통을 참고 견디는 사바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TV 프로그램처럼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가 고장 나면 카센터에 가져가서 고친 다음에 잘 타고 다닙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때 원인을 파악하여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불안한 마음만 가진 채로 계속 운행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무언가 불안하고 고통스럽다면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됩니다. 원인을 찾거나 해결할 생각 없이 그저 불안해하고만 있다면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몸이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2.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자가 부처님께 “몸이 늙고 병들어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재가자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떻게 하면 몸은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하여 사리불 존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몸이 병들면 마음이 병든 것이고, 어떤 것이 몸이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 첫 번째 질문에 사리불 존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온이고 오온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오온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오온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나 자신입니다. 나의 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색온, 내가 덥다 혹은 춥다고 느낀다면 수온, 내 앞에 뭔가가 있는데 참 좋아 보인다고 생각할 때는 상온이고, 나도 빨리 돈을 벌어서 저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것이 행온이고, 내가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이라고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 식온입니다.
이것이 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다, 라는 것에 속박되어 지내지면 그 오온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과 번뇌가 생겨납니다. 사실은 내가 있지 않고 내가 아닌데 말입니다.
나라는 생각에 속박되지 않아야
그렇다면 몸이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두 번째 질문에 사리불 존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오온이고 오온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오온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오온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생겨나지 않는다.”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이것이 나라는 생각에 속박되어 있느냐, 속박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왕삼매론에 빗대자면, 나에게 장애가 있어도 그것이 내 마음의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경전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새를 잡아서 다리를 줄로 묶은 후에 새를 풀어주면 조금 날다가 떨어지고 맙니다. 아이들은 새를 잡아서 이런 장난을 치면서 즐거워합니다. 우리 중생들의 처지가 이 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무명이라는 줄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몸이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무명에 속박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보왕삼매론의 첫 번째 구절이 원문에는 조금 더 길게 나와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겨나기 쉽다. 탐욕이 생겨나면 마침내 파괴하여 도에서 물러나게 되느니라. 병의 인연을 살펴 병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면 병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사리불 존자는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재가자에게 오온이 공한 이치를 깨달으면 몸이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고, 묘협스님은 병이 공한 이치를 깨달으면 병이 당신의 발목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몸이 병드는 것이나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이나 같은 이치입니다. 나무가 낙엽이 떨어진다 하여 울고불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늙고 병듦을 괴로워하고 불안해합니다. 이것은 오온이 공한 이치를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무명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에 병이 장애로 다가옵니다.
병의 인연을 살펴서 약으로 삼아야 합니다. 연기실상의 세계를 살핀다면 시절이 도래하여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고 시절이 도래하여 병이 온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안다면 치료법 또한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차가 내달리듯 병이 없는 몸에는 탐욕이
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를 앞서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는 것일까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A라는 자동차는 10년이 되어서 잔고장이 많고, B라는 자동차는 비싼 신형입니다. 밟으면 밟는 대로 쭉쭉 나가지요. A 자동차를 탈 때는 운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B 자동차는 너무 편안하니까 시속 100킬로미터인 것 같은데 시속 160킬로미터입니다. 그렇게 내달리다보면 자칫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건강하니까 탐욕이 생깁니다. 차가 좋으니까 속도를 막 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정말로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길까요? 제 경우에는 2년 전 크게 아픈 후로 몸 관리에 아주 신경을 쓰고 조심을 하다가 한 1년이 지나니까 다시 건강관리에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여러 수치가 악화되자 그제야 부랴부랴 다시 오후불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열심히 관리를 하게 되었지요.
오후불식을 하다 보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식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은 ‘식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후에 먹지 않는 생활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먹지 않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조금만 배가 고파도 무언가를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챙겨 먹었습니다. 식욕이 아니라 식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평소에는 그것이 탐욕인줄도 모르고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마치 조심성 없이 달리는 신형 차와 같이 말입니다.
내가 공하다는 것을 깊이 통찰하면 마음의 번뇌와 마음의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이 보왕삼매론의 기본적인 골격임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