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전에 새로 연등을 달았습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새로 단 원통전 연등을 보는데 참으로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불자들은 원통전 안에 서 있는 석조입상을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그저 돌로 만든 조각상일 뿐입니다. 석조입상의 말뜻이 ‘돌로 만든 서있는 조각상’입니다. 그런데 왜 불자들의 눈에는 돌 조각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으로 보일까요?
보살 눈에는 보살이 보인다
보는 순간 우리 안에서 믿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자가 아닌 어떤 등산객이 증심사를 지나가는 길에 원통전을 봤다면 그에게는 관세음보살님이 아니라 그냥 석조입상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관세음보살님이 야외에 있느냐 법당에 있느냐, 등을 달았느냐 안 달았느냐, 금박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신심이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신심은 평범한 돌덩어리도 관세음보살로 탈바꿈시키고, 관세음보살님도 한낱 돌덩어리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요,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요, 모든 진리를 널리 키우고 증장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
도(道)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란 열반을 증득하여 번뇌의 불길을 영원히 끄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만 있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까요? 믿음만 있으면 열반은 그냥 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믿음은 나로 하여금 수행의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것, 그래서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 수행을 하다가 옆길로 새지 않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수행을 시작하기 힘들고, 설령 시작하더라도 꾸준히 하기 힘들고, 설령 꾸준히 한다 하더라도 옆길로 새버리기 십상입니다. 어쨌거나 수행을 시작해서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 해야 깨달음을 얻고, 그토록 바라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믿음이 수행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으면 극락에도 가고, 믿으면 부귀영화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할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수행을 할 수 없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번뇌를 종식시킬 수 없고 번뇌를 종식시키지 못하면 영원한 행복은 요원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도의 근본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보시하면 공덕이 따르나니
믿음이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공덕이란 선업을 쌓으면 생기는 어떤 것입니다. 선업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보시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없으면 몸으로 봉사할 수 있고, 몸이 늙어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안 되면 주머니에 있는 재물로써 보시할 수 있고, 기운도 없고 재물도 없다면 마음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남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습니다. 웃는 얼굴로 남을 대하고 좋은 말로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보시입니다.
이렇게 보시를 하면 반드시 공덕이 따릅니다. 공덕이 제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보시를 행하는 근본 바탕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믿음은 수행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한다는 마음 자세로 보시를 행할 때, 내 안에 있는 모든 무명을 깨끗이 털어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보시를 행할 때 비로소 공덕이 쌓인다는 말입니다.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보시행을 한다면 내게 돌아오는 공덕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열심히 보시를 해도 공덕이 쌓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를 하든, 기도를 하든, 그 어떤 보시를 하든지 간에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은 공덕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서 하는 그 마음이 공덕으로 돌아옵니다. 보시가 곧 나의 수행이라는 마음가짐은 다시 말해 이기적인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곧 수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안의 보살심을 드러내는 찰나
내 마음이 따로 있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인 내가 따로 있고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 순간 나 자신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늘 가지고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욕심내는 중생의 마음으로 살아가나요?
실은 이것이 원래 우리의 타고난 마음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보통의 인간은 그냥 그렇게 살지요. 그런데 아주 작은 수고로움, 예를 들어 원통전에 등을 켤 때,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의 중생심이 잠깐 사라지고 보살의 마음이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스물네 시간 보살심을 갖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흔들리고 방황하는 중생의 마음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법회 때가 되면 절에 와서 예불을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등을 켭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내 안에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에 동참하는 그 자체는 작은 수고로움이지만 작은 수고로움으로 인해서 욕심내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괴로워하는 내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법회에 나오거나 아침에 일어나서 나만의 작은 예불을 드리거나 하는 작은 수고로움을 결코 무시하거나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중생이 아닌 보살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믿어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화내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괴로워하는 마음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내 마음을 믿어야 합니까? 법회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못 간다면 유튜브를 통해서 동참하고 때가 되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는 등 귀찮지만 신행생활을 ‘하려고 하는’ 내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그 순간만은 중생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입니다.
중생의 마음으로 살지 말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원통전 관세음보살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많은 보살들 중에서 가장 믿음을 강조하는 보살님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야말로 믿음 하나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언제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입니다. 내 안의 보살의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우리는 이미 보살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