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집착없이베푸는공덕

금강경에서는 무위법을 말하며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고, 무주상보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일화는 벽암록의 달마대사 이야기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무제에게 달마대사는 말한다. “공덕이란 마치 그림자처럼 있는 것 같지만 참된 것이 아니다.”
보시와 공덕은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와 같이 인연 따라 이뤄지는 것이며, 자성이 없어 준 바도 받은 바도 없다.
다만 우리 시대는 경전과는 달리 보시와 공덕이 사라져가는 시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주상보시를 논하기 전에 보시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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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시대와 보시공덕

부처님 사후 처음 500년은 수행을 열심히 해서 깨달은 이들이 많이 나오고, 그 다음 500년은 수행은 열심히 하되 깨달은 이들이 많이 나오지 않고, 그 다음 500년은 수행보다 불법을 듣고 공부하는 이들이 생기며, 네 번째 500년은 불법을 공부하지는 않되 탑을 짓고 불사를 하는 공덕 짓는 일을 많이 하고, 마지막 500년은 서로 싸우기만 하는 말법시대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말법시대입니다. 불자 아닌 분들을 생각했을 때 살아가면서 공덕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도 않고요. 불자들 역시 공덕을 쌓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거나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수준이지요. 

금강경에서 유위법과 무위법을 이야기하면서 보시를 예로 들어 무주상보시를 강조합니다. 유위법과 무위법을 이야기하면서 왜 굳이 보시에 대한 비유를 들었을까요? 명예나 재물을 탐하는 비유를 들 수도 있고 금강경 사구게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공덕이 크다는 비유를 들 수도 있었는데 굳이 보시를 내세운 이유가 궁금합니다. 

오늘은 보시공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예를 드는 <벽암록>의 첫 번째 이야기, 양무제와 달마대사의 일화를 가지고 법문하겠습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묻다
참된 공덕이란진리의 핵심이란?

양무제는 중국에 불교를 퍼트린 인물입니다. 불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했든, 죄를 많이 지어서 공덕을 짓고자 그랬든, 혹은 정말로 극락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했든, 어쨌든 일국의 황제로써 탑을 짓고 불사를 하는 공덕을 많이 쌓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벽암록 ‘달마불식’ 이야기는 불자가 공덕을 쌓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맞는 이야기라 할 것입니다. 지금 같이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살아가면서 공덕의 중요성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시대에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알아봅시다. 

김명국필 달마도. 국립박물관

도력이 아주 높은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무제가 그 스님을 불러들여 묻습니다. “짐은 왕위에 올라 수많은 탑을 세웠다. 과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는가?”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무(無)라.”고 합니다. 

양무제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수많은 탑과 사원을 지은 공덕이 아주 클 것 같은데 공덕이 없다 하니 황당합니다. 그 이유를 묻자 달마대사가 이렇게 답합니다. “그것은 단지 인천에 과보를 얻는 유루(有漏)의 인이 될 뿐입니다. 형색을 따르는 그림자처럼 비록 있는 것 같지만 참된 것이 아닙니다.”

무위법의 관점에서 보면 공덕은 무, 없는 것이라고 달마대사가 이야기했습니다. 황제께서는 본인이 공덕을 어마어마하게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치 그림자처럼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없으며, 유루의 인 즉 번뇌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될 뿐이라는 대답입니다.

무언가가 크다 작다, 가치가 있다 없다, 소중하다 소중하지 않다, 사랑스럽다 밉다… . 이런 생각들은 결국 ‘내가 있다’는 아상과 아집에 빠지게 하고, 아상에 빠져 세상을 바라보면 다시 크고 작고 아름답고 못생기고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는 식으로 비교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쌓는 공덕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지요. 

이때 황제가 다시 묻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참된 공덕인가?”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체가 공적합니다. 이와 같은 공덕은 세간의 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는 이 스님이 제대로 된 스님인가 의심하면서 묻습니다. “어떤 것이 거룩한 진리의 핵심입니까?” 이에 달마대사가 답하기를 “확연해서 거룩하다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廓然無聖 확연무성)”고 했습니다. 너무 뻔해서 성스럽거나 거룩하다고 할 만한 것 없이 지극히 평범한 것이 진리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양무제가 다시 말합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이때 달마대사가 그 유명한 ‘달마불식(達磨不識)’이란 대답을 합니다. 당연히 양무제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달마대사는 양무제를 떠나 위나라로 가버렸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보시도 없고 공덕도 없는 우리 시대

지금의 우리가 이 고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양무제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공덕을 많이 쌓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공덕을 쌓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보시 중 첫 번째는 법보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널리 알리는 것이에요. 아직 남에게 불법을 알릴 만한 배움이 갖춰지지 못했다면 몸으로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내 시간과 내 노력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요. 나이가 많아서,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시간이 없어서 봉사를 못 한다면 주머니에 있는 돈이라도 꺼내 재보시를 하는 겁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마음으로 보시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누군가를 대할 때 친절한 말과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 마음으로 하는 보시입니다. 이렇게 보시를 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길은 다양하고 넓은데 우리 시대는 보시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무주상보시는 보시가 있어야 시작된다

금강경을 보면서 무위법의 도리에 심취한 나머지 우리 중생들이 반드시 쌓아야만 하는 보시 공덕을 가볍게 여기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돈도 많이 벌어본 사람이 나중에 ‘돈 벌어봐야 아무 소용 없더라.’고 무상함을 느끼는 것이지, 평생 돈 한 푼 못 벌어보고 가난에 찌들어 살던 사람이 ‘돈 같은 것 아무 소용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한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공덕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공덕을 많이 쌓았을 때 훗날 ‘아, 내가 불법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무주상보시로 이어지는 것이지, 보시나 공덕을 쌓지 않고 말로만 ‘무주상보시를 해야 해.’라고 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증심사 주지 소임을 보기 전에는 머리 깎고 20년이 다 되도록 봉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주변에서 나에게 봉사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면서 욕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스님이 봉사를 안 한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봉사 한 번 안 해본 스님이 신도들에게 봉사를 해라, 공덕을 쌓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선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서야 내 안에서 상을 내는지 어떤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고, 무주상보시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무주상보시를 하는 방법?

둘째. 흔히 보시를 하되 상에 매이지 않고 보시해야 그 보시가 무위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제대로 된 보시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무주상보시가 진정한 보시이고, 상에 얽매인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엇입니까? 상을 내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좋은 것 무주상보시가 아닌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구별하는 자체가 상을 내는 거예요. 이런 분별과 차별의 생각이 유루의 인을 쌓는 것이고 이런 생각으로 사는 것이 유위법의 세계에서 사는 겁니다. 

“무주상보시를 해야 진정한 공덕을 쌓는다고 했는데, 이런 생각이야말로 유루의 인을 쌓는 것이라니. 그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겁니다. 예전에 한 도인이 살았습니다. 제자가 찾아와서 도인에게 묻습니다. “상에 매이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인이 대답을 않고 제자를 가만 쳐다보다가 “같이 포행이나 가자.”고 합니다.

포행길에 큰 나무가지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본 도인이 그것을 가져와서 오전 내내 다듬어 지팡이를 만들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다시 포행을 나가는데, 마침 나이 많은 할머니가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도인은 할머니에게 지팡이를 주고 헤어졌습니다. 

종일 포행을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아침에 어떻게 하는 것이 무주상보시인지 물었는데 왜 저녁이 다 된 지금까지 대답을 안 해주십니까?” 도인이 말합니다. “내가 하루에 걸쳐서 대답을 해줬는데 너는 왜 못 알아듣는 것이냐?”

도인이 나뭇가지를 깎아서 노파에게 준 것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노파가 힘들게 걸어가니 없는 시간을 쪼개서 지팡이를 만들어 노파에게 줘야겠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저 노파에게 지팡이가 필요할 것 같아’ 해서 내게 있는 지팡이를 내어준 겁니다. 

무주상보시를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 필요할 만한 것을 주는 것. 저 사람에게 이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 물건을 주는 겁니다. 시간이 필요하면 시간을 주고,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상을 내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상을 내는 것입니다. 상을 내면 안 된다는 상을 내는 것도 아상에 빠지는 거예요. ‘진정한 보시’라는 말에 걸려서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공덕에 자성이 없어 준 바도 받은 바도 없는 것

한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참된 공덕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달마대사는 참된 공덕의 본질은 공적하다고 말했습니다. 공덕이라는 것 자체가 공하고 고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이죠. 만약 공덕에 실체가 있고 자성이 있다면 그 공덕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깨끗할 수도 있고 더러울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공덕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하고 고요합니다. 때문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줘도 그것이 준 것이 아니고, 누군가 나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줘도 내가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전라도에 가뭄이 들어서, 전라도에 비를 뿌리기 위해서 비가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는 그냥 오는 겁니다. ‘그냥’이라는 말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 따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그냥 산다’고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막 살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연 따라 산다는 말이지요. 

인연 따라 오고 인연 따라 가고 인연 따라 생하고 인연 따라 멸하는 조건생 조건멸. 이것이 불법입니다. 보시공덕도 그렇게 인연 따라 생하고 인연 따라 멸합니다. 그것이 무주상보시이지, 내가 가치를 부여해서 좋네 나쁘네 소중하네 맞네 틀리네 따지면 거기에서 번뇌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진리의 핵심이 확연무성이라 했습니다. 너무 확연해서 성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고요. 진리란 너무나 평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평상심이 도(道)다’라고 하지요. 

결국 보시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을 말할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실제로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경전에 나오는 시대의 사람들보다 보시공덕을 쌓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때문에 설령 유루의 인을 쌓는다 하더라도 일단 보시공덕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시대에는 봉사하면 주변에 소문 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열심히 봉사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내 안에 아상을 키우는지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그렇게 내 안의 아상을 깨달아야만 무주상보시를 할 수있는 실마리가 생깁니다. 그런 것 없이 책에 나오는 몇 구절 보고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 “나는 무주상보시를 알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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