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 속 화살 이야기
부처님 당시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과 듣지 않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비구들이여, 아직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으면 비탄에 잠기면서 매우 혼미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난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반대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되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오늘은 <잡아함경>에 나온 부처님의 법문을 가지고 마음의 상처라는 주제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육신의 상처, 세 가지 특성
첫 번째, 상처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혹이 나는 일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무릎이 까지거나 팔이 뚝 떨어져서 피가 나는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전가를 타고 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 피가 났다고 합시다. 바닥하고 내 무릎하고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에 상처가 난 것입니다.
상처는 반드시 뭔가 내지는 누군가가 나에게 액션을 취했을 때 나는 겁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상처는 절대로 자기 혼자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상처를 그대로 두면 2차, 3차 상처가 생깁니다. 세균이 옮아 파상풍이 생기는 둥 1차 상처와 다른 병이 걸립니다. 때문에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괜히 그 부위가 가렵고 긁고 싶습니다. 그러나 긁으면 덧이 납니다. 상처가 낫지 않고 계속 됩니다. 그렇기에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가만히 놔두어야 합니다.
이 것이 육신에 상처가 생겼을 때 우리가 취하는 행동입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상처가 나면 치료도 안 하고 간지럽다고 긁겠지만 상식적인 어른이라면 위 세 가지를 따릅니다.
마음에 상처에 대입해보면…
앞서 <잡아함경>에 나온 부처님 법문 중 한 구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괴로운 느낌’이라는 것이 첫 번째 화살입니다. 그 후에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된다는 것’이 두 번째 화살이 됩니다. 자전거의 경우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긁히고 피가 난 것이 첫 번째 화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예를 들면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파상풍이 걸린다거나, 치료를 한 후에도 간지럽다고 마구 긁어 상처가 덧난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내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육신의 상처로 대입하여 이야기 하면 육신에 상처가 났어도 잘 치료를 하는 것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육신의 상처에 대한 게 아닙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제 전공 분야도 아닐 뿐더러 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잠깐 이야기 드렸습니다.
두 번째 화살을 쏜 이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나와 가까운 친구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친구가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배신감을 느끼고 화도 날 것이고 세상 살 맛도 안 날 것입니다. 그런데 차마 면전에 대고 친구에게 이야기는 못 하겠고, 그럴수록 친구를 볼 때마다 어색하고 멀어지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자괴감도 들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첫 번째 화살은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소문. 내 귀에 들리는 말. 말 그 자체는 기분 나쁜 말도 없고 기분 좋은 말도 없습니다. 말 안에는 화가 나거나 슬프다는 속성이 없습니다. 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릇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감정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첫 번째 화살은 말 그 자체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분이 나쁘고 내가 화가 나고 내가 짜증이 나고 자괴감이 들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두 번째 화살입니다. 이런 두 번째 화살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똑같은 말인데 어떤 말은 불쾌한 감정이 들게 하고 어떤 말은 나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든다 이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은 그냥 말이되 내가 단지 그 말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겁니다. 감정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을 쏜 것은 누구입니까? 말을 뱉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첫 번째 화살을 보고 나 스스로 이렇다 저렇다 생각대로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아 저 사람이 옳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하고 끝나면 되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시비를 판단한 후에는 꼭 감정이 따라옵니다. 두 번째 화살은 그 말 속에 있는 뭔가가 아니고 내 감정입니다. 누가 만든 것입니까? 내가 만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인 이 지점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만들었다는 것 말입니다.
내 마음이 만드는 세상 그리고 상처
앞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 시점에서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도 첫 번째 화살인 괴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안 할 말로 모기가 물면 순간적으로 따끔하고 괴로운 느낌이 옵니다. 이것은 부처님도 똑같습니다. 부처님도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아 아프구나’ 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이 모기를 그냥! 저거 못 잡으면 잠 못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첫 번째 화살을 맞고 거기에 대해서 좋다, 싫다, 아름답다, 추하다라는 판단을 덧칠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이며 이것은 내가 만든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 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내 마음으로 보는 내 자식은 너무나 훌륭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 자식은 고만고만 평범한 사람입니다. 서로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내 마음이 그렇게 만듭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우리는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 99.9%는 두 번째 화살이 따라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이 만들어낸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마음은 화가와 같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린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화가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그리고 자기가 그린 세상에 심취합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릅니다.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법은 이 것이 두 번째 화살인가 첫 번째 화살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구별만 해내면 마음의 상처의 99%는 치료되는데 구별을 잘 못 합니다. 화가 났을 때 ‘참아야지, 참아야지, 내가 그래도 불자인데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화를 억누르는 것이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첫 번째 화살인지 두 번째 화살인지를 알기 위해서 잘 관찰해야 합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만든 마음 속 풍경을 꼼꼼하게 관찰할 것
예를 들어 화가 나는 상황이라면 화가 나는 내 마음 속 풍경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꼼꼼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는구나’, ‘뒷골이 당기는구나’, ‘내가 상대방에서 마음속으로 마구 쏘아붙이는구나’ 등등 화가 나는 내 모습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이것이 내가 만든 감정인지 밖에서 온 행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감정을 잘 관찰하면 내가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상처가 있다면 첫 번째 화살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인가에게 화살을 맞았지만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계기나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울화통이 치밉니다. 가족들은 내 눈치를 보고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짜증은 계속 나고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합니다.
이런 경우 내 자신을 관찰해도 첫 번째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화살을 맞은 겁니다. 화살을 맞은 당시에 화살을 제거하고 약을 바르고 치료를 했어야 했는데 그대로 방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자리에 화살을 맞습니다. 잊을만하면 또 화살이 날아옵니다. 쌓이고 쌓이니까 살짝만 건드려도 아픕니다. 그 전에는 주먹으로 때려야 아팠는데, 이제는 곪을 대로 곪아서 살짝만 건드려도 아프고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화살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첫 번째 화살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희미해진 첫 번째 화살을 뽑고 치료할 것
우리가 하는 큰 착각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두 번째 화살 즉 기분이 나쁘다,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행동은 첫 번째 화살입니다. 화가 난 것은 내가 만든 두 번째 화살입니다. 내 스스로 ‘화가 난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타인이 그렸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않으려면 내 그림을 내가 자세히 봐야 하고, 내가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화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안 보이다가다도 내 마음속의 풍경을 살피다보면 첫 번째 화살이 보이는 겁니다.
잘 관찰한다는 의미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참아야지’,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 풍경을 살핀다는 것은 화를 내는 내 마음을 그냥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화살을 찾아내어 뽑아내고 치료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까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긴 이야기를 모두 되새길 필요는 없고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내 마음은 화가입니다. 자기가 그려놓고 남이 그렸다고 남에게 책임전가를 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잘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끝으로 <화엄경>의 ‘야마천궁게찬품’ 중 한 구절을 합송하면서 법문 마치겠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도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