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당한 수행자인가?
신축년 오백대재 회향일입니다. 입재를 하면서 오백대재 기간만이라도 나는 과연 당당한 수행자인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평소에는 가족이나 이웃, 친지를 위해 기도하지만, 오백대재 기간 동안은 나 자신이 당당한 수행자인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말입니다.
당연히 지난 3주간 수행자로서 자기의 할 바를 다 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습니다. 도대체 당당한 수행자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과연 당당한 수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이번 기회에 올바른 수행자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정한 삶은 어떤 삶이냐고 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청정한 삶을 사는 이유는 고통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올바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팔정도를 올바로 닦고 익혀 팔정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고통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청정한 삶과 번뇌의 삶
청정하게 사는 것과 고통을 아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선뜻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청정하다는 표현을 쓸 때, 예를들면 ‘청정해역’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 바다는 오염이 되지 않은 바다라는 뜻으로 사용을 하지요. 청정하다는 말은 오염되지 않았다, 물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물들지 않은 것일까요? 뇌에 물들지 않은 것이 청정한 것이라고 불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왜 청정하다는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인가? 만약 지구상의 모든 물이 한결같이 짜다고 하면, 우리는 과연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닷물이 짜다는 걸 아는 이유는 민물이 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닷물은 염분에 오염이 된 것입니다. 물이 소금에 물들어서 짜다고 느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청정하지 못한 삶은 번뇌에 물든 삶,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물들지 않은 삶,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봐야만 중생들이 고통과 번뇌에 물들어서 살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자는 반드시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다른 수행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과연 수행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수행의 근본은 방일하지 않음이라 하였습니다.
방일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근본
방일하지 않다는 말은 게으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의 근본을 말씀하실 때 수행의 방법이나 사상이나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고 방일하지 않음을 이야기하신 것은, 게으르지 않고 방일하지 않은 것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뜻합니다. 수행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고 싶을 때는 열심히 하고 힘들 때는 잠깐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한결같이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수행의 근본입니다.
이어서 팔정도를 익히고 팔정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방일하지 않는 삶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수행자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팔정도를 닦고 익히고 팔정도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팔정도는 불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진 정념 정정. 불자라면 팔정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좀 곤란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몸으로 실천하려고 하면 몸에 익히고 있지를 못합니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입니다. 계,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고 정, 선정을 닦고 혜,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까지 완성되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계정혜 삼학 즉 불교의 기본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당당한 수행자는 어떤 사람인가?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쌓아서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사람이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팔정도와 계정혜 삼학
계정혜 삼학에서는 계를 지키고 선정을 쌓아서 지혜를 완성하는 순서로 이야기 하는데요. 팔정도는 지혜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계를 지키는 부분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선정을 닦는 순서로 전개됩니다. 정견과 정사는 말하자면 지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길을 나설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그곳으로 가려면 어느 경로로 가야 하는지를 우선 알아야합니다.
그곳에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이 어디에 있고 그곳에 가려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고 어떤 경로를 택해야 할지를 알아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반을 증득하려면 열반이라는 게 무엇인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제일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정견과 정사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율을 세 가지로 지킵니다. 몸으로 지키고 입으로 지키고 마음으로 지킵니다. 몸으로 지키는 건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는 악업을 하지 않는 것은 몸으로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입으로 계율을 지키는 것은 거짓말하지 말고, 꾸며진 말을 하지 않고, 두 말 하지 않고, 욕설 같은 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계율을 지키는 것은 탐심을 내지 않고 화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탐심과 진심(화)을 일어나게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악업을 짓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선업을 쌓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면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명경지수와 같이 세상의있는 그대로가 훤히 보이게 됩니다. 그럴 때만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실상의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거칠고 항상 파도치면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법을 이야기하고, 내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악업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이 세상의 올바른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 연기실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 선정을 닦습니다.
절에 와서 기도를 하고 좌선하고 경행하고 사경하고 절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정을 닦아야만 비로소 지혜를 완성하여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의 경지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나를 돌아보는 오백대재
다시 묻겠습니다. 당당한 수행자는 어떤 사람인가? 첫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일매일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읽고 마음속에 새기는 사람이 당당한 수행자입니다다. 이 사람이 바로 지혜를 실천하는 수행자입니다.
두 번째는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매일매일 몸으로 악업을 짓고 있지는 않은가. 입으로, 마음으로 짓고 있지 않는가 성찰해야 합니다. 하루에 십 분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한 수행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팔만대장경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팔정도로 귀결됩니다. 팔정도는 다시 계정혜 삼학으로 귀결됩니다. 게으르지말고 열심히 수행하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유언처럼 당당한 수행자는 방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사람이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이번 3주간의 오백대재 기간 동안 가슴 깊이 명심을 했습니다. 내년 오백대재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당당한 수행자로서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