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잘 내는 사람, 화를 못 내는 사람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화를 잘 내는 사람, 두 번째는 화를 못 내는 사람. 중간은 없습니다. 딱 두 가집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나는 화를 잘 내는 게 문제예요.’ 혹은 ‘나는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낼 수가 없어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은 화를 잘 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못 내는가? 못 내는 게 아니라 낼 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성장 환경 등을 이유로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인데도 화를 못 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화가 마음속에서 곪고 곪아서 마음의 병이 됩니다. 소위 말해서 홧병이 나면 정신병원에 가야 합니다. 치료를 받아야해요.
얼마 전 어떤 분과 고민상담을 했는데 그분이 이런 케이스였습니다. 민원 담당 공무원인데 화를 못 내는 사람인 겁니다. 요즘은 공무원을 3D업종이라고 할 정도로 특히 민원업무는 서로 싫어서 안 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민원을 넣으니까 화가 나죠. 보통 사람들 같으면 화를 참아낼 수 없으니까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화풀이하거나 자기만의 노하우로 혼자 풀거나 하는데 이 분은 화를 못 내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병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 휴직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화를 못 내는 경우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화를 잘 냅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 중에서도 화가 나면 굳이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여건 혹은 자기가 처한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후자에 속하지요. 화가 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나, 이런 경우입니다.
일상에 스며있는 화, 짜증, 스트레스
‘나는 화를 낼 일이 별로 없는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있는 ‘화’는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짜증, 스트레스를 포함합니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중대한 상황이 아니고요.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서 제가 얼마 전에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귤을 사왔습니다. 특정 품종이라고 하는데 귤 속살과 껍질이 붙어서 잘 안 까지는 겁니다. 억지로 떼려고 하면 즙이 줄줄 흘러서 손에 다 묻어버리고요. 귤 하나 먹자고 이게 뭔 고생인가 싶은데 먹으려고 사왔으니까 그래도 까야지요. 처음에는 그런 줄 몰랐으니까 그저 당황할 뿐이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귤을 먹으려고 생각하면 슬슬 속에서 짜증이 나는 겁니다.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냥 둘 수 없으니까 먹으면서도 짜증을 내는 거예요.
귤 3개를 그렇게 먹고 마지막에 남은 귤 껍데기를 책상에 올려 뒀습니다. ‘이 귤은 정말 특이한 놈이다. 이건 안 버리고 두고두고 보면서 명심을 해야 되겠다.’ 하고요. 그렇게 귤 껍질을 3주 이상 책상에 두니까 바짝 말라서 돌처럼 딱딱해졌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분노나 아주 사소한 짜증은 몇 시간 지나고 나면 기억도 안 나는데요. 역설적으로 이런 사소한 분노와 짜증이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화를 많이 내면서 살아갑니다.
저 같은 경우는 화를 다스리는 문제 때문에 출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출가 전에는 어떤 분노, 마음속에 응어리진 화, 풀지 못한 어떤 것이로 인해 항상 화가 나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있더라고요. 항상 화가 나있는 상태로 살다 보니 사람들하고 부딪치고 충돌하게 됐지요. 뜬금없는 상황에서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상황이 생기니까 ‘도대체 사는 게 무엇인가.’ 이런 고민도 하게 되고요. ‘에잇 출가나 해야되겠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가는 거예요. 어쨌든 화라고 하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들을 힘들게 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3단계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화를 다스릴 수 있는가. 제가 보기에는 3단계가 있습니다. 이 세 단계를 잘 밟아서 가면 화를 반드시 다스릴 수 있습니다.
- 화를 윤리적인 잣대로 대하지 말라.
-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려라.
- 화의 실상을 정확히 알라. (분노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라.)
이 3단계만 잘 거치면 화를 안 냅니다. 화가 나도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안 냅니다. 화가 안 나면 괴로울 일이 없지요.
화를 윤리적인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대부분의 중생들은 인간성이 착해요. 자기가 화를 내고 자기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반성합니다. ‘내가 화를 내면 안되는데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야.’ ‘내가 또 다른 사람한테 화를 냈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참아야 하는데 왜 화를 냈을까?’
‘화’를 죄와 선악으로 평가하지 않기
이것은 화라고 하는 것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즉 죄가 되느냐 안되느냐, 선하냐 악하냐, 이런 잣대로 화를 재단한다는 겁니다. 우리 대부분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합니다. 화를 참다 참다 화를 내고, 그렇게 화를 내는 자기 자신이 못마땅하고 불만스럽고 그래요. 일종의 죄의식이죠.
기독교를 험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왜 그런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기독교 이야기가 나오게 되네요. 기독교는 ‘죄’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합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죄를 빼면 종교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인간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죄로써, 선과 악으로써 평가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나누기를 좋아하는가?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남이 어떻게 볼까’, ‘저 사람의 저런 행동이 과연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이런 판단을 수백만 년 동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속에 선악에 대한 판단이 심어진 겁니다. 만약 인간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혼자 생활하고 혼자 죽는 동물이라면 선악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혼자 내 맘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악판단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불교의 관점, 고통의 관점
이러한 판단을 필요한 부분에서만 해야 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서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화를 내면 안되는데 냈다’, ‘화를 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나쁜 사람이다, 자격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화를 윤리적인 판단으로 재단하는 것입니다. 이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반면 불교는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빼면 성립이 안 되나요? 고통입니다. 불교는 고통을 빼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왜 출가를 했습니까? 생과 사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다, 출가를 해서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영원히 사는 길,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은 거예요. 너희들도 이렇게 살면 영원히 행복하게, 고통스럽지 않게 살 수 있다. 이게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를 대할 때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관점으로 화를 대해야 되겠습니다. 화라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행복하게 하는가? 고통스럽게 하면 멀리하고, 행복하게 하면 가까이 해야 하는 거죠. 물론 행복이라는 게 일시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편 요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화를 무조건 참는 것은 안 좋아.”,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해.” “자기 감정에 충실해야 해.” 하는 이야기요. 자기계발이나 명상, 힐링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종종합니다.
그런데 화는 그래도 안 내는 게 내는 거보다 낫습니다. 참더라도 안 내는 게 나아요. 불교에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 10년동안 열심히 수행을 해도 한번 화를 내면 10년동안 수행한 수행의 공력이 다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만큼 화를 내는게 개인의 마음에 안 좋다는 겁니다. 차라리 참고 내가 좀 고통스러운 게 낫지요.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발산하라, 자기 감정에 충실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화가 난다고 해서 주변에 화를 내면 주변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화에 전염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화를 고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스려야 합니다. 고통의 관점, 번뇌의 관점에서 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화는 연기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려야 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화는 감정이라는 거죠. 기뻐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짜증내고 괴로워하고 심심해하고. 이런 것들이 다 감정입니다. 불교에서는 감정과 논리적인 생각을 따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다 마음으로 봅니다. 화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에요. 내가 만들어낸 감정이에요. 이유가 뭐가 됐건 내가 만들어낸 감정이에요.
똑같은 상황인데 화를 낼 때도 있고 안 낼 때도 있습니다. 만약 화가 내 감정이 아니고 밖에 있는 실체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안되잖아요. 근데 내 마음, 내감정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가 안내기도 했다가 합니다.
화가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이걸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화가 났지만 내가 참으면 되는 거지. 내 마음먹기 나름이야.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이건 불교가 아닙니다.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화를 내게 만드는 여러가지 인연들이 있습니다. 그 인연 중 하나에 나의 이런저런 심리상태도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 많은 인연들이 결합되어 어떤 순간에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 인연들을 무시하면 안돼요. 예를 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정책이라던가 잘못된 제도, 기업의 불합리한 관행 같은 것들은 고쳐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다 대고 ‘분노는 내 감정이니까 잘 다스리면 돼.’라고 해서는 안되죠.
흔히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그 상태를 잘 알아차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알아차리면 어떻습니까? 화가 더 나요. 그냥 신경을 안 쓰면 좋은데 끝나고 나서 다시 내 마음을 바라봐야지 하면 화가 더 납니다. 이게 우리 중생들입니다. 화가 나는 자기 마음 상태를 올바르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인데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의 힘이 생기려면 우선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됩니다.
화의 감정에 자비의 감정으로 대응하기
이때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화가 난다는 감정을 남에게 퍼붓는 게 아니라 내감정을 정반대되는 감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겁니다.
대부분 우리는 어떤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납니다. 화가 나면 나도 모르게 화를 유발시킨 대상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화를 막 퍼붓습니다. 그 대상이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말 안 듣는 자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요. 내 감정을 가지고 남에게 퍼붓지 말고요. 정반대되는 감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화의 반대 감정은 자비심입니다. 나의 분노의 화살이 향하는 그 사람에게 자비심을 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안됩니다. 일부러, 억지로, 마음에 없어도, 하기 싫어도 그런 감정을 스스로 일으켜야 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희한해서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끄집어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 존경한다 하면 진짜로 내 안에 있는 분노의 감정이 수그러듭니다. 실제 해보면 그렇습니다.
제가 원래 화를 아주 잘 내는 사람이에요. 오죽하면 화 때문에 출가까지 했겠습니까. 이날 때까지 저의 화두는 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제가 터득한 방법이 이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마음이지만, 가짜 자비심이지만 그게 분노의 감정을 사그라지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을 집중해서 관찰하는 겁니다.
당장 화에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유튜브라도 보면서 세상만사 다 잊고 웃는 게 낫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명상 공부 좀 했다고 해서 화가 치받을 때 자기 마음을 알아차림한다고 하면 병나기 십상입니다.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 가짜 자비심이라도 내어서 억지로 화가 나는 대상에게 자비심을 보내야 합니다. 남들이 가식적이라 하더라도 무슨 상관입니까? 가식적인 게 맞지요.
중요한 것은 감정을 감정으로 다스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자비심이라는 행복한 감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마음의 실상을 알기
이렇게 해서 마음을 잘 다스렸다고 합시다. 화가 나는 대상이 눈에 안 보일 때는 마음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에는 자비심을 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현실의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잘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세 번째 단계, 화의 실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할 때, 저 사람이 없으면 미워하는 감정도 없습니다. 저 사람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니까 나의 분노의 화살이 쏟아지는데요. 그 사람이 없으면 분노의 감정도 없죠.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게 불교적인 접근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분노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화를 내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착각이 바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 눈 앞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는 말을 쓸 때, 실제 비라는 것이 내 앞으로 다가옵니까? 아닙니다. 비가 오는 상황을 보고 ‘비가 온다’고 그냥 말하는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물방울 하나하나를 모두 비라고 하나요? 아닙니다. 그 상황을 보고 비가 온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저런 조건들이 맞아서 생겨나는 특정한 상황입니다. 인연이 갖춰지면 이런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고 인연이 바뀌면 저런 상황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있다’는 것은 잠깐 이런저런 인연들이 딱 맞아들어서 무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비가 있어서 비가 오는 게 아니고 비가 오니까 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는 게 중요한 것이지 비가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단지 조건과 상황이 있을 뿐
이 말은 우리한테도 적용됩니다. 화가 난다, 괴롭다, 우울하다 하는 것들이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있어서 어떤 때는 기쁘고 어떤 때는 슬픈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거짓말하고 짜증내는 그 감정을 두고 나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비가 오는 인연의 조합을 두고 비가 온다라고 말하듯이, 이런저런 감정들을 편하게 말해서 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분노의 상대방에게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는 이런저런 상황들이 존재해서 화가 나는 겁니다. 화가 나는 조건과 인연이 바뀌면 화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현대인,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약간씩은 화가 나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때문에 외국에 나가지 못합니다만, 과거에 다른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을 때를 상기하면 그런 것이 더 잘 느껴집니다. 다들 바쁘고요. 말도 빨리 하고요. 다다다 쏘아붙이고요.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늘 이야기한 화를 다스리는 3단계를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 이 3단계를 적용해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