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사회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춘 세상에서 자연은 스스로 자정하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고 효율에서 위기대응으로 전환하는 것은 소극적인 대처법이다. 일상생활, 생활 습관, 인류문화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종식에서 온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서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의 태도를 길어올려보자.

#공동체, 자연, 코로나, 희망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유럽, 미국, 남미, 동남아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때문에 멈춰 섰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혜민스님의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제목처럼 코로나19가 우리 인류사회를 잠시 멈춰 세운 가운데 무엇이 보이는가 생각해봅니다. 두 가지가 보입니다.

코로나로 멈춘 세상이 보여주는 모습, 자연의 회복

첫 번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잠시 멈추니까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야를 잠깐 밖으로 돌려 자연을 보면 다릅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올해 봄만큼 공기가 깨끗했던 적이 없습니다. 미세먼지는 말할 것도 없고 황사조차도 안 옵니다. 뉴스에 소개되기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전면 통행금지가 되고 나서 운하가 깨끗해져 돌고래가 올라왔다고 하고요. 인도 북부의 어느 해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바다거북 80만 마리가 올라와 산란을 했다고 합니다. 인류사회가 잠시 멈추니까 자연은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코로나19로 잠시 멈춘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의 영향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거주지 확대로 인해 야생동물이 살 곳이 점점 줄어드니까 동물생활영역과 인간생활영역이 겹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경험 못했던 야생동물 속에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사스고 메르스고 올해는 코로나19입니다. 박쥐를 통해서 천상갑이라는 동물을 중간숙주로 하여 발생했다는 설이 주장되지만 결국 코로나19의 발생 원인은 생태계가 파괴되어 동물과 인간의 주거가 뒤섞이다보니까 발생됐다는 겁니다. 코로나19의 원인은 생태계 파괴다 라는 것이지요.

최근 전지구상에서 홍수, 태풍, 가뭄, 산불, 기근, 기아, 물 부족 등 이상기후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하고 코로나19하고 따지고 보면 원인이 같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니까 자연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반응을 하는 겁니다.

지구를 괴롭히는 바이러스는 인간?

코로나19의 원인이 생태계 파괴에 있다고 하면 이런 질문이 뒤따릅니다. 생태계를 누가 파괴했는가? 인간입니다. 언론에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고 하지요. 코로나19야말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7,000년 이상 존속해온 인류 문명이 만든 인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코로나19바이러스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지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인간이 지구의 바이러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인간이 그동안 자연의 희생을 담보로 인류문명을 이끌어 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은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다. 한 지역에서 모든 자원 초토화시키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또 초토화시킨다.’ 코로나19는 지구 입장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한, 인간이라는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한 백신일 수도 있습니다.

증심사에서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발원을 하고 있습니다만, 발원문의 핵심은 인간들이 지구에 못할 짓을 많이 하여 깊이 참회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구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이 시기에 사실은 인류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인류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 두 번째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끊임없이 환경 생태계를 파괴하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탄산가스 배출해서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지구를 뜨겁게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루에 이만큼씩 바다를 더럽혀야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를테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장마철에는 홍수가 나고 가을에는 태풍이 불어 일 년 곡식이 피해를 입는 이런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그 결과 우리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더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거를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 살아야 삶을 유지하고 가족을 챙길 수 있고 사회가 유지됩니다. 생태계가 파괴되니까 원시시대로 돌아가자고 할 수 없습니다.

작금의 사태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인간사회는 마치 달리는 자전거와 같습니다. 잠시 멈추면 쓰러져요.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밟다가 가만히 있으면 처음 얼마동안은 가지만 속도가 느려지고 자전가가 막 흔들리다가 결국 쓰러집니다. 인간사회도 같은 겁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경제, 문화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멈추자 인류사회라는 자전거가 비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목숨과 경제 등으로 타격 받고 있는 거죠.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은 인간사회

코로나19로 인해 두 번째 보이는 것은 인류 사회는 마치 달리는 자전거와 같다는 겁니다.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사회는 계속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사회입니다. 마트에 가면 먹을 게 있고 병원에 가면 치료를 해주고 교외로 나가면 아스팔트가 포장된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계속 노력해서 유지되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브 법회도 누군가 카메라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중계를 하는 등 숱하게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나는 환경오염을 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집에 버스를 타고 가면 버스가 배출하는 매연이 대기를 오염시키는 것이고, 나도 대기오염에 일조하는 거예요. 이렇게 사회가 굴러왔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가 사회를 잠시 멈춰 세워서 던지는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실은 바이러스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태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 업으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고요. 두 번째 의미는 우리 인간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더라 이겁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젠가는 코로나19를 잡는 백신이 나올 것이고 백신이 나오면 전세계적인 혼란은 종식될 겁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라는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코로나19와 같은 것이 계속 나올 겁니다. 코로나19 이전에 메르스, 사스, 에볼라가 있었고 에볼라 이전에 에이즈가 있었고, 그 이전엔 천연두, 페스트…. 사실 그동안 최근 몇 십 년 동안 인류사회가 큰 시련이 없이 살다보니 전염병이 우리 삶과 전혀 관련 없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제2, 제3의 코로나19가 계속 찾아올 거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거죠. 이제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첫째, 코로나19로 인해서 4차 산업혁명이 촉발될 것이기에 우리나라도 4차 산업혁명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계에서도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도 전염병은 계속 찾아올 것이니까 이제는 우리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혀야 할 것이라고요. 예를 들면 원격 의료나 원격 수업,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온라인 쇼핑, 택배 등 이런 식으로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식이 바뀔 거고, 그 방식에 맞게 다양한 산업과 직군이 생길 것이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조금 투자해서 많이 버는 효율성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얼마나 위기 대응을 잘 하는가에 대한 의제로 우리 사회의 체제가 정비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효율이 아무리 좋아도 전염병이 한번 돌면 말짱 도루묵이 되니까요.

일상, 습관, 문화… 완전히 바꿔야 산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들은 소극적인 대처입니다. ‘모여 있으면 위험하니까 모여 있지 말자, 대신에 얼굴 안 보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 하는 것은 적극적인 대처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에볼라 이후로 생겨난 바이러스들이 야생동물과 인간의 빈번한 접촉 때문에,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여 초래된 것이라면,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당장의 과제로 간절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문제를 절실한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그래 더 이상 화석에너지로 인해서 지구생태계가 파괴되는 일이 없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게 무언지 다시 생각해봅시다. 나는 환경을 파괴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고, 그러면 현실은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일상생활이나 습관, 문화 이런 것들이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들이 바뀌어야만 사회 전체적인 시스템이 바뀌어서 생태계를 지킬 수 있는 겁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걸쳐서 호주에 엄청 큰 불이 났었잖아요. 지금은 큰 비가 몇 번 와서 꺼졌지만 호주 대륙의 10억 마리 동물이 죽었대요. 10억 마리의 동물이 죽은 호주는 더 이상 예전의 호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호주인들은 그 산불로 기후변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답니다. 단순히 전기, 수소 자동차를 타고 쓰레기를 덜 버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호주대륙이 산불로 다 타버린 거예요. 그래서 호주에서는 우리들의 생각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생활습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답니다.

셋째, 행복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이 선망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니까 그 선망의 대상이 지옥이 되어버렸어요. 코로나 사태에 크루즈 유람선 사례가 보여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예전에 살던 방식으로 나도 모르게 돌아가게 됩니다.

며칠 전 코로나19 방역활동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사찰요리 도시락을 싸가지고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증심사와 자비신행회가 같이 했습니다. 도시락을 싸는데 그 도시락 용기가 다 일회용 플라스틱이었어요. 물론 지금 시점에서 그 이상의 대안이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시락을 싸면서도 조금 뭔가 마음 한구석이 꺼림직한 겁니다. 방역하는 분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고, 아무 조건 없이 무주상보시하는 좋은 일인데 마음이 찝찝해요. 왜냐하면 코로나19가 왜 생겼냐 했을 때 환경오염이 있고, 일회용 플라스틱이 환경오염에 크게 일조하고 있는데, 또 일회용을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는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코로나19 이후 우리 인류의 삶이 그나마 지속가능한 삶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행복은 고통의 완전한 종식… 다시 새기는 ‘무소유’

코로나19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 번째는 화석에너지가 아닌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써서 지구환경을 오염시키지 말자는 거고요, 두 번째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생태계를 파괴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 세 번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달라이라마 존자도 이야기 했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크루즈 타고 했는데 코로나에서 확인했듯 그것이 행복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제는 우리 삶의 목적인 행복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번뇌라고 하는 고통의 완전한 종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나도 모르게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아직 살아 계셨다면 당신의 무소유 정신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조했을 겁니다. 하여 지금 다시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글을 인용을 하면서 오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가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우리를 얽어매게 될 때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이 글을 쓴 게 1970년대입니다. 인류가 그 때 법정스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무소유 정신을 실현했다면 지금 이런 모습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불자들은 이 말씀 깊이 새기고 코로나19 이후에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봉행되는 코로나19 기도에 임할 때, 가족과 사회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참회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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