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 해설 3. 참회하는 이유

천수경의 후반부는 참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에서는 계율을 어긴 죄와 탐진치로 인하여 악업을 쌓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악업이란 무엇인가?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다.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업이다. 천수경에서는 독송하는 ‘내’가 관세음보살의 입장에서, 불보살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 중생심으로 지은 모든 업을 참회하며 여래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발원한다.
중생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기도하는 것이 힘들 때, 천수경의 구조를 다시 한 번 헤아려보며 거꾸로 톺아보기를 권한다. 불보살이 되어, 한 발짝 떨어져 중생심을 지켜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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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장구대다라니 진언 이후에는 참회에 대한 내용들이 이어집니다. 왜 천수경에 이처럼 참회하는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는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잘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성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죄가 없다면 참회를 할 필요도 없지요. 그렇다면 과연 죄란 무엇일까요?

사회적 의미의 죄, 불교적 의미의 죄

죄는 어떤 기준이나 틀, 규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준이나 규칙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와 같이 소소하더라도 내가 정한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 남들은 모르지만 스스로는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만일 모시는 부모님의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합시다. 매일 요양병원에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못 갔다면 마음으로 큰 죄의식을 느낄 것입니다. 법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를 잘 봉양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에 비추어 잘못한 경우입니다.

가령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병세가 악화되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없어서 회사 돈을 잠깐 융통해서 쓰고 나중에 채워놓는 겁니다. 법을 어긴 명백한 범법행위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죄라고 하는 말은 내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사회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사회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등 다양한 경우에 사용합니다. 죄, 그리고 나아가 법을 어겼을 때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죄는 아닙니다.

계를 어기는 죄, 탐진치로 악업을 쌓는 죄

불교에서 말하는 죄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죄와 비슷합니다. 앞서 말했듯 어떤 기준이나 규칙, 틀에서 벗어났을 때를 말하는데, 다만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부처님이 정해놓은 계율입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하고 계율에 따른 벌칙 조항을 만들어두었으므로 불교에서는 계율을 어기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근본적인 죄도 있습니다. 천수경에서 말하는 죄가 이에 해당하는데 중생심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들,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죄라고 합니다. 성내고 어리석고 욕심내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악업이 되고 악업은 결과적으로 수행에 방해가 되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악업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올까요? 천수경의 참회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세월 제가지은 모든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이제 모든죄업 참회합니다.

탐진치가 원인이 되어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하는 신구의 삼업으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회게에 이어 참제업장십이존불이 나옵니다. 열 두분의 부처님들이 모든 업장을 참회하는 것을 증명해달라는 구절입니다. 십악참회는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열 가지 죄를 참회한다는 것이고, 그 이후에 나오는 게송에 참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랜세월 쌓인죄업 한생각에 없어지니 마른풀이 타버리듯 남김없이 사라지네.

죄의자성 본래없어 마음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함께 없어지네.

모든죄가 없어지고 마음조차 사라져서 죄와마음 공해지면 진실한 참회라네.

이번 생뿐만 아니라 숱한 생에 걸쳐 지은 악업들이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자성이 없어서 마음 따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죄는 본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사라집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죄도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의 본질은 중생심으로 행한 모든 업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심을 털어버리고 보살심으로 마음을 가득채운 순간 죄는 모두 사라집니다.

참회하는 것은 악업을 씻고 공덕을 쌓기 위함

우리가 생각하는 죄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죄를 지으면 경찰이 출동하고 재판을 받아 형을 구형받고 감옥에 가서 형을 사는 것을 생각힙니다. 이것은 죄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일반적인 죄의 틀을 가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죄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죄는 악업입니다. 수행에 방해되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동이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하므로 죄가 됩니다. 반면 수행에 도움이 되고 깨달음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는 행동은 죄를 없애고 공덕을 쌓아서 하루빨리 열반을 증득하게 합니다.

참회하는 것은 죄를 씻어내기 위함이요, 죄를 씻어내는 방법은 선업을 쌓는 것이고, 선업을 쌓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므로, 공덕을 쌓으면 당장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인연이 도래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공덕 없이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공덕을 쌓아야 그에 합당한 과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회를 합니다.

보살인 내가 중생심으로 악업을 쌓았음을 참회

천수경의 핵심인 신묘장구대다라니 앞에서는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고 귀의함을 선언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뒤에는 참회가 따라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는 이 스스로가 잠깐 관세음보살님이 되어 관세음보살님의 말과 행동으로 주력을 했는데 내 자신을 돌아보니 나 자신은 중생입니다. 욕심내고 집착하고 미워하는 중생심에 찌들어 있는 내가 부끄럽고 중생으로 짓는 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고 나서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참회에 이어 준제보살을 찬탄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준제관음은 힌두교에 있는 신을 불교가 받아들인 형태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많이 접하는 보살님은 아니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공통된 점은 ‘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는 칭호에서 엿볼 수 있는데, 구지(俱胝)라는 말이 숫자를 세는 단위인 억을 뜻하므로 이를 풀이하면 준제보살이 7억 분의 불보살님들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천수경에서는 발원을 하기 전에 모든 불보살님들을 대표하여 7억 부처님들의 어머니인 준제보살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참회를 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질문이 따릅니다. 그래서 참회를 하고 나면 여래십대발원문과 사홍서원과 같은 원을 세웁니다. 발원이라 함은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욕심은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열심히 참회를 하다 보니 지금 내게 보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보살심을 채우고 싶다고 욕심내는 것, 그것이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발원인 것입니다.

여래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발원하기를

발원을 할 때 축원문에서는 개인의 발원을 하고 사홍서원에서는 모든 중생들이 나의 수행공덕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기를 발원합니다. 천수경에서는 개인의 발원이 아니라 내가 여래가 됐을 때의 발원을 합니다.

다시 한 번 천수경의 순서를 되짚어봅시다.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고 나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며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런 마음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을 하고 나니 중생심에 찌든 내 모습이 부끄러워 깊은 죄책감으로 참회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래의 마음, 보살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찬탄으로 시작합니다.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그 이후에 모든 과정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천수경 수행 팁, 천수경 거꾸로 보기

그런데 현실에서는 엄청난 믿음을 줄만한 영험담을 실제 경험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천수경을 거꾸로 보기를 권합니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나의 현실에 비추어 나에게 무엇이 불만족스러운가를 돌아봅시다. 나 자신을 관찰하여 헤어나올 수 없는 번뇌의 굴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즉 발원이 생깁니다.

발원을 세우고 나서 이 세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범했던 잘못된 행동이 너무나 많을 겁니다. 알게 모르게 나 자신과 세상을 힘들게 했구나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참회하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찾다보면 불보살님의 삶이 좋은 예시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곧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의하려고 해도 중생으로서 살아온 업이 너무나 크므로 부처님께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일을 한 당신을 닮고 싶다, 따라 가고 싶다고 외치는 것, 그것이 바로 찬탄입니다.

불교가 발전했던 인도사회는 종교가 일상이었습니다. 수많은 신들이 일상에 녹아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21세기의 현실에서는 종교가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존의 경전에 역순으로 접근하여 불보살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키워나가는 것도 한 가지 신행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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