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3

요즘 감각으로 설명하는 ‘참선의 선결요건’.
인간은 공간적으로 사고한다. 시각으로 정보의 70% 이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도, 감정도, 생각도 공간적 사고 패턴으로 받아들인다.
참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 한다. ‘있는 그대로’는 인식된 세계, 허상, 말로 표현되는 세계 너머에 있는 실상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식을 통해 실상을 인식하는 데에 오류가 있다는 거는 아는 것이다. 나의 인식 패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생각의 전환 그 자체이다.
공간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며, 그 수행의 방식이 화두를 관하는 것이다. 화두를 관하는 간화선른 다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로 바로 가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사고 패턴을 깨부술 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자성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연기실상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이고, 참선의 목적에 다름 아니다.

#간화선, 경전, 참선, 참선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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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설명하는 ‘참선의 선결조건’

지난 강의에 1장 ‘참선의 선결조건’ 챕터를 공부했습니다. 17쪽에서 30쪽 사이 이 분량에 참선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오랜 시간 앉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테크닉적인 부분은 빠져있지만, 참선을 왜 하는지와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등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이 부분 ‘참선의 선결조건’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 머리속에 체계가 잡혀갈 것입니다. 오늘은 1장 부분을 부연설명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내용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책의 설명은 불교적 용어, 불교 고유의 표현방식, 예전의 표현법으로 이뤄져 있는데요. 참선 그 자체에 국한된 표현을 하다보니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이번 시간에는 현대적 표현으로 풀어서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해당 부분을 설명해볼까 합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우리

요즘의 감각으로 참선을 설명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을 봅시다.

‘20대 시절 생각을 하면 아득히 멀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문장 자체는 평범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0대라는 시간을 생각하는데 ‘아득히 멀리 있다’는 공간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공간적인 표현은 눈으로 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런 표현을 자연스럽게 씁니다.

왜 우리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현할까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감을 통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피부로 접촉하고 혀로 맛봅니다. 그 중 가장 지배적인 것은 눈을 통하는 시각입니다. 시각이 70% 이상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시각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지배적인 인식이 시각을 통해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을 할 때도 공간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인식을 공간적으로 하다보니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고도 공간적으로 하는 것이지요. 시간은 공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공간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식은 시각이고 시각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 문장에서 초점을 ‘아득히 멀리’에 맞추면 공간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아득히 멀리 ‘있다’는 표현에 초점을 맞춰봅시다. 그 어디에도 나의 젊은 시절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가령 어제의 나는 어디에 존재합니까? 생각해보면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의 나는 지금 현재의 나이지 어제의 나는 아닙니다. 어제의 나, 20대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달리 말해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공간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만 공간적으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 생각, 마음까지도 공간적으로 생각합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은 내 안의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안의 어딘가’라는 표현 자체가 공간적 사고 패턴을 나타냅니다.

공간적 속성을 가진 ‘있다’는 개념

‘있다’라는 문제로 돌아가봅시다. 결국은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서양철학은 크게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나뉘는데요. 존재론은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추구하는 것이고 인식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있음이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있다’는 표현 자체가 공간적인 사고방식을 전제로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다, 저기에 없다, 이런 식의 표현은 공간적인 사고를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존재론 혹은 인식론적인 사고를 할 때 공간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입니다. 나는 여이게 있고, 저것은 저기에 있다는 것이지요. 무언가가 있다고 할 때,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나는 인식하는 주체이고 저것은 인식당하는 객체가 됩니다. 이렇게 주체인 나와 객체인 대상은 공간적으로 분리됩니다. ‘저것이 있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나는 여기에 있고 저것은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있다’는 표현은 공간적 속성입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있다’라고 표현할 때 실제로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저기에 무언가를 인식하는 순간 저것이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있다는 표현은 ‘저기에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이름, 생각, 내가 인식하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이고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고 말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화두’는 말의 머리입니다. 말은 곧 생각입니다. 말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화두는 생각의 머리입니다. 머리는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입니다. 그것이 화두입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을 보는 것이고, 내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있다’는 것을 규명할 때 그것은 생각이고 말이고 이름에 불과합니다. 노자는 이야기하기를 도가도 비상도라 했습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 인식 속에 들어온 그 무언가, 내가 생각으로 이미 정리한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이름이 부여된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도는 내가 인식하기 이전에,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 무엇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식 속에 들어온 허상은 실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 “영혼이 존재하는가?” 물었을 때 침묵으로 답하신 것입니다.

참선이다, 명상이다, 깨달음이다 하는 것은 공간적 사고 패턴을 지양하고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선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참선요지>의 첫 번째 문장으로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성을 보는 것이고, 자성은 너와 내가 나눠지지 않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인식되기 이전, 즉 주체와 객체로 나눠지기 이전의 그 무엇이 자성이고 실상이라는 말입니다. 인식되어서 생각 속에 들어와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허상입니다.

참선은 허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허상으로 완전히 뒤덮혀 실상을 보지 못하니 그것을 깨뜨려서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가는 방법을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공간적 사고 패턴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참선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있는 그대로’란?

이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참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와는 어떤 관계일까? ‘지금 이대로’와는 어떤 관계일까? 그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잠깐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모두의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만 행복한 것은 일시적 행복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야 영원한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항상 행복한 세상을 바라는 것, 그런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꿈꾸는 진보적 가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 ‘지금 이대로’라는 표현은 보수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이 과연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와 같은 것이냐는 부분을 생각해봅시다. 먼저 ‘있는 그대로’가 인식이 된 세계, 허상, 말로 표현할 수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인지 그 너머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인지를 우선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있는 그대로’는 인식된 세계, 허상, 말로 표현되는 세계 너머에 있는 실상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있는 그대로’의 반대말은 ‘바라는 대로’나 ‘지금 이대로’라기보다 ‘인식하는 대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하기 이전부터 인식하는 것과 무관하게 본래부터 있는 그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허상을 넘어 실상을 본다는 표현을 쓸 때, ‘넘어’라는 표현 자체가 공간적인 표현입니다만, 기존의 인식을 통해 실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오류가 있다고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부여하고 손으로 만지는 현상 세계가 따로 있고, 그 이면에 시계를 시계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나 본질이 있다고 나눠서 생각합니다.

공간적 인식 패턴, 잘못된 인식 패턴을 깨닫는 것

그러나 간화선, 참선에서 추구하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허상과 겉으로 드러난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언가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내지는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허상과 실상이 없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나의 인식 패턴 자체가 잘못되었구나 라는 생각의 전환을 일으킬 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이대로’라는 표현과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범주가 다릅니다. ‘있는 그대로’는 ‘인식하는 대로’의 반댓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진정한 행복의 실현은 생각의 전환을 통해 추구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전환은 가만히 있다가 확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획기적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화선에서는 돈오돈수, 돈오점수라고 표현합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불교식 표현은 생각하는 나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패현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이러한 생각의 근본적인 전환이 지혜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10원짜리 동전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앞쪽에서는 숫자 10이 보이고 반대쪽에서는 다보탑이 보입니다.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인 것입니다. 개인의 수행적 측면에서 불교의 핵심을 보면 지혜를 밝히는 것이고,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자비심을 향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이뤄내면 그 것이 일심동체가 됩니다.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내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나눠지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보도록 생각의 전환이 이뤄진 상태에서의 사회적 실천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지혜와 자비는 하나입니다.

공간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참선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참선해야 합니다. 참선을 왜 하는가? 허운스님이 분명하게 밝혀놓았습니다. “내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이 참선의 목적입니다. 성품을 보는 것은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실상을 보는 것은 인식된 세계, 말로 표현된 세계, 생각의 세계 이전의 세계를 체험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참선의 전제조건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 공간적 사고 패턴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생각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기실상이라고 말하는 그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사고의 방식과 패턴을 완전히 깨부술 때 자연스럽게 연기실상,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해야 하며, 그 수행의 방식으로 <참선요지>에서는 화두를 관하라고 합니다. 참선의 목적이 성품을 보는 것이면, 화두를 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라면, 내가 보는 내 밖의 무엇, 내가 냄새 맡는 내 밖의 무엇에 마음이 가지 않고, 보는 그것이 무엇인가? 냄새 맡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데에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객체로 가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한생각을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운스님이 “생각을 쉬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생각을 쉬라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를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주체와 객체로 나눠서 내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추론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느낀다는 것은 주객을 떠나 한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화선입니다.

간화선, 다른 과정 통하지 않고 바로 가는 것

간화선은 성품을 보는 그것을 그냥 직접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과정을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직지인심,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곧바로 ‘성품’이라고 말한 마음을 가리켜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입니다.

망상을 표현할 때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 더 정확하게는 한생각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시점을 계속 파고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끝에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사고 패턴을 깨부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자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연기실상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이고 참선의 목적입니다.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왜 그토록 많은 조사들이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느냐?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인식된 세계, 허상, 현상의 세계, 말의 꼬리(화미)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으니까 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선의 목적, 성품을 보는 것은 내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이 꾸준히 이어져서 깊어지고 원숙해지면 어느 순간 확철대오하게 됩니다. 생각의 전환이 획기적으로 다가옵니다.

말을 하다보니 오히려 이해가 더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 말로 하기 힘든 것을 말로 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만약 제 수행이 충분하다면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부분은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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