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효도

중국에서 유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경전 ‘부모은중경’은 어버이의 은혜를 찬탄하고 이에 보답하기를 독려하는 경전이다. 이 경전에는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가 제시되어 있는데, 갓난아기를 살피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 그리고 평생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학습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태어난 후 1~2년간은 혼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상정된다. 이렇게 절대적인 보살핌을 쏟아준 부모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부파불교인 설일체유부의 율장(비나야약사)에 따르면 몸과 재력으로 효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모가 깨달음을 증득하여 영원한 행복을 얻기를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효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원칙으로, 삼보를 믿도록 하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를 잘 하고 지혜를 갖추도록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가족, 도반, 수행, 행복, 효도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

어버이날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효에 관한 경전은 <부모은중경>입니다. 이 경전은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 경전이라기 보다는, 유교세가 강했던 중국의 문화와 불교가 만난 것입니다. 이런 경전이 불교에는 참 많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보다는 부처님의 제자나 불자들이 만든 경전이 많습니다. <부모은중경>도 이 중 하나로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효를 강조하는 경전입니다. <부모은중경> 중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은혜

1. 아이를 잉태해 열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보호해준 은혜 

2.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3. 자식을 낳고도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4.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아기에게 먹여주는 은혜 

5. 마른자리 골라 아이 눕히고 젖은 자리에 눕는 은혜 

6. 때 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7. 대소변 가려 더러운 것을 세탁해주는 은혜 

8.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9. 자식을 위해 온갓 궂은 일을 다하는 은혜 

10.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주는 은혜

열 가지 은혜 중에서 일곱 가지는 갓난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고, 나머지 세 가지는 평생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절대적 보살핌이 필요한 인간 아기 

갓난아기를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챙겨야 합니다. 그것이 짐승과는 다른 인간 갓난아이의 특징입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새끼가 어미의 배에서 나오지 마자 걷고 뛰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태어난 후 일 년 간은 혼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먹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어딘가 자의적으로 가지도 못합니다. 그 기간 동안은 누군가가 헌신적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진화해온 결과입니다. 

진화의 도상에서 인간이 유독 다른 동물보다 덜 만들어져서 태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동물들은 본능대로만 평생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배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덜 만들어진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거기에 따른 불이익도 있지요. 혼자서 생존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보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호해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낳아준 사람, 어머니입니다.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성애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모성애가 없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2~3년까지는 보호자의 절대적인 보살핌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생존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 모성애라는 것 역시 인간이 가진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모성애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류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돌보는 것은 부모의 의무 

그렇다면 인간이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은중경>에서 언급하는 일곱 가지 은혜를 베푼 것일까요? 제가 볼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도리입니다. 부모가 가져야 할 도리를 행하다 보니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후미에 나오는 세 가지 항목입니다. 시작은 본능적인 부모의 도리이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애정이 되고 자비심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는 요즘의 세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젊은 시절 어떤 희생을 해서 너를 길렀는데…’ 혹은 ‘내가 너를 키워온 노력을 돈으로 환산을 하면 1억2천이라더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매달 얼마씩 그것을 갚아 나가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모가 갓난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내가 자식에게 베풀었던 것을 다시 받고자 한다면 내가 베푼 만큼 내 자식이 그의 자식에게 베풀기를 바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자식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교의 효도와 불교의 효도 

<부모은중경>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경전입니다. 불교적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은 효에 대해서 무어라고 이야기하셨을까요? 지금부터는 불교에 입각한 효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효도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분이 목련존자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지옥에서 고통받고 계시니까 목련존자가 당신의 어머니를 구제하고자 했고, 여기에서 백중(우란분절)이 유래했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백중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목련존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설일체유부 비나야약사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올리고, 한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올려놓고 백 년을 지낸다하더라도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또 대지의 온갖 보배와 장신구로 부모님을 공양하더라도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며,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이 못된다. 

만약 부모님께서 삼보를 믿지 않으시면 삼보를 믿게 해드려야 은혜를 갚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계행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를 지킬 수 있도록 해드리고, 부모님께서 인색하고 남에게 보시를 하지 않거든 기꺼이 보시할 수 있게 해드리며, 부모님께서 지혜가 없다면 지혜를 갖추도록 해드리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였다.

불교적으로 효도하는 방법 

마음으로 효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효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모님이 편찮으면 봉양을 하고,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올리고 한쪽 어깨에 어머니를 올리고 지낸다는 것은 이렇게 몸으로 직접 효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백 년을 지낸다고 해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하니,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크고 깊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몸으로 하는 효도에는 방법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온갖 보배와 장신구로 공양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몸으로 효도를 다 하지 못하는데, 나는 돈이 많으니 때마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여행 보내 드린다면 온전한 효도일까요? 안 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효도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크고 깊습니다.

몸으로 노동으로써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또한 내가 가진 재산과 능력을 총동원해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모두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어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나옵니다. 

설일체유부란 부처님 사후 200~300년 뒤에 등장한 유파입니다. 부파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교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치중한 여러 무리를 말하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주류를 이룬 것이 설일체유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파불교들이 나중에는 일반 재가불자들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채 부처님의 말씀을 교리적, 현학적으로만 접근한다는 한계에 다다릅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여 여기에서 우리가 이야기 하는 대중불교가 등장합니다. 일반 재가자들도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섬기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부모님이 영원한 행복을 영위하기를 

어쨌든 위의 구절은 설일체유부라는 주류 집단의 경전인데요. 비나야 약사라 함은 율장이라는 얘깁니다. 요즘으로 치면 내 나름대로의 도덕적인 기준, 지켜야겠다고 하는 자발적인 노력입니다. 이들의 관점으로 볼 때 효도는 부모님이 삼보를 믿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를 하고 지혜를 갖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리려고 하는 모든 것이 부모님이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부모님을 간병해드리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만들어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이 행복하시라고 우리가 몸으로 수고로움을 다하는 겁니다. 내 재산을 써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행복하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부모님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부모님의 행복을 보장해드리는 거예요. 

불교에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이미 부처님께서 명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무명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 중생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을 털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기에서는 부모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부모님의 진정한 행복도 결국은 부모님 스스로가 무명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도록, 그런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 겁니다. 

사실 불교 경전에서는 효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본인부터도 어떻게 보면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출가를 했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도 출가를 시키고 아내도, 조카도 출가 시켰습니다. 가족을 완전히 풍비박산 내버린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요. 이런 이유로(?) 효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문제가 항상 ‘어떻게 하면 열반을 증득할 것인가?’로 연결됩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타가 일시에 부처되는 길로 갈 수 있는가? 불교의 모든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효라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부모님이 영원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영원한 행복을 증득하기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래도 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이 집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들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생각을 반대로 해봅시다.

부모가 아닌 자식을 대하는 것으로 다시 생각해보죠. 나한테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것 사줍니다. 또는 거실까지 밥 먹으러 오기 귀찮다고 하는 자식의 방으로 밥상을 가져다 준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면 자식을 잘 키우는 겁니까? 아닙니다. 완전히 상놈 만드는 겁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자식을 잘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부모님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대입한 적이 별로 없을 겁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다 해드려야 한다고만 생각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그토록 털어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중생심을 더 키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내 몸을 수고롭게 해서 효도하는 것, 나의 재산과 능력을 동원해서 효도하는 것들에는한계가 있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이 열반을 증득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식에게도 해당됩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올바르게 키우는 것인가? 불교에 관점에서는 이렇게 키우면 됩니다. 

친구를 대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런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나 자신은 24시간 항상 나와 같이 있잖아요. 내 자신에게도 삼보를 믿도록 하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를 잘하고 지혜를 갖추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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