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불교학생회였던 김동수 열사
지난 5월 24일 김동수 열사 추모재에 다녀왔습니다. 이전에는 언뜻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대학생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김동수 열사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추모재를 다녀오면서야 비로소 김동수 열사가 보현보살의 행을 실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광주의 불자로서 김동수 열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법문에 임하겠습니다.
김동수 열사는 1958년 7월생입니다. 초, 중학교 시절을 고향인 장성에서 보내고 1973년 조선대학교 교대부고에 입학한 이후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습니다. 1976년도에 교대부고를 졸업하고 1978년에 조선대학교 공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계속 불교학생회 활동을 이어왔으며, 대학교 2학년 때에는 대불련 전남지부장에 취임했습니다.
1980년 4월 광주지역 석가탄신일 봉축위원회 진행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자 학생회 활동으로 수배되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동료들과 목포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김동수 열사는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시 광주로 돌아와 전남도청 항쟁지도부에서 학생수습 대책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4시 30분경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망월동 5.18 묘지에 안장된 김동수 열사는 1989년도 조선대학교 명예공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조선대학교 내부에 김동수열사기념사업회에서 추모비를 세웠으며, 1995년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상이 간단한 김동수 열사의 약력입니다.
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버리고 보살행
어제 추모식에서 김동수 열사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김동수 열사에게는 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목포에 피신했을 때입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쪽과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는 쪽의 의견이 팽팽했다고 합니다. 이때 김동수 열사는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광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일 그때 광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 번의 기회는 김동수 열사의 산화 전날입니다. 사망 전날 도청에서는 학생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김동수 열사는 동료와 함께 도청을 빠져나오는 도중 ‘설득을 해서 데리고 나올 사람이 있다’며 동료와 헤어져서 도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합니다.
두 번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목숨을 바쳐서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분이 바로 김동수 열사입니다. 그분의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얼마나 그가 보살정신에 투철하고자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불교교리를 알지 못하고 지혜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의지로 스스로의 행을 굳건하게 다지는 수행자를 우리는 보현보살이라 칭합니다. 김동수 열사는 23세의 젊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보살행을 실천했다 하겠습니다.
80년 광주, 나라면 어땠을까?
김동수 열사의 삶을 알고 나면 이런 질문을 던져봄직 합니다.
‘내가 만약 그 당시에 전남도청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약 1980년 5월 금남로에 부처님이 계셨다면, 과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용기가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이든 부지불식간에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옵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불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순간에 지표가 되는 분들이 바로 많은 불보살님입니다. 김동수 열사도 같은 시대를 살아간 하나의 지표로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보살의 용기, 자비심에서 나온다
진정한 용기를 생각할 때, 보살의 용기와 중생의 용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살의 용기는 자비심에서 비롯되고, 중생의 용기는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첫 번째, 보살의 용기는 자비심에서 비롯됩니다. 자비심은 지혜와 별개인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모든 중생들이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부처라는 마음이 뼈 속 깊이 사무쳐 있을 때 자비심이 나옵니다. 또한 이 육신은 내 것이 아니라는 공에 대한 통찰, 즉 지혜에 대한 통찰이 있을 때 자비가 나오고, 자비가 있을 때, 용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공이 티벳을 침략한 이후 티벳 사람들은 나라를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중공군이 잔혹하게 티벳 스님들을 살해할 때도 티벳 스님들을 중국군대에 저항하지 않고 비폭력으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스님들은 자기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사람을 죽이는 악업을 짓는 중공군의 업장이 소멸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보살의 용기라 할 것입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전쟁이 베트남 전쟁입니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베트남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는 사진인데요. 공의 정신을 통찰하고 지혜로써 이 세상을 간파한 상태에서 깊은 자비심으로 소신공양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 베트남 불교의 힘으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물러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틱낫한 스님도 전쟁통에 베트남 전쟁으로 고통 받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처럼 보살의 용기는 자비심에서 나옵니다.
만일 제가 1980년 도청에 있었다면 아마도 바로 도망쳐 나왔을 것입니다. 살고자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본능보다 더 수승한 용기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지, 용기가 없다하여 그를 탓할 것은 아닙니다.
중생의 용기,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
두 번째, 중생들의 용기는 무엇일까요? 중생들의 용기는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 합니다.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20세기는 숱한 전쟁과 내전, 갈등, 독재와 학살로 얼룩진 시대입니다. 21세기의 세상은 이 같은 악업이 전면에 내세워지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버젓이 내밀고서 사람들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습니다. 20세기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21세기에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폭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와중에 우리 중생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이 중생들의 용기는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집착, 애착, 욕심이 가득해서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집착과 욕심이 많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의 때입니다. 마음의 때가 쌓이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용기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가벼워야 용기 있는 행동이 나옵니다.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일상에 보살의 마음이 깃든다
우리는 중생의 용기를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용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 즉 애착 때문입니다. 집착을 용기로 생각합니다. 불자라면 마음이 가벼워야, 마음의 때를 다 털어내야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김동수 열사가 본인 스스로 보현보살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불자로 살고자 노력하다보니 그러한 행과 마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전대미문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보현보살의 행을 실천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마음의 때를 털어내는 자세로 생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보살의 마음이 깃들게 됩니다. 그럴 때만이 언제 어떤 순간에도 보살의 행을 행할 수 있습니다. 보살과 보살 아닌 나를 구분 짓지 말고 평소에 내가 할 수 있는 수행을 한다면 그 사이에 보살심이 내 안에 깃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