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해설 4

삼악도 고통의 근본은 탐욕에 있다.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내 안의 탐심을 없애는 데에 제일 가는 수행은 보시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몸으로 봉사하거나, 재물로 보시하거나, 마음으로 뭇 중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모두가 훌륭한 보시의 방법이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기실 우리는 사는 동안 쌓아온 업의 과보를 지니고 떠난다. 보시하고, 수행하고, 말을 떠나 홀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동안 쌓을 수 있는 선업이자 공덕에 다름 아니다.

#나는누구인가, 수행, 알아차림

먹을 것, 입을 것보다 자기성찰을

송하여 이르되 풀뿌리 나무 열매 주린 창자 위로하고 소나무 잎과 풀옷으로 몸을 가리고, 흰 구름 두루미로 벗을 삼아서 깊은 산골 안에서 수행을 함께 하네.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을 너무 탐내지 말라는 내용을 살펴본 이후에는 산속에 들어가서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지고 수행하라는 게송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가 혼자 수행을 한다면 농사는 누가 짓고 돈은 누가 벌겠습니까? 세상이 굴러가지를 못합니다. 세상이 굴러가지 못하면 결국 이 양반도 굶어 죽을 겁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먹을 것, 입을 것에 욕심내지 말고 자기 성찰을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대인관계가 넓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 하고 출세하고 돈을 잘 번다는 선입견이 팽배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CEO나 부자들을 보면 사회·인간관계가 넓은 사람보다는 자기의 시간을 잘 쓰는 사람, 내성적인 사람도 예상 외로 많다고 합니다.

외향과 내향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흔히 외향, 내향을 이야기 할 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누구하고나 쉽게 친해지는 것을 외향적이라고 표현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고 사람을 좀 가리는 사람을 내성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 밖을 헤매기보다 마음 안을 들여다보기

외향은 밖으로 향한다는 것이고 내향은 안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외향은 바깥에 관심이 많아요. 내 밖에 뭐가 있습니까?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만지는, 오감의 대상들이 밖에 있습니다.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사람 아닌 뭐가 되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인식의 대상이니까요. 외향은 내 마음이 항상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반면 내향은 안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인맥을 늘리는 것보다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경영학적으로 검증된 말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맛있는 것, 재밌는 것, 멋있는 것을 찾아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은 대인관계가 좋은 것이지요. 저녁마다 술 마시고 친구랑 노는 것은 인맥이 좋은 것이지요. 그럼 출세는 언제 합니까?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출세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 슬픈지 우울한지,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있는지, 나의 원동력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꼭 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깊은 산골에서 수행하라는 말을 현대의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삼악도 고통의 근본은 탐욕이라

둘째, 자기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지니라. 삼악도의 고통은 탐욕이 으뜸가는 근본되고, 육바라밀 수행에는 보시가 제일이 되느니라.

인색하고 탐내는 것은 착한 길을 가로막고, 자비로 베푸는 일은 악도를 막아주느니라. 가난한 이가 구걸하던 내가 비록 궁핍하여도 인색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올 적에 한 물건도 없이 오고, 갈 적에도 빈손으로 가야 하니 내 재물도 아끼는 바 없는데 남의 물건에 무슨 마음이 있으리오. 만 가지가 있어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보만이 나를 따름이라. 3일의 짧은 수행이라도 천 년 가는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낸 물건 하루아침 티끌이니라.

송하여 이르되 무엇이 삼악도 괴로움을 불러오는가. 아득한 옛날부터 탐내고 사랑한 마음 탓이니 부처님 의발로도 충분히 흡족한데 공연한 욕심 부려 무명만을 기르는가.

욕심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물을 욕심내지 말고, 자기 물건에 인색하지 말며,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계의 불투도를 떠올리면 됩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이 말은 말 그대로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할 때, 직원들은 월급을 조금만 주고 이익의 대부분을 나 혼자 챙긴다면 이것도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이걸 심하게 하면 나라에서 처벌을 하기도 하지요. 최저임금은 지키라는 선에서 말입니다. 모두에게 투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 하는데 저 혼자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도 남의 것을 뺏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재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은 탐욕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삼악도는 지옥, 아귀, 축생의 세 가지 악도를 말합니다. 중생들이 이 사바세계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은 이 세계의 삼독심, 즉 탐진치 때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어리석음과 무명으로 인해서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나옵니다. 고통의 으뜸은 탐욕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 탐욕과 욕심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욕심을 안 내면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욕심을 많이 내면 그것이 탐욕이 됩니다. 그냥 욕심이 아니라 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정도 그냥 좋아하면 되는데 심하게, 과하게 좋아하면 안 됩니다.

탐욕을 없애는 수행 중 제일은 보시바라밀

욕심을 내지 않고 탐욕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바라밀 수행을 해야 하는데 그 중 으뜸은 보시라 했습니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 바라밀입니다.

불교는 흔히 계정혜 삼학으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계는 지계, 정은 선정, 혜는 지혜를 말합니다.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으면 지혜가 밝아진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사실은 육바라밀입니다.

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욕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선정이 되는 것도 어쩌다 한번입니다. 어쩌다 한 번 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다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잠깐 하는 것이 아니라, 컨디션 좋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고민이 있을 때나 아무 생각 없을 때나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선정에서는 제일 중요합니다. 이처럼 선정을 하려면 반드시 정진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 하면 지혜가 생기는데, 보시가 왜 제일 처음에 나왔을까요?

계정혜 삼학은 결국 내 속의 탐욕과 아상을 깨뜨리는 것인데, 탐욕을 없애는 가장 좋은 수행이 베푸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무명 때문에 중생들이 고통 속에 산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던 모르던, 남에게 베푸는 것은 누구나 기본으로 해야 하는 미덕입니다. 이것이 기본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굳이 계정혜 삼학에 드러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베풂 없이, 내 안에 있는 탐욕심을 없애지 않은 상태에서 계정혜 삼학을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시는 몸으로, 마음으로…

보시하는 마음이 근본바탕에서 빠져있는 상태에서 계정혜 삼학을 닦으면 깨달음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집착이 생깁니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겠다.’, ‘나는 아주 훌륭한 수행자로 살아가겠다.’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런 서원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나와 남이 동시에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수행하는 것이지,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수행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보시가 가장 중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혀 몰라도 보시를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알아도 보시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보시라고 하면 꼭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는 몸으로 보시해야 합니다. 보시 중에서는 법보시가 우리는 지혜가 밝지 못한 중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몸으로 봉사하는 게 제일입니다.

나이를 먹어서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힘들면 그 때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보시합니다. 몸으로 봉사하기도 힘들고 돈도 없다고 하면 마음으로 보시하면 됩니다. 절에 와서 유주무주 애혼고혼 모든 중생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그것이 마음으로 하는 보시입니다.

“인색하고 탐내는 것은 착한 길을 가로막고, 자비로 베푸는 일은 악도를 막아주느니라.”

수행을 하지 않고, 내지는 인간답게 살거나 도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노력 없이 살면 인간은 인색하고 탐내는 쪽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 육신이 곧 나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가 잘 먹고 잘 자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더 많은 재물을 탐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좋은 곳에 갑니다. 그러자면 내 것은 아끼고 남의 것은 많이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보시를 하려고 노력하고 자비를 베풀려고 노력해야만 삼악도에 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인색하지 말기

“가난한 이가 구걸하거든 내가 비록 궁핍하여도 인색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십여 년 전만 해도 우리 같은 스님네들이 터미널에 내리면 사람들이 와서는 차비를 좀 보태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1만 원, 2만 원씩 줬었는데 한 몇 년 그렇게 주다보니까 이 사람들이 상습범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돈 주는 것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더 지나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손을 내미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달라면 줘야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라는 대로 줬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근자에는 잘 보이지 않기는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와서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때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무엇을 해볼 생각은 안 하고 남한테 손을 내미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내말만 하니까 내미는 것입니다. 내게 줄 것이 있으면 주면 됩니다. 저 사람이 가난한데 게으르고 남의 도움만을 바라고… 그런 것들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따지는 마음 자체가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자기합리화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상습범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좀 뻔뻔하고 게으를지언정 불법을 저지르거나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만 원짜리 한 장 주면서 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가타부타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줄 돈이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됩니다.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구걸하거든 내가 비록 궁핍하여도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봅시다.

갈 때는 빈손? 두 손에 업보가 가득

“올 적에 한 물건도 없이 오고 갈 적에도 빈손으로 가야하니 내 재물도 아끼는 바 없는데 남의 물건에 무슨 마음이 있으리오. 만 가지가 있어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보만이 나를 따름이라.”

태어날 때 알몸으로 태어나고 갈 때도 알몸으로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만 가지가 있어도 가져가지 못하고 올 때도 빈손 갈 때도 빈손이지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에 부처님은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오직 업보만이 나를 따를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가지고 갑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 다음 생에 다 받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업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 우리의 삶이 보다 도덕적이고 보다 사회에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할래, 이런 사람은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질 시간에 보시를 하고 선업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언제나 선업을 지으면 좋겠지만 악업을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이것저것 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 하다못해 법회에 공양이라도 올리고 나름대로의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3일의 짧은 수행이라도 천 년 가는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낸 물건 하루아침 티끌이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탐내고 사랑한 마음 탓이니 부처님 의발로도 충분히 흡족한데 공연한 욕심 부려 무명만을 기르는가.”

겨우 3일만 수행을 해도 그것은 천 년 가는 보배가 됩니다. 수행의 공덕. 수행을 한 선업이 천년을 갑니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이고 먹을 거 안 먹고 아끼고 아껴서 모으고 모은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이 됩니까? 하루아침에 티끌이 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재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았을지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욕심이 탐욕으로 넘어가는 걸 막아야 합니다.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살펴야 알 수 있습니다. 살피지 못하면 모릅니다. 돌이키기 힘듭니다.

말 떠난 곳에 진리 있고, 홀로 있는 곳에 성찰 있다

셋째,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가볍게 하지 말지니라.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아 선정을 이루고,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을 돌이켜 지혜를 이루느니라.

실상은 말 떠난 곳에 있고, 진리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느니라. 입은 재앙의 근본이니 반드시 엄하게 단속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벼이 움직이지 말지니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뛰는 짐승은 화살 맞을 위험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설산에서 육 년을 좌선하셨고, 달마스님은 소림에서 아홉 해를 말없이 보냈으니 뒷날 참선하는 수행자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으리오.

어떤 불자들은 보시는 잘하시는데 말을 적게 하는 것이 힘듭니다.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순간 바로 입으로 나와버립니다. 말을 적게 하려면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말 하고 나서 후회를 합니다. 유교에서는 하물며 말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해도 이 말을 꼭 해야겠다고 할 때 말을 하라고 합니다.

말이 많고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자주 나는 새와도 같고 가볍게 뛰는 짐승과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기 쉽고 그물에 걸리기 쉽지요. 항상 자기 성찰을 해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을 줄일 수 있습니다.

송하여 이르되 몸과 마음 정에 들어 헐떡임을 그치고 토굴 속에서 묵묵히 왕래를 끊을지어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한 가지 일도 없으니 마음 속 부처 찾아 참 모습을 깨달으리라.

온갖 인연을 끊고 선정에 들은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빈집에 혼자 살면서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갖추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평소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여 하루에 한 몇 분만이라도 오롯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집에서도 좋고 왔다갔다 하는 버스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꼭 무언가를 갖추어서 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하기 싫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싶으면 그때 바로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곳, 그 현장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노력을 안 하면 누군가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핸드폰 안에 있는 연예인이나 TV 안에 있는 출연자들하고 시간을 보내지요. 그러지 마시고 하루 중에 한 번이라도 자기시간을 가지고 수행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자는 이야기입니다.

마음 속 부처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고민하면 더 못 찾게 됩니다. 제가 장담하건데 이런 고민은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고민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공부하는 마음, 수행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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