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해설 10

자경문 해설의 마지막 편.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며 대중을 향한 마음을 늘 평등하게 하라는 9~10번째 구절을 설명한다.
앞서 해설해온 자경문의 10가지 경책의 말씀은 결국 본능을 다스리라는 것과 집착을 버리라는 것, 두 가지 이야기로 귀결된다. 사람 몸 받기 어려운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 부단히 수행하라는 당부이다.
우리는 부처의 경지라는 것도, 도라는 것도 언젠가 다다라야 할 미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밖에 무언가 있다는 생각, 주체와 객체로 모든 것을 분멸하는 것이 중생의 자연스러운 습이다.
그러나 세상의 성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내 밖에 무언가에 한눈팔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한 원칙을 바탕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그 순간이 부처의 삶이자 도에 이르는 길이다.

#기도, 나는누구인가, 수행, 의지

https://youtu.be/dHh4voG1ysM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아홉째,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지니라.

비록 잘 한다 못 한다 말을 들어도 마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할지니,

덕이 없어 칭찬받음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요,

허물이 있어 욕을 먹음은 진실로 좋아할 일이로다.

좋아하면 허물을 알아 반드시 고치게 되고

부끄러우며 수행하는데 게으름이 없으리라.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지니 마침내는 되돌아와 나의 허물되리로다.

남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부모를 비방하는 소리같이 여겨야 하느니라.

오늘 아침은 남의 허물을 말하지마는

다른 날은 머리를 돌려 내 허물을 논하느니라.

무릇 상이 있는 바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비방과 칭찬에 어찌 근심하고 어찌 기뻐하랴.

송하여 이르되

온종일 남의 잘못 시비하다가 밤 되면 피곤해서 잠만 자나니

이러한 수행에는 시물이 헛되어 생사윤회 벗어나기 한없이 어렵다네.

백중기도를 시작하면서 기도를 할 때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것과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입니다. 전생과 그 전생, 어느 생엔가는 어떤 식으로든 어느 누군가와 인연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경문의 아홉 번째 구절은 남을 험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뒷담화입니다. 남을 험담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생에는 내 자식, 내 남편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생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왜 남의 허물을 이야기합니까? 결국은 다 제가 잘나서 그런 겁니다. 내가 못났는데 남을 허물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나는 못난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남을 험담합니다. 이런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내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닌데 칭찬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나를 띄울 수 있다면 언젠가는 떨어뜨리는 순간도 올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칭찬이 결코 칭찬이 아닌 셈이지요. 누군가 내 허물을 말하더라도 스스로 게을러서 자신의 허물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콕 짚어주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여도 굳이 지적을 하지마세요. 내가 지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합니다. 누군가 지적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기에 굳이 내가 나서서 그의 허물을 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입단속만 잘 하면 됩니다.

마음을 늘 평등하게 하라

열째, 대중 가운데 생활하면서 마음을 늘 평등케 할지니라.

세속의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한 것은

법계를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라.

만일 가깝고 먼 구별이 있다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탓이라

비록 출가한들 무슨 덕이 있으리오.

마음이 없다면 어찌 이 몸에

괴롭고 즐겁고 잘되고 못됨이 있으리오.

평등한 성품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큰 거울은 차별 없이 비추는 법이니라.

삼악도에 들고 나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얽힌 까닭이요,

육도를 윤회함은 친소의 업에 얽힌 까닭이니라.

평등한 진리에 마음이 계합하면 가지고 버릴 것이 없으니,

가지고 버릴 것이 없는데 생사윤회는 또 어디 있으리오.

송하여 이르되

위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평등한 마음을 항상 품어야 하느니라.

가깝고 멀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차별한다면

도는 점점 멀어지고 업장만 깊어지리라.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합니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애틋하게 여기지요. 사랑하는 마음은 왜 생길까요? 남녀 간에는 성적인 욕구가 있고, 남녀가 아니라면 친밀감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이런 성적인 욕구나 친밀감 등에서 시작한 사랑이 도착하는 지점은 결국 애착과 집착입니다.

친밀감의 정도가 다르고 애착하는 정도가 다르기에 모든 사람을 평등하지 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삼악도에 들고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지요. 육도를 윤회하는 것은 애착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그 정도에 따라서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집착하며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리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평등한 마음을 항상 품어야 합니다. 가깝고 멀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차별한다면 도는 점점 멀어지고 업장만 깊어지는 것이지요.

야운스님의 열 가지 당부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자경문에서 야운스님이 강조해온 10가지 당부를 돌아보겠습니다.

1.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절대로 받지 말라. 먹는 것에 욕심내지 말라.

2. 자기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탐심을 내지 말라.

3.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가볍게 하지 말라.

4. 다만 좋은 벗을 사귀고 나쁜 벗을 맺지 말지니라. 항상 수행을 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라.

5. 삼경 외에는 잠을 자지 말지니라. 수면욕을 줄여라.

6. 내가 잘났다는 생각에 취해서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

7. 재물과 여색은 반드시 정념으로 대할지니라. 탐욕과 색욕을 경계하라.

8. 세속과 교류하여 남에게 미움 받지 말지니라. 인정이 깊어지면 애정이 생기며, 애정이 깊어지면 미워하는 마음도 따라온다. 인정을 깊이 쓰지 말라.

9.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10. 대중 가운데 생활하면서 마음을 늘 평등케 할지니라.

이 열 가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능을 다스리라는 것과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본능을 잘 다스려야합니다. 특히 내가 제일 소중하다는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 즉 무명을 털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영원히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닦아 생사고해 넘어가자

주인공아!

그대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눈 먼 거북이 나무구멍을 만나듯 어려운 일이 아니더냐.

일생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고.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지만

부처님 법 만나기는 더욱 어려워라.

금생을 헛되이 보내면

만겁을 지내도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이 열 가지 경책을 잘 지켜서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할지니라.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눈 먼 거북이가 500년에 한 번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판자의 구멍으로 머리를 쏙 내미는 만큼의 낮은 확률을 뜻합니다. 그만큼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힘든 일이니 이렇게 소중한 기회에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근본 서원은

그대 홀로 생사고해를 벗어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중생을 건지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고? 그대가 무시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사에 오락가락 하면서 번번이 부모를 의지하였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끝없는 그 세월에 부모된 이 얼마나 많을 것이냐.

이렇게 생각하면 육도중생이 그대의 다생부모 아닌 이가 없느니라.

이러한 중생들이 다 악도에 빠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밤낮으로 받으니

그대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벗어나겠는가.

전생의 전생, 그 전생과 또 그 전생 중 어느 생엔가는 이 사람이 나의 부모였으며 또한 내가 이 사람의 부모였다고 생각하면 어느 인연을 허투루 생각할 수 있겠습니가? 우리는 무수한 윤회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그중 한 번은 부모자식간의 연을 맺었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결코 남이 아닙니다.

슬프도다 그 아픔이 내 온 몸을 찌르는구나.

천 번 만 번 그대에게 바라노니,

어서 큰 지혜를 이루고 신통변화 갖추어서

자유자재한 방편 법으로

고해의 거친 파도를 헤쳐 가는 지혜의 노가 되어

욕심 많은 이 세상의 미혹한 중생들을 속히 제도할지니라.

불교에서는 나 혼자 행복하려고 하고 나 혼자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결코 그것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다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 합니다. 온 세계가 마치 하나의 꽃과도 같습니다. 하나의 꽃을 구성하는 많은 부위가 있듯, 이 세계의 숱하게 많은 중생들 역시 모두 각자 따로인 것 같아도 실은 하나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 혼자 깨달음을 얻는다 하여 어찌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일 수 있겠습니까?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 나와 네가 일시에 모두 함께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대는 아는가.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도 우리 같은

범부였느니라. 그들이 이미 장부이고 나 또한 장부이니

하지 않아 다를 뿐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별 볼일 없는 중생이라는 생각, 가끔 기도나 봉사 정도 하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나는 중생이니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처라고 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같은 범부 중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다시 한 번 하고 있습니다.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닐지니…

옛 사람의 말에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도를 멀리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내가 어질고자 하면 저절로 어질게 된다”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이 말씀이여!

만일 견고한 신심으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자성을 깨쳐 성불하지 못하리오.

내가 이제 삼보를 증명으로 모시고 낱낱이 그대에게 경계하노니,

잘못을 알면서도 일부러 범한다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리라.

어찌 삼가지 아니하랴. 어찌 삼가지 아니하랴.

잘못을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야운스님이 겁을 주고 있습니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옛사람이란 부처님이 아니고 공자님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이미 중국사회에 퍼져있던 유교와 도교적 사상에 불교에 많이 혼입되어 있었지요. 때문에 우리나라 조사스님들이 말씀을 할 때 도교적인 이야기와 유교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같이 나오게 됩니다.

중용은 유교를 대표하는 서적인 <사서>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이 그리 할 뿐이니, 사람이 도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어찌 가히 도를 위한다 할 수 있겠는가?”

다음 구절인 “내가 어질고자 하면 저절로 어질게 된다”는 부분은 <논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내가 어질고자 하면 그로 인하여 저절로 어짐[仁]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분별하는 것이 중생의 한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세상은 내가 아닌 다른 것입니다. 대상입니다. 내가 인식하는 대상, 내가 보고 느끼는 대상은 객체입니다. ‘내가 아닌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도를 얻는 것마저도 내가 아닌 그 무언가나 그 어딘가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내가 부처다’라고 이야기할 때도 어떻습니까?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부처인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미래 어느 시점의 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내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이야기지요. 지식, 지혜, 사상, 종교, 신 같은 모든 것이 우리 밖에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도에 이를 수 없다고 공자님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미래 어느 시점의 나, 혹은 내 밖의 그 무엇으로 도를 생각하면 절대 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공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멀리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도에서 멀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도에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밖의 무언가에 한눈팔지 말 것

불교수행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 함은 미래의 내가 아니고 지금 현재의 나입니다. 이 순간의 자신을 관찰하고 내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수행이고, 도를 깨치는 것이고, 부처된 자세입니다. 그러한 사람 자체가 부처입니다.

먼 미래에 부처가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봐야 절대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자신을 올바로 성찰하지 않으면, 내 밖에 있는 그 무엇 즉 미래에 설정해놓은 내 자신에게 마음을 뺏기면 절대로 깨침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공자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내 자신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원칙입니다. 목표와 원칙은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명예를 드높이는 일들은 목표를 세워서 해내가면 힘들지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데에 이런 방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한 원칙이 있어야

내 밖의 무언가에 이르기 위해서, 그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항상 관찰하고 살펴야 합니다. 물론 하루 종일 ‘내가 게으르구나’ 하고 살피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순간의 나를 살피되, 이 순간의 내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하는가에 대한 원칙이 마음속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 원칙에 부합하여 살아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공자님의 이야기나,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원칙이라는 이야기나, 육조 혜능스님이 이야기한 “미혹한 즉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다”라는 이야기가 다 같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원칙이 있어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 길이 결과적으로 보니 부처 되는 길이고, 도를 위하는 길이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질고자 하면 저절로 어질게 된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자비의 실천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압니다. 연기실상의 세계에는 우리 모두가 얽혀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자비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연기실상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의 원칙인 것입니다. 굳이 멀리 있는 어짊과 자비에 다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어질고자 노력하면 어짊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자님의 말씀입니다.

송하여 이르되

옥토끼가 차고 기우니 늙음을 재촉하고

금까마귀 뜨고 지니 세월만 흘러가네.

명예와 재물은 새벽녘의 이슬이요.

괴로운 일 부귀영화 석양연기일세.

주인공 그대에게 도 닦기를 권유하니

어서 빨리 성불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게

금생에 이 교훈을 따르지 않는다면

후세에 한스러움이 끝이 없으리라.

슬프도다 그 아픔이 내 온 몸을 찌르는구나.

천 번 만 번 그대에게 바라노니,

어서 큰 지혜를 이루고 신통변화 갖추어서

자유자재한 방편 법으로

고해의 거친 파도를 헤쳐 가는 지혜의 노가 되어

욕심 많은 이 세상의 미혹한 중생들을 속히 제도할지니라.

옥토끼는 달을 상징하고 금까마귀는 해를 이야기합니다. 해와 달이 반복되면서 세월이 흘러가지요.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야운스님이 경책합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 보지 않으면 고통은 절대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우리 중생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부처님 말씀에 조금이라도 덜 벗어나서 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연히 어느 시인의 시구에서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기도>라는 시입니다.

너무 큰일을 하려고, 너무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단한 수행을 부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마음으로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런 마음으로 살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수행하는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발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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