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전 등 이야기
오늘 법회에 오신 분들은 일주문에서부터 절로 올라오는 진입로에 등이 달려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등이지 않던가요? 오백전에 달려 있던 등들입니다.
오백전 등이 진입로에 오기까지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스님들끼리 차를 마시다가 “오백전은 오백전이니까 등이 오백 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럴듯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해 초파일을 준비하면서 그림을 그려보는데 등 오백 개를 달려면 부처님 머리까지 등이 달려야 하는 겁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지요.
그래서 450개 정도로 숫자를 줄였는데요. 원래 있던 등에 숫자만 추가하려고 보니까 통일성이 없을 것 같아 새로 맞추자 하니 주문 제작하는 등은 어마어마하게 비싼겁니다. 거의 예술작품에 가까운 등이라고 해서요. 이건 좀 부담이 되니 기존 등에 추가로 몇 개를 더 달자고 결정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 지금 등과 똑같은 등을 수소문해도 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똑같은 디자인의 등을 새로 맞추고 대신 기존의 것은 진입로에 옮겨 다는 것으로 재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동안 템플팀과 템플스테이 참가자, 자원봉사자들이 오일스텐을 두 번씩 발라 방수가 되게 만들어서 진입로에 등을 밝힌 사연입니다.
마당등도 절반 정도 밖에 달려있지 않은 것을 보셨을 겁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원래는 신도분들이 왔을 때 등달기 울력을 같이 하려고 했는데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해서 울력은 못하고, 전기 설치하는 분들에게 달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부지런히 달았는데 시간이 모자라가지고 요것밖에 못 달았습니다. 보는 사람에겐 좀 이상하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일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요. 오백전 등처럼 ‘오백전이니까 멋진 등을 오백 개 달아서 신심이 확 나게 하자!’고 생각을 냈을 때 그 생각대로 탁 되면 정말 좋은데, 세상 일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 결론은 지금 보는 것처럼 뭐 그다지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일이 생각대로 안 됩니다. 뜻대로 안 돼요. 비가 온다고 해서 마당등 울력을 취소하고 작업하시는 분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또 비가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애매합니다. 역시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를 할 때 “살다보면 세상 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왜 뜻대로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세상 일이 마음먹은대로 안 될까? 첫 번째로는 우리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뜻대로 안 되는 거고요. 두 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왜 연기하기 때문에 뜻대로 안 된다고 생각할까요? 왜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될 수밖에 없을까요?
혼자만의 뜻이 아니라 여럿이 얽힌 일
우리가 밥먹는 일을 생각해봅시다. 저희 스님들은 법회가 끝나면 방에서 대웅전 마당을 가로질러 공양간에 가는 정도의 수고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주머니에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의 많은 부분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들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농사짓는 사람, 운송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제 자기의 역할을 하다 보니까 내 앞에 밥이 나오고 반찬이 나오고 국이 나오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나는 그냥 먹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만약 내가 세상을 혼자 산다면 100만큼 수고를 들여야 할 텐데, 내가 오늘 점심을 먹는 데에 5만큼의 수고를 들였다면 나머지 95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나 대신 수고를 들여준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들여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다른 사람은 100 말고5나 10만큼의 수고만 들여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데 내가 들이는 힘은 5정도 밖에 안되고 나머지 95는 다른 사람들이 나하고 같이 하는 거예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보이지 않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연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어떤 행동으로, 노력으로, 수고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고, 뜻대로 안 된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인 것입니다. 마치 오백전에 멋있는 등을 달자고 했던 생각의 결과가 우리가 보고 있는 진입로의 등인 것처럼 말입니다.
연기의 구체적 실천, 중도
이러는 수도 있습니다. 오백전 등을 보고 처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도 있고요. 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을까, 나는 왜 이럴까 신세한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이해가 잘 안 되지요.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지?” 그게 연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순간 숨을 쉴 때마다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연기의 도리를 느끼고 배우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이제 중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이 뜁니다. 가슴에 손을 올리면 심장이 뛰고 있어요. 심장은 1분에 몇 번 뛰는 게 가장 건강에 좋을까요? 그렇게 정해진 것이 과연 있습니까? 생각을 한 번 해봅시다.
예를 들어서 1분에 80번 심장이 뛰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제가 지금 여기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나를 공격하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망쳐야죠. 도망가려면 빨리 뒤어야 하는데 그러면 심장도 빨리 뛰게 됩니다. ‘아이고. 심장은 80번만 뛰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그냥 괴한에게 당해야 하죠. 이렇게 중도는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뭔가가 나오는 겁니다.
반대로 밤이 되어서 잠을 자기위해 누웠다고 합시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심장이 평상시와 똑같이 80번을 뛴다고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잠이 안 옵니다. 이것도 올바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도는 이런 겁니다.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고행이라는 한쪽 극단도 피해야 하지만 반대쪽 극단인 게으름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요. 양쪽을 넘어선 중도의 길을 가야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수행에서 이야기하는 중도는 이런데,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도는 또 다릅니다.
수행에서의 중도, 진리로써의 중도
초기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상주론과 단멸론의 양 극단이 중도의 주제입니다. 상주론은 이 세상에 영원한 나를 나이게끔 하는 ‘자성’이 있어서 몸은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 존재한는 내용입니다. 속된 말로 귀신이 있다는 거죠. 이 몸이 죽어도 다음 생과 그 다음 생에 몸을 바꿔가면서 사는 겁니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 상주론입니다.
이런 견해도 잘못된 거지만 그 반대인 단멸론도 올바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단멸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죽으면 끝인 것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살인자가 칼로 사람을 푹 찔렀을 때, 단멸론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칼도 물질이고 사람의 몸도 물질이다. 칼이라는 물질이 사람 몸을 구성하고 있는원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사람을 죽였네 살렸네 하면서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 네가 존재한다는 근거가 무엇이냐? 이렇게 주장하는 게 단멸론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존재하는 게 없다, 또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양극단을 넘어서서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행에서의 중도와 초기불교에서의 중도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게 아닙니다. 양극단을 피하라고 하는 말은 연기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수행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요? 상황에 따라서 내가 처한 조건 속에서 내 자신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수행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게 수행을 잘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애들이 여러 명 있고 그 애들을 다 먹여살려야 하고 뒤치다꺼리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방문 걸어잠그고 온종일 가부좌 틀고 참선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자기 처지를 무시한 겁니다. 잘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식으로 양극단을 피하라고 하는 말은 자기 자신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주변상황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런 것들을 따져봐서 가장 최적의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을 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중도의 길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의 중도
진리에서 말하는 중도가 단멸론과 상주론 양 근단의 중도라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이 몸이 죽어도 계속 몸을 바꾸어가면서 존재하는 뭔가가 있어라는 한쪽 극단과, 그런 거 없어 죽으면 끝이야 존재한다는 건 착각이야 라고하는 단멸론. 이 양극단의 중도를 간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물리학 법칙이 있지요. e=mc제곱이다. e는 에너지고 에너지는 m곱하기 c제곱과 같다.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입니다. 에너지는 질량과 같다. 에너지는 질량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엔 다 질량이 있습니다. 무게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것들은 다 질량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질량이라는 것이 사실은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라는 겁니다. 있는 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없는 거냐? 없는건 아닙니다. 에너지가 있으니까요.
에너지가 뭡니까? 에너지가 있어야 불도 밝히고 차도 갑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있어요. 그런데 있는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현재 물리학이 밝혀낸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e=mc제곱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려운 수학같은데 실은 연기사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중도라는 게 그 말이에요. 있는 게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게 없는 게 아니라는 것.
연기라고 하면 흔히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어떤 관계를 맺어 영향을 받는다’고 전제하는데요. 실은 그게 아닙니다. 애시당초에 있는 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것들은 서로 끊임없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현재 물리학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건의 총체이다. 무슨말이냐면요. 제가 방금 말했듯이 이런 것 저런 것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이 세계가 아니고요. 강 산 바다 사람 개 고양이 이런 것들이 모여있는 것이 세계가 아니고요. 그런 것들 각각은 하나의 작용과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합니다.
없는 건 아니지만 있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이게 중도이고 연기사상입니다. 양극단을 피하라는 측면에서는 맞는말이죠.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변의 모든 것들과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 그것이 연기이고 그것이 중도입니다.
팔정도는 중도다
팔정도는 중도라는 이야기도 자주 나옵니다. 말이 됩니까? 중도라는 것은 수행을 함에 있어서 극단적인 고행도 피해야할 것이요, 방만한 수행도 피해야 할 것이라는데. 팔정도가 어떻게 그런 중도일 수 있을까?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팔정도 중에서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정어(正語)는 바른말을 하는 겁니다. 바른말을 하는 게 곧 불교의 수행입니다. 바른말이 무엇인지는 천수경에 나옵니다. 거친 말, 악한 말, 두 말 하는 것, 교묘하게 하는 말… 이런 말들을 하지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이야기 한 네 가지 말을 피하면 그것이 진리일까요? 만약 지금 전쟁 중이라면. 코앞에 적군들이 총을 쏘고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지휘관이 고운말로 지시를 내리면 됩니까? 그 상황에서는 부드럽게 하는 말이 정어가 아닙니다.
정어는 나를 둘러싼 다양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말하는 겁니다. 그런 행동을 하고 말을 할때 우리가 가져야될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팔만대장경에 나와 있는 모든 교리가 궁극적으로 지양하는 지점입니다. 바로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완전히 뿌리뽑겠다, 번뇌의 뿌리를 완전히 뽑겠다는 것이 유일한 하나의 기준입니다.
불교학생회와 ‘진인사 대천명’
지난 토요일, 증심사 대웅전에서 조선대학교 불교학생회 재건법회가 있었습니다. 불교학생회 동문들이 10년 가까이 문을 닫고 있었던 조선대 불교학생회를 되살리자고 해서 모였습니다. 그때 제가 짧게 법문을 했는데요. 진인사 대천명이라,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불교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없는시간과 없는 재원을 쪼개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대체 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지 않는 거야?’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인사 대천명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했으니까 결과가 그만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를 올바르게 공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열심히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이게 진인사 대천명의 뜻입니다. 세상 일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 것이고 제대로 안 될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제대로 안 된다고 해서 기운 빠지고 화내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일은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로 얽혀 있기 때문에 길게 보고 느긋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의 법문을 학생들에게 했습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한 말입니다. 적벽대전이라고 하는 전쟁에서 유비하고 조조가 붙게 되었는데 유비쪽 군사가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나 제갈량이 탁월한 기량을 발휘해서 승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조가 대패를 하고 도망을 가는데 좁은 골짜기를 만났습니다. 골짜기 저편에서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고요. 보통사람들이라면 적들이 매복해있으니 돌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조조는 지혜롭고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조조가 보기에 사실 저기에는 군사가 없고, 오히려 주력 군대는 우리가 돌아가려는 쪽에 매복해 있을 것 같은 겁니다.
이렇게 생각한 조조가 골짜기에 들어가자 의외로 유비의 군대가 매복해 있었습니다. 제갈공명이 몇 수를 더 내다본 겁니다. 매복조에는 관우가 지키고 있었는데요. 조조의 그나마 남은 군대가 골짜기에서 몰살당하게 생겼으니 조조는 화가 치솟습니다. 더욱이 관우는 조조의 부하였다가 유비에게 돌아선 것이었거든요.
원래 자기 부하였는데 은혜를 배신해도 유분수지, 조조 입장에서는 화가 납니다. 가뜩이나 대패를 당해서 초라한 몰골로 피난 중인데요. 이때 책사(책략가)라는 사람이 관우를 회유해보자고 제안합니다. 관우는 덕장으로 유명한 장수였으니까요. 조조가 관우에게 통사정을 하자 관우가 마음이 약해져 조조를 그냥 보내줍니다.
사람이 할 일을 다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그런데 이 마저도 제갈량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조조가 이번에는 명이 다할 운이 아닌데, 기왕 조조가 살아 돌아갈 것이라면 조조에게 빚을 진 게 있는 관우가 아량을 베풀어 조조에게 남아있는 빚을 청산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렇게 관우를 골짜기로 보내면서 제갈량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진인사 대천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지략을 짰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죠. 관우가 조조를 살려줄 수도 있고, 관우가 조조를 제갈량의 지시대로 죽일 수도 있으나 그것까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갖은 지략과 탁월한 방안으로써 비책을 만들어놓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한다는 말은 이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얽히고설켜서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하늘만 압니다.
그렇다고해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왜 열심히 노력해야되느냐고 반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작용하고 영향을 주는 자체가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작용하고 작용받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아닙니다. 그러자면 나도 이 속에서 뭔가 열심히 역할을 하고 작용을 하고 행위를 하는게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렇게해서 이 세상이 굴러갑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되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진인사 대천명이야말로 부처님의 연기사상, 실천적으로 말하면 중도를 우리가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걸 명심했으면 합니다. 오늘은 중도라는, 잘 알고 있지만 자칫 잘 못 이해되기 쉬운 불교의 중요한 개념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