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치인에 대한 불교적 기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율이 26%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불자들은 어떤 정치인을 뽑아야 할까요? 불교에서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인의 기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후보자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이나 한국사회에 제시하는 비전 등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직과 헌신의 두 가지 덕목이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직과 헌신은 상당히 평이하고 평범한 기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중요한 기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직,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정직하다고 이야기할 때 첫 번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의 오계 중 하나가 망어중죄(妄語重罪)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의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의 두 번째 의미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양설중죄(兩舌重罪)로 여깁니다.
세 번째는 핵심을 말하지 않는 말입니다. 말은 번지르르한데 핵심이 없는 말, 빙빙 돌려 하는 말, 어렵게 말해서 상대방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기어중죄(綺語衆罪)라 하여 큰 죄로 생각합니다.
정직해야한다는 말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망어중죄, 양설중죄, 기어중죄의 세 가지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 매일 외우는 천수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현실생활에서 실천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헌신, 자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며,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험한 말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악구중죄(惡口衆罪)라 하여 나쁜 말, 험한 말을 하는 것을 큰 죄로 이야기합니다.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말로써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네 가지는 모두 입으로 짓는 업인 구업(口業)입니다.
한편 헌신을 하겠다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비심이 가득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 중 가장 첫 번째는 불살생(不殺生)입니다. 불살생 계율을 단순히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보다 폭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살아있는 생명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존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자비심이 가득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자비심이 있어야 상대방을 헌신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을 판단할 때도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불살생의 계율을 잘 지키는가, 마음속에 자비심이 넘치는가 하는 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심이 넘친다는 것은 나의 이익보다 상대방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두 번째 계율이 바로 불투도(不偸盜) 즉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율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가로채지 않고 사음하지 않는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제로 도둑질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남에게 가야 하는 것을 중간에 가로채는 것,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도둑질입니다. 이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절도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가야 마땅한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을 두고 사회경제학적 용어로 착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수록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몫이 일부 소수 사람에게 흘러가기 때문에 부의 양극화가 심해집니다. 남의 것을 뺏지 않고, 남에게 가야 할 것을 중간에 가로채지 않는 자세로 사는 것이 바로 불투도의 죄를 짓지 않는 것이며 헌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위정자에게는 세상의 흐름과 사회시스템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계율은 불사음(佛邪淫),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가까운 영장류인 침팬지나 원숭이는 작게는 50여 마리, 크게는 150마리 남짓 무리를 지어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그 안에서는 공동양육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누가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동체를 가지고 있기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것이 자녀의 양육에 가장 중요한 단위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을 지키는 것, 사음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자세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열 가지 계율을 요즘 말로 치환하면 정직과 헌신입니다. 정치인, 공직자 더 나아가 대중 앞에 나서는 연예인과 같은 공인이라면 이 두 가지 덕목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불자의 삶의 자세이자 공직자의 덕목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부처님의 길을 가는 불제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위에는 부처님이 있고 그 중간에 수행자가 있고 그 아래에 중생이 있는 수직적인 구도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실존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하여 부처님이 된다고 했을 때,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사라지고 부처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마음속에서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부처입니다.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인 것입니다.
중생의 몸을 가지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 가지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하면 내 마음속에서 온갖 고통을 만들어내는 번뇌가 다 사라지고 부처가 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이 이야기 한 열 가지 계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자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이며, 이것을 확대하면 공직자가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불자는 욕망에 휩쓸려 사는 중생의 상태를 털어내고 깨달음의 길로 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나의 한계와 굴레를 벗어던지고 모든 중생들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모든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살아야하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부처님이 이야기 한 덕목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길어올리는 유권자의 지혜
정직과 헌신의 두 가지 키워드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공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지, 두 말을 하고 있지 않은지, 말을 빙빙 돌려서 하고 있지 않은지, 상대방에게 험한 말을 하고 있지 않은지, 자비로운 마음을 내지 않고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가 곧 정직한 품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고자 노력할 때 모든 행동이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하는 쪽으로 회향됩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할까요? 과연 저 사람이 정직한가? 개인의 사심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인가? 이것을 잘 가려내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 내면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를 갈고 닦는 것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