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7

참선을 하면서 마주치는 네 가지 경계(장애)와 이를 극복하는 방법.
화두 참선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혼침하거나 망상을 하고 조금 지나면 화두를 들기는 들되 화두(생각의 머리)가 아니라 화미(생각의 꼬리)에 끌려다니다가 결국 염화두를 하게 된다.
염불하듯 화두를 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누구” “대체 어째서”라는 질문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궁금증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다음 단계로 이 궁금증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살펴야 한다. 염불로 시작하여 결국은 궁금증이 어디에서 시작됐는가를 탐구하는 과정이 염불시수 화두이다.
수행하면서 환시, 환청, 특별한 체험을 하는 마장이 생길 때에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랬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야 한다.
궁극적으로 참선의 목적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다. 삼매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백척간두 진일보하여 연기실상을 보는 본연의 목적으로 성큼 다가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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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참선경어(56p)

다만 중생이 미혹하여 생사에 빠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탐진치애와 망상집착의 오염이 이미 깊은 까닭에 부득이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할 뿐입니다.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성품을 보는 선결조건은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56쪽의 첫 단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선요지>의 첫 번째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전반부는 자성에 대해 묘사하고, 다섯 번째 줄까지는 자성, 연기, 한 물건, 불성 등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광대하게 넓은 자성의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미혹에 빠져서 오염에 깊은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은 자성을 보는 것인데 탐진치애와 망상집착에 오염되어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혀서 즉 망상을 제거해서 자성을 본다는 것이 첫 번째 단락에서 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요지>의 첫 번째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사어록이나 간화선 관련 서적들을 파고들어가면 결국 이 내용으로 귀결됩니다. 참선의 목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자성과 불성, 진여 쪽으로 생각하고, 생각은 망상으로 분리해서 용어를 규정하자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망상과 연기실상이 별개인 것은 아닙니다만 언어의 용도를 그렇게 구별해서 생각할 때 이해하기가 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결국 이것도 참선의 목적의 다른 표현입니다.

수행의 네 가지 경계… 1. 혼침 2. 염화두

이어서 57쪽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20여 일 동안 여러분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힘써 공부했으나, 그 결과는 다음의 네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7주간 수행을 하는 동안 반을 했는데, 네 가지 경계 즉 장애, 극복해야할 난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중 네 가지는 전 시간에 이야기했던 신참자의 어려움 두 가지, 구참자의 어려움 두 가지를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경계를 이야기하고 각각의 경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공붓길에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화두가 잘 보이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대중을 따라 졸고 있으니, 망상이 분분하게 일지 않으면 혼침에 떨어져 흔들리는 것입니다.

아직 공부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공부가 안 되어서 망상이 많거나, 망상을 피우지 않으면 졸음에 빠지는 등입니다. 잡생각을 하거나 졸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 초보자는 둘 중 하나를 왔다갔다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굳이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잠깐이라도 앉아보신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둘째, 화두가 보여서 좀 잡히는 것이 있으나 (……) 그것이 염화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화미상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고 끝내 일념무생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말의 머리를 봐야 하는데 화미 즉 말의 꼬리만을 파고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생각의 꼬리, 생각의 결과만을 파고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무(無)자 화두를 든다고 하면, 생각으로 다른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갑니다. “개는 인간보다 하등해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개가 전생에 죄를 지었나?” 이렇게 생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보아야 하는데 생각(망상)에 마음을 뺏기는 것입니다.

염화두라는 것은 “왜 그럴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미입니다. 그런데 몇 번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해보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봐야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질문하기를 그치고 마치 염불을 하듯이 화두를 되뇌어 읊기 시작합니다. “무(無)라, 무(無)라….” 염불하듯 화두를 한다고 해서 염화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멸법입니다.

화두는 생각의 머리를 보는 것이고 생각의 머리는 망상이 일어나기 전,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부처를 보는 것이고 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화미는 의문을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생각에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의문을 푸는 데에 밑천이 드러나면 염불하듯이 화두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혼침하거나 망상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다가, 조금 지나면 화두를 들기는 들되 화미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염화두를 하게 된다고 허운스님이 말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드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잘못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수행의 네 가지 경계… 3. 헛것이 보이는 마장

셋째, (……) 이내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어디 앉아 있는지 모르고, 어떤 사람은 몸이 가볍게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고, 어떤 사람은 두려운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일으키며, 또 어떤 사람은 음욕이 일어나는 등 갖가지 경계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것은 모두 마이기 때문에 집착하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헛 게 보이는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있으면 실제로 환시나 환청이 보이느냐?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체험을 하느냐? 예, 실제로 나타납니다. 엄청나게 많이 수행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요. 하안거 동안거 3개월씩 2~3년 정도만 선방에 다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계 중의 하나는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주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환청이 잠깐 들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심할 때는 안거 기간 내내 들리기도 합니다. 벽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 자기 자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 이런 경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정확한 과학적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루어 추정하기에 수행을 하기 전에는 마음이 항상 바깥으로 끌려다니기 때문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다가, 수행을 하면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진정시켰을 때에는 마음속에 있는 온갖 생각들이 이런 경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이런 것을 흔히 마장이라고 말합니다. 마장에 집착하게 되면 그 생각이 또 망상이 되어 자기를 괴롭힙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런 마장에 휩쓸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그 생각 자체로 망상이 됩니다. 때문에 이런 경계에 마주치게 되면 ‘아. 이런 현상이 나타났구나.’ 하고 끝내야 합니다.

환청이 들린다고 할 때 ‘이런 소리가 들릴 시간이 아닌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환청인가보구나.’ 하고 넘어가야지 ‘아, 환청이 들릴 정도로 공부가 좀 되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보다 하고 무시하는 게 최고입니다. 이것은 선방에 다니는 수좌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수행의 네 가지 경계… 4. 백척간두

넷째, (……) 아주 맑고 상쾌하며, 망상이 쉬어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자유로우며 어떤 경계도 없습니다. (……) 다만 마른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은 경계 앞에 많은 갈림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 약간의 지혜를 얻어 시문이나 지으면서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아만이 높아집니다.

다음 네 번째 경계는 지난 시간에 말했던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계입니다. 대나무 꼭대기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진일보하지 못하고 대나무 꼭대기에 가만히 있는 경계를 말합니다. 이 경계는 제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 더 설명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해결 1. 화두는 궁금증으로 꽉 차는 것

이상의 네 번의 경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이어서 나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화두가 아직 잘 보이지 않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래도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할 때의 그 “누구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염불시수 할 때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염불하듯 화두를 해서는 안되고, 누구인가를 보아야 한다고 나옵니다.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은 질문입니다. 의문이지요. 누가 도대체 염불을 하고 있지? 하고 궁금증이 가득찬 상태입니다. 사람일까? 영혼일까? 깊은 무의식일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염불을 하고 있지? 하는 궁금증이 이어져야 합니다.

무자 화두를 예로 든다면, ‘어째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조주스님이 도대체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조주스님이 말씀하시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존경하는 스승님이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말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꽉 찬 상태가 바로 화두를 든 상태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는 이유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렇게 말했을까? 그 의문이 마음속에 가득찬 상태가 화두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해결 2. 염화두에서 염불시수 화두로

둘째,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말에 집착하여 화미 상에서 마음을 쓰고 생멸법을 옳다고 여기는 분들에 관해서 (……) 위에서 말한 뜻에 비추어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일념무생을 보면 됩니다.

궁금증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 화두를 들 때 이렇게 할 것입니다. 가볍게 앉아서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짧게 합니다. 정근을 하다보면 내 귀에 목소리가 들리고 입모양이 바뀌고 소리를 냅니다.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할 의도도 내지요. 도대체 ‘관’이라고 말하고 의도를 내는 이것이 누구인지, 그 궁금증을 계속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누구지?’ 라는 궁금증이 계속 이어지면 이어질 때 그 때, 궁금증이 일어나는 곳을 보아야 합니다. 궁금증이 어떻게 시작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염불시수 화두는 3단계로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시작을 하기 위해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마음속으로 1~2분 정도 합니다. 여기서는 정근이 목적이 아닙니다. 정근을 하는 것이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염불을 하고 있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기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이 궁금증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때가 되면 정근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보는 것은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2단계에서 망상이 들어서 화두(궁금증)가 사라져버리면 다시 염불을 하면서 궁금증을 일으키고, 궁금증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을까 하고 궁금증을 관찰합니다. 3단계에서 궁금증을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흩어지려고 하면 다시 궁금증을 관찰하는 것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화두, 마음의 길을 들이는 과정

화두라는 것은 좌선의 자세같은 것을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때 할 수도 있고,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할 수도 있고, 카페에 앉아서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가부좌 자세로 하는 것이 한 자세로 오래 있을 수 있는 자세이기 때문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요가가 아닙니다. 어떤 자세를 잡고, 어떤 자세로 오래 있고 하는 것은 간화선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간화선의 관심은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마음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길을 들여야 합니다. 길을 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헛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길이 들기 전에는 망상을 피우거나 졸면서 시간을 허비하면서 보냅니다. 그 시간에 강의를 듣던가 책을 보는 게 더 좋을 텐데,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내 안에서는 조금씩 화두를 드는 길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일념무생을 보면 된다고 하는데요, 첫 시간에 말씀드렸듯 공간적으로 사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는 공간적으로 표현됩니다. 시각 정보는 공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시각 정보가 인식의 70% 이상 차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간적으로 이야기하고 이해하기를 좋아합니다. 실제 여기와 저기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면 되는 것입니다.

해결 3. 현상을 현상으로 지나보낼 것

셋째, 무념을 관하면서 이미 적정과 경안을 얻어 어떤 경계에 도달한 분들에 관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본참화두만 비추어 살피되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마구니가 오면 마구니를 베면서, 일절 그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연히 일이 없고 온갖 삿된 것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뭐가 보이고 환청이 들리고 마구니가 나타나는 분들. 이런 분들은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이러면 안되는데. 화두를 들어야 하는데.’ 혹은 ‘이정도가 될 정도면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각으로 환시로 허깨비로 마구니가 나타났다면 ‘나타났구나’ 하고 지나가면 됩니다.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베라는 표현은 이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말고 무시하고 넘어가라는 것이지요.

해결 4. 참선은 목적 아닌 도구

네 번째 상황에 대한 처방도 나오는데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무어라 설명 드릴 말이 없고요. 그 다음 이어지는 문단을 요약하자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선은 깨달음으로 가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참선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선이 목적이라면 오랫동안 앉아있고 오랫동안 망상을 안 피우는 것에 그칩니다. 그러나 참선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망상을 걷어내고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선의 목적과 같습니다.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이지요.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결국 참선은 성품을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성품을 봅니까? 번뇌망상에 오염된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연기실상을 보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성품을 보려고 하느냐? 이 말은 왜 참선을 하느냐?와 같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기실상의 세계를 봐야 하며, 그러자면 망상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참선의 목적은 진정한 행복입니다.

자성을 보는 것은 콩깍지를 벗겨내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증득한다,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표현할 때, 깨달음이라고 하는 뭔가가 나의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표현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눈에 뭐가 씌어서 보지 못하는 것을 단지 눈에 씐 뭔가를 걷어내고 보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상대방의 좋은 면만 보게 됩니다. 자성을 보는 것은 그런 콩깍지를 벗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끼워져 있는 망상번뇌를 걷어내는 것입니다. 망상번뇌에 집착하다보니 계속해서 망상번뇌를 덧씌우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망상번뇌를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자성을 보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보다가 “누구인가”가 잊혀지지 않을 때,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십시오. (58p)

이것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해보아야 합니다. 남이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염불하는 것이 누구인가?” “그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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