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2

마음은 말의 머리요, 생각의 머리요, 만법의 머리이다. 이것이 곧 화두(話頭)이다. 화두를 관할 때는 내 머릿속에서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아닌 연기실상의 세계, 실상을 관해야 한다. 간화선은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 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들 때, ‘부처님께 절을 하는 나’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느낌 그대로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느끼고, 망상드르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생각들이 어디에서 생겨 어디로 사라지는 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육근을 거두어들이고 마음을 고요하게 관찰할 때, 어느 순간 홀연히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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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의 목적 복습, 참선을 왜 해야 하는가?

지난 시간,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문장을 부연설명한 것이 ‘1. 참선의 목적’입니다. 이 단락의 첫 번째 문장 ‘마음을 밝힌다’고 하는 참선의 전제 조건을 부연설명한 것이 ‘2. 온갖 연을 놓아버림’입니다. 이 단락의 두 번째 ‘성품을 보는 것’을 부연설명한 것이 ‘3. 성불의 길’입니다.

결국 17페이지 참선의 목적부터 21페이지 성불의 길 까지는 첫 번째 문장인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을 부연설명한 것입니다. 핵심은 첫 번째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참선의 전제조건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참선의 목적입니다. 목적이라는 것은 참선을 왜 하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참선을 왜 합니까?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합니까? 그러면 멋있어보이니까 합니까? 지적 호기심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올바른 이유가 아닙니다. 참선을 왜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 설명을 17페이지부터 21페이지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선을 해야하는 이유를 확실하게, 깊이, 뼈저리게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시작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인데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성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이고, 자성의 참모습을 실답게 본다는 것은 모든 부처와 중생이 다 함께 갖추고 있고 둘이 아니고 서로 별개도 아닌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염이란 망상과 집착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선의 선결조건입니다.

망상과 집착을 제거한다는 것은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연은 보고 듣고 맛보고 촉하고 냄새 맡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이런 인연을 놓아버림으로써 생각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털어내야만 참선의 목적인 자성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부처를 본다는 말이고, 둘이 아님을 본다는 말이고, 서로 별개가 아님을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지난 시간의 핵심은 ‘내가 왜 참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참선을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 참선의 전제조건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이번 시간에는 참선을 하는 방법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4. 화두참선법(22p)

예전에는 법이, 깨달음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후대에는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해져 이심전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부득이하게 독으로써 독을 다스리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목적은 한 생각으로 무수한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인데, 실로 이는 부득이한 방법입니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참선의 선결조건은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연은 생각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며, 밖에 끄달려서 생기는 인연은 다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법은 하나의 생각으로 부득이하게 많은 생각을 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안이고 화두입니다.

공안과 화두는 같은 말입니다만, 각각의 단어를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공안은 공공기관에서 배포한 문서입니다. 옛 당송시대에 쓰던 행정문서가 공안인 것이지요. 행정문서이므로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문서인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큰스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공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안,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 스승의 말

예를 들어 조주스님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합니다. “무(無)라.” 제자가 조주스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생각하면 조주스님의 말이 맞는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만유불성이라, 모든 존재에는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스님은 없다고 하니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절대로 오류가 없는, 틀린 말을 하지 않는 어른께서 ‘없다’고 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공안이라는 것은 공안을 내리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습니다.

공안은 큰스님이 이야기 한 말의 절대적인 권위가 마치 관공서의 행정문서와도 같다는 측면에서 사용하는 것이고요. 화두라는 표현은 23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입니다. 만법萬法은 모두 마음에서 생겨나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마음은 말의 머리요 마음은 생각의 머리요 마음은 만법의 머리입니다. 이 구조를 볼 때 말, 생각 만법은 같은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화두, 말의 머리 생각의 머리 만법의 머리

말의 머리를 한문으로 쓰면 화두話頭가 됩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곧 마음인 것입니다. 화두를 본다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왜 화두는 말의 머리일까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하려면 무언가를 보고 그 무언가의 이름이 내 안에 이미 입력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만법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만법이라 하면 내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부처님이 말한 법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 사물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가 생각과 동일하고 모든 존재가 말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이 참 파랗다’고 말할 때는 하늘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아무리 쳐다봐도 하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생각, 말, 이름(만법)은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 만들어낸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에 부여한 이름의 총체가 존재이고 이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생각과 마음을 분리해서 놓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인연이 지어지면 그때그때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고, 가치판단을 부여해서 지양해야 할 것 이라는 부정의 의미가 들어가면 망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모여진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이 세계이며, 이 세계의 실상은 말이나 생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머릿속 이미지가 아니라 실상을 관하라

이 세계의 실상을 노가에서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고 표현하고, 불교에서는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사라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이미 실상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실상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자성이고 성품입니다. 간화선, 간화두라는 것은 실상을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경을 읽는 것은 누구인가?” “주문을 지송하는 것은 누구인가?”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밥을 먹는 것은 누구인가?”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누구인가?”를 보라고 말해도 다 같은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나’라는 것이 말은 같은데 사실은 다릅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할 때 ‘나’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인가요? 나는 남자다, 나는 고향이 어디다, 나는 몇 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내 생각 속에 이미 이미지화 되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이것, 지금 주문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말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표현하는 것과 이 구절에서 나열하고 있는 질문과는 다릅니다. 결국 이런 것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생각이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일어나게 만들려면 생각 이전에 있어야 하므로 생각의 머리가 됩니다.

“부처님께 절하는 것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생각이 나오는 그 자리는 도대체 무엇인가?”입니다. 한 생각이 나오기 이전의 그 자리를 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이 표현하기를 화두는 생각의 머리, 말의 머리, 만법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 곧 화두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화두를 보는 것이 곧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생각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생각이고, 일어나기 전은 머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라는 말은 곧 생각의 머리라는 말이고, 그것을 한문으로 쓰면 화두가 됩니다. 즉 말과 생각과 만법의 머리가 마음인데, 그것을 한문으로 쓰면 화두이고, 화두를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본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관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본다는 말을 뜯어보면 보는 무언가가 있고 보는 대상이 있습니다. 본다는 말을 쓰는 순간 주체와 객체가 나눠집니다. 때문에 본다는 표현보다 관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마음을 관하는 것, 마음을 느끼는 것

관하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 말을 하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이것에 대한 느낌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음을 보는 것은 마음을 관하는 것이고 그것은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어서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품은 바로 마음이며, “들음을 돌이켜 자기 성품을 듣는다反聞聞自性는 것은 관을 돌이켜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反觀觀自心입니다.

즉 참선의 목적은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이며, 어떻게 보냐하면 들음을 돌이켜서 봅니다. 이것은 참선의 선결요건인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마음을 밝혀서 자기 마음을 본다는 말을 자기 성품을 듣는다고 달리 표현했을 뿐 본질은 같습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나에 대한 느낌을 놓치지 않고 계속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두, 생각의 머리 즉 마음을 본다는 것은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각이 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느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24페이지에 달리 표현해놓았습니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을 원만히 비춘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곧 마음이며, ‘비춤이 곧 관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를 염하는 것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마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관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든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비슷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단락도 같은 말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관하는 것,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를 관하여 비추는 것이고, 자기 성품의 부처를 관조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음은 경계 없이 두루한 것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 법계에 두루하며,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청정법신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마음을 생각하면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엇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내 안과 밖을 나눈 것입니다. 그렇데 제일 앞에서 자성이라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지 않습니까? 내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의 머리, 생각에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부연설명하기를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다 합니다. 경계를 지어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없다는 말은 두루한 것이고, 나눌 수 없는 것이고, 별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때 내 마음을 느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마음을 내 안에 있는 무언가로 구분지어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야 합니다. 화두참선으로 그 마음을 느끼고, 생각(망상)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캐치함으로써 그 생각들이 어디에서 생겨 사라지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육근을 거둬들이고 마음을 관찰하라

생각이 생하고 멸하는 것을 다 거두어서 생각이 다 가라앉으면 비로소 참선의 선결 조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망상이 제거된 것이지요. 여기에서부터 마음을 고요히 관찰하게 됩니다.

수행인이 육근을 모두 거두어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보아 가며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살피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 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아주 면밀하고 담담하게 그것을 고요한 가운데 비추면, 바로 오온이 모두 공하고 몸과 마음이 함게 고요해져서 전혀 아무 일도 없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려면 무언가를 보고, 듣는 등 육근을 통해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생각이 생기고 멸합니다. 그 육근을 거두어 들여서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난 곳, 바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려면 생각 생각을 떠나야 합니다. 생각이 생멸하는 작용을 멈추어야만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공부인이 화두를 볼 때는 마치 기와조각을 만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하여 7일 만에 깨닫지 못한다면 내 머리를 잘라가라.”

화두를 볼 때 이렇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깨닫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까요? 화두, 말의 머리를 보지 못하고 화미, 말의 꼬리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염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염불하는 나를 느끼려고 하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라며 이미 대상화되어 버린 나라는 이미지, 말로 표현되는 나, 나라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해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말과 생각으로 이뤄진 세계 즉 만법으로 이뤄진 세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두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화미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두를 들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아도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습니까? () 평생 언구와 명상(개념)에 집착하여 화미에서 마음을 쓰면서, “화두를 비추어 살펴라하며 계속 하다 보니 화두와는 정반대로 어긋납니다.

정리하자면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보는 것이고, 마음을 보려면 먼저 마음을 밝혀야 하는데, 마음을 밝히는 것은 생각생각 생멸하는 것이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생멸을 끊기 위해서는 육근을 모두 거두어들어야 합니다. 둘이 아닌 것,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 그 무엇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는 방법 즉 화두 참선하는 방법에 대해 방금까지 설명한 데 이어 지금부터는 공부함에 있어 초심자는 어떤 어려움이 있고 구참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5.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초참자의 쉬운 곳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신심과 장영심과 무심만 갖추고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신심이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삼세의 제불중생과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고,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은 생사를 요달하여 성불하는 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신심이라 하는 것은 ‘생각과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망상이고 생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둘이 아니고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망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실상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과 나 아닌 것을 나누지 말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이며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면 부처라는 것. 나와 남의 경계가 사라진 경지가 있으며 그 경지가 바로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장영심이란, 어느 한 법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함은 물론 내생과 그 이후의 생에서 모두 이와 같이 지켜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참선도 있고 염불 계율 주력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잡고 꾸준히 하라는 것이 장영심입니다. 세 번째는 무심입니다. 육근을 거두어들여서 마음을 텅 비워야만 앞에서 말한 마음, 성품, 청정법신불의 경지를 관할 수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가 초심자가 극복하기 어려운 어려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발심의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고 참선을 하며 화두를 본다면, 바로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를 보십시오.

이 문장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세 가지 마음이 바로 본격적인 화두 참선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곧 부처라는 확고한 믿음, 하나의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는 마음, 인연 따라 생멸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비로소 참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실전, 참선하는 방법

여러분 스스로 묵연한 마음으로 몇 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하고 나서 이 염불하는 것이 누구이며, 이 한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보십시오. 이 한 생각은 내 입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내 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 몸이나 입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내가 죽었다고 할 때 내 몸과 입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왜 염불을 못합니까? 이 한 생각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한 번 보게 되면 계속 주시하여 곧장 바라보며 나아가되,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처럼 모든 정신을 여기에 집중하여 일체 딴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완급을 적당하게 해야지, 너무 급하게 해서 병의 장애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화두를 드는 방법입니다. 본인이 평소에 즐겨 하는 염불을 몇 번 마음속으로 외워보십시오. 관세음보살 염불을 한다고 하면, 무엇이 이 염불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이라고 마음속으로 떠올릴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의도를 느끼는 것입니다. ‘관’이라고 떠올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변화하는 느낌에 마음이 집중됩니다. 그 상태를 이어가는 것이 화두입니다.

만약 입이 관세음보살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되어서도 입이 염불을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로 그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며,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느낌을 관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내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으로 몰입됩니다. 이것이 육근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홀연히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두참선은 “염불하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으로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말을 하다가 ‘관세음보살’이라고 말을 하기 직전의 느낌을 관찰하게 되고, 이 느낌을 오래도록 유지를 하게 되면 기왓장 깨지는 소리에 홀연히 깨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늘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 짓던 내가,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그저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거나 내 삶의 레벨이 업그레이드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치적으로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상태를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그래서 나와 남을 나누는 뿌리 깊은 잘못된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화두참선은 직지인심,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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