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1

근현대 중국불교 중흥조 허운스님의 ‘참선요지’로 공부하는 온라인 참선 강좌.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자성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이다.
참선의 선결 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제거한다는 말은 분별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는 보는 것이며, 이는 참선을 하는 목적이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 밖의 모든 것들과 내 마음이 부딪쳐서 생멸하는 생각이 없어져야 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생각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을 돌이켜 통찰하는 것이 화두이며, 그 결과로써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은 모두 거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전, 수행, 참선, 참선요지, 화두

https://youtu.be/qsVPdqsu47c

참선과 <참선요지>

온라인으로 참선강좌를 하는 첫 날입니다. 참선강좌의 교재로 <참선요지>를 선택했습니다.

참선이나 좌선, 화두공부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텍스트로는 <서장>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서장>은 대보각대사께서 당시 선배들과 주고받은 편지이기 때문에 일관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정리된 책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또한 사용되는 용어들이 너무나 생경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상당히 높아 이 책을 보더라도 참선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화두 참선과 관련해 많이 보는 책 중 하나가 성철스님의 법문집입니다. 이 역시 일반인들이 보기에 쉽지 않고 더욱이 그 내용이 화두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게 권하기에 녹록한 텍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빠사나를 한다고 하더라도 교재를 잘 골라서 봐야 합니다. 위빠사나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단계를 밟아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 <참선요지>가 불교 입문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허운스님은 근현대를 사신 분이어서 쓰이는 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고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출가 초기에 <서장>을 봐도 확 와닿는 느낌이 적었는데, 이 책을 보고서는 ‘화두를 이렇게 들면 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기에 우리 참선강좌의 교재로 권하고자 합니다. 위빠사나의 경우에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단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은데 제가 온라인상으로 그렇게 지도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먼저 <참선요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근현대불교의 중흥조, 허운스님

<참선요지>의 저자인 허운스님은 흔히 조주스님의 화신이나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근현대 한국불교를 일으킨 분이 경허스님이라면, 허운스님은 중국의 근대불교를 중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내려온 불교를 중흥한 가장 큰 역할을 한 분 역시도 허운스님입니다. 허운스님은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쇠락한 절을 다시 복원하는 등 중국 근현대불교사상 큰 역할을 했고 심지어는 중국이 공산주의화 된 후에도 불교의 맥을 이을 수 있도록 노력하셨습니다. 허운스님의 일대기는 이 책 255페이지에 ‘허운화상 약전’이라 하여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차분하게 읽어보면서 허운스님이 누구인지를 알아 가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크게 삼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참선요지, 2부 선칠개시, 3부 수시설법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과거 문고판으로 처음 나왔을 때에는 1부 참선요지의 부분만 발췌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보고 공부를 했고요. 2부와 3부는 이 책을 새로 판을 만들면서 추가된 것으로 소참법문을 정리해놓은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는 1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1장 참선의 선결조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참선을 하려면 먼저 해결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을 먼저 구비해야 참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 참선의 목적(17p)

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30페이지까지 기술되어 있는 참선의 선결조건은 아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거의 외우다시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두참선에 필요한 이해를 돕기 위한 텍스트를 보는 것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책을 보는 것과는 방식을 달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볼 때는 전체적인 구성이나 논리적인 흐름, 큰 줄기와 핵심 내용을 이해하면 되겠지만, 실참을 위해 가이드를 받기 위해 텍스트를 볼 때는 그 내용이 완전히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여 나의 언어와 나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를 아주 꼼꼼히 들여다보며 외우다시피 한 후에 실참을 하며 필요할 때 복기해야 합니다.

첫 번째 문단을 꼼꼼하게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 관련 책이나 자료를 보신 분들이 언뜻 보기에는 자주 보던 패턴의 문장이기 때문에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겠지만,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선의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품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성품을 보는 것이 참선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밝힌다고 하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문장에 참선의 조건과 목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참선의 조건은 마음을 밝히는 것이고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그 다음 문장에서 다시 부연 설명합니다.

,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여 자성(自性 자기의 본래성품)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입니다. 오염이란 곧 망상과 집착이며, 자성은 바로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입니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보는 것은 자성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마음을 실제로 환하게 밝히는 것이 아니고 오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성품을 본다는 말은 자기의 본래 성품, 참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합니다. 오염을 제거하는 것은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성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선의 목적은 성품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은 남의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을 실답게 보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고,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밝혀야 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말은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성을 보는 것이 성품을 보는 것, 즉 참선의 목적인데, 그 자성이라는 것은 여래의 덕상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를 다음 문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함께 갖추고 있으며, 둘이 아니고 서로 별개도 아닙니다.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 덕상을 증득證得하니 이는 곧 부처이고, 그렇지 않으면 중생입니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된 지 오래여서, 그 자리에서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본성(본래성품)을 실답게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의 선결조건은 바로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여래의 지혜와 덕성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둘이 아니고 세 번째, 서로 별개도 아닌 것입니다. 여래의 지혜와 덕성이라는 것이 무언가 특별한 것,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지혜와 행동의 기준, 여래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 ‘이것은 마우스다.’라고 규정을 하는 순간 나머지는 ‘마우스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둘이 아닌 상태는 ‘이것의 마우스다’라고 규정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이름 붙여 규정하는 순간 둘이 되어 버립니다.

있다 없다로 나누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바로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지는 별개가 아니라는 것은, 부처가 따로 있고 부처의 지혜가 따로 있고 부처의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고 나면 분별하는 모든 것이 벗겨진 세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닌 저것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자성을 본다’는 것의 정확한 이해입니다.

참선의 선결 조건, 망상을 제거하는 것

참선의 선결 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해야지만 비로소 제대로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망상을 제거한다는 말은 둘로 나누기 이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볼펜이다.’ 라고 한다면, 볼펜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분별하기 이전의 모습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망상은 어떻게 제거합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가장 간단한 것으로는 쉬면 곧 깨달음이라는 말씀의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가 중국에 전래하여 육조 혜능대사에 이른 뒤부터 선풍禪風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치고 빛났습니다. 그러나 달마대사와 육조스님이 학인들을 가르친 가장 긴요한 말씀으로는 모든 연을 함께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병식제연 일념불생 屛息諸緣 一念不生)”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연을 함께 쉬어버린다함은 곧 온갖 연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며, 그래서 온갖 연을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기 않는다(만연방하 일념불생 萬緣放下 一念不生)”는 이 두 마디 말이 실로 참선의 선결조건입니다. 이 두 마디 말에 이르지 못한다면 참선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문禪門에 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온갖 연에 뒤덮이고 휘감겨 생각 생각이 생멸한다면 여러분이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쉰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모든 연을 함께 쉬어버린다[屛息諸緣]’입니다. 이렇게 쉬면 그것이 곧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一念不生]입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연을 함께 쉬어버려야 합니다. 모든 연을 함께 쉰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온갖 연을 놓아버리는 것[萬緣放下]입니다.

연을 모두 쉬어버리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결과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연(緣)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앞에 무언가 있어서 그것과 내가 연이 닿아서 보면 인연이 만들어지고, 들리는 무언가 있어서 듣게 되면 듣는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촉하는 인연이 성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면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작용들을 멈춰야 합니다. 그 결과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묻고 있습니다. ‘온갖 연에 뒤덮이고 휘감겨 생각 생각이 생멸한다면 여러분이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 생각이 생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니라 온갖 연이 뒤덮이고 휘감기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곧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모든 것들에 마음이 가서 내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생겼다고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바깥에 있는 것들과 계속 부딪치는 과정에서 마음속에서 생각 생각이 일어납니다.

내 밖에 있는 것과 부딪치는 작용을 놓아버리기

그래서 쉰다는 것, 놓아버린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것들과 내가 부딪치지 않는 것입니다. 부딪치는 작용들을 다 쉬어버리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일념불생이 되고 일념불생이 되어야만 자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의 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고,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 밖의 모든 것들과 내 마음이 부딪쳐서 생각이 생멸하는 과정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망상을 여읠 수 있습니다.

오염이라는 것은 망상과 집착입니다. 왜 내가 내 앞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과 부딪쳐서 생각 생각을 일으키느냐?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집착합니까? 내 앞에 있는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듣고 있다’ 하는 ‘나’에 집착합니다. 나와 다른 무언가가 인연을 맺어서 생각이 생하고 멸합니다. 그것이 바로 망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선의 목적은 자성을 바로 보는 것이고, 자성을 바로 보려면 망상과 집착을 여의어야 하고, 망상과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내가 있고 나 아닌 무언가가 있어서 나 아닌 무언가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이 망상을 일으키는 이유임을 알고 이를 제거해야합니다. 참선을 하려면, 자성을 바로 보려면 제일 먼저 망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허운스님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온갖 연을 놓아버림(18p)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본성을 보는 것이고,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모든 연을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상과 집착을 여의는 것이고, 그 내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이 ‘2. 온갖 연을 놓아버림’입니다. 참선의 선결조건인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이 단락에 자세하게 기술됩니다. 이어서 ‘3. 성불의 길’에서는 참선의 목적인 자성을 보는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온갖 연을 놓아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먼저 참선에 있어 아주 수승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온갖 연을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것이 참선의 선결조건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해낼 수 있습니까? 근기가 수승殊勝한 사람은 한 생각을 아주 쉬어버려 곧바로 무생無生에 도달하고 단박에 보리菩提를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얽매임이 없게 됩니다. 그 다음 근기의 사람은 이치로 현상을 물리쳐서, 비로소 자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은 모두 거짓 이름일뿐 본시 나의 자성과 무관함을 명료히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다 꿈이요 환이요 물거품입니다.

이치로 현상을 물리친다는 것[이이제사 以理除事]은 주석에 나와 있습니다. 어떤 이해나 수행법으로써 마음이 경계에 반연하는 것을 제어하고 자성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상은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냄새를 맡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이치로써 ‘아 내가 지금 저것을 보고 있구나’ 하고 보는 나의 행위를 통찰하는 것이 이치로 현상을 물리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화두 참선하는 것입니다.

이이제사는 화두 드는 것을 표현한 여러 가지 표현 중 하나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서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그때그때 바뀌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통찰하는 힘이 약하니, 한 생각을 제어하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내 안으로 돌이켜 들어가는 것

화두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돌이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돌이켜서 통찰하는 것이 화두이며 그 결과는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은 모두 거짓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핵심 교리가 무엇입니까? ‘A는 A가 아니고 그 이름일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참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고 자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라는 게 이름뿐이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들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것의 실체가 ‘볼펜’이고 실재가 ‘핸드폰’이 아니라 편의상 그 이름을 지어준 것일 뿐입니다.

망상을 여의는 방법은 한 생각을 쉬어버리는 것인데, 한 생각을 쉬는 것은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서 통찰하는 것입니다.

3. 성불의 길(20p)

참선은 마음을 밝혀서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성을 본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달마스님이 동쪽으로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셨으니, 이 세상의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임을 아주 분명하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자성이라는 것은 내 마음 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자성은 내 마음이 구분하고 나누어서 생각으로 재구성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누고 분별하고 쪼개는 행위를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성입니다. 성불, 부처를 이룬다는 말은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과 같은 말이고, 견성, 성품을 본다는 말은 둘이 아닌 것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앞서 17페이지에서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함께 갖추고 있으며 둘이 아니고 서로 별개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렇게 세상을 통찰하는 것이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성품이라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지면 이미 견성의 본래 성품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부처입니다. 마음을 쓰고 힘을 쓸 필요도 없고, 애써 어떤 행위를 할 것은 더욱 없으며, 털끝만큼도 언설이나 사유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내가 하기에 라린 것이고,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 밖의 무언가와 인연을 맺으려면 마음을 쓰고 언설이나 사유를 동원해야 합니다. 인연을 맺는다는 말을 달리 하면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저것은 컴퓨터구나.’ ‘이것은 핸드폰이구나.’ ‘저것은 그냥 컴퓨터가 아니고 좋은 컴퓨터구나.’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깨달을 수 없고, 그렇게 마음 밖으로 나갈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조스님도 <수심결>에서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고 이야기했듯, 내가 있고 내 밖에 무엇이 있다고 나누는 것 자체가 밖에서 구하는 행위입니다. 밖에서 구하는 것은 부처를 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모든 문이 다 묘법妙法이며, 모든 생사를 해결하여 성불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합한가 아닌가가 문제될 뿐, 굳이 법문의 높고 낮음을 구분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내용을 설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이것 다르고 저것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든 기도를 하든 계율을 지키든 염불을 하든 티벳의 금강승 수행을 하든,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근기에 맞는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참선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보다 쉽고 집중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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