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일요강좌, 초기불교 이해 6

아비달마 불교의 철학적 성격을 규명한다. “일체는 12처다.”라는 진리는 생문 바라문의 질문에 따른 부처님의 대답이다.
부처님은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힌두교적 사상을 토대로 “이 세상을 주재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질문한 생문 바라문에게, 세상은 브라흐만이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경험한 것”일 뿐이라고 파격적으로 답했다.
또한 아비달마에서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적 존재를 해체하는 기준으로 ‘법’을 내세운다. 5온, 12처, 18계와 같은 개념은 아비달마에서 법을 해체(그룹핑)하는 각각의 범주이다.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법을 객관적인 실재로 규정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실재’를 비판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의 실재성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법의 공상을 통찰하여 열반으로 간다는 수행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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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 불교의 철학적 성격 규명

이번 시간은 아비달마 불교가 가지는 철학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시간입니다. 5온, 12처, 18계와 같은 개념을 공부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대상’입니다. 12처의 대상, 18계의 대상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같은 대상을 놓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각각의 관계와 이들이 아비달마에서 말하는 법과는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6내입처, 외입처 하는 것들은 한 번씩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고요. 이번 시간의 핵심은 5온, 12처, 18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공유하는 핵심이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생문 바라문의 질문, 그 힌두교적 배경의 이해

보통 12처를 이야기할 때 어느 책할 것 없이 다 언급하는 것이 생문 바라문의 질문입니다. 생문 바라문이라는 사람이 부처님께 “일체란 무엇입니까?” 질문하자 부처님께서 “일체란 12처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생문 바라문의 의도와 부처님이 대답하신 의도를 알아야 ‘일체란 12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문 바라문이 질문한 것은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세상을 주재하는 근원적인 존재, 궁극적인 존재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일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주류 종교였던 브라만교(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만이 세상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개인의 정신 혹은 영혼을 아트만으로 상정합니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브라만교에서 추구하는 바이고, 브라만교에서 일체란 이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인 브라흐만을 이야기합니다. 

생문 바라문은 브라만교의 바라문이었으므로 당연히, “브라만교에서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존재를 브라흐만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것이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하는지, 물질만 인정하는지, 내지는 영혼을 인정하는가 하는 맥락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신 것이 ‘일체는 12처’라는 것입니다. 

12처는 6내입처와 6외입처를 합친 것입니다. 6내입처가 인식하는 감각기능, 감각활동, 내지는 감각기관이라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6외입처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친 것이 세계라는 것이지요. 이 말의 의미를 알면 12처, 18계, 5온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대답 : 이 세계의 근원은 인식(경험)한 것

바라문이 질문하기를, 당신이 생각하는 이 세계를 주재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무엇이냐 했더니, 부처님이 답하기를, 요즘 말로 하면 ‘주체와 객체다.’ 라고한 겁니다. 주관과 객관이며 주관과 객관을 합친 것이라는 건데요. 이 말은 표현을 바꾸면 우리가 세계라고 말하는 것[일체]은, 인식된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경험된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알 수 없고 지각할 수 없으며, 그것은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근원적인 존재. 그런 것은 없다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거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는 이것이 세계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인식된 것이 세계다. 경험한 것이 세계다. 그것 이외에는 없다. 

인식된 것이 바로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없다”고 말하면 이미 인식된 세계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에 모순이 생깁니다. 때문에 인식된 부분 밖에 있는 것을 있다 혹은 없다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 포인트입니다.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에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체는 12처일까요? 이 대답의 첫 번째 의미는 앞서 말했듯 이 세계는 인식된 것이라는 겁니다. 인식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논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사고 대상 안에 포괄시킬 수가 없습니다. 인식되지 않은 것은 논외로 빼야 하는 것이지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결합된 ‘인식 활동’

두 번째 의미는 이렇습니다. 먼저 서양철학에서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따로 있음을 전제로 하여 존재론을 전개해가는데요. 부처님께서는 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모두 합친 것이 곧 세계라고 말합니다. 

서양철학 존재론의 핵심은 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탐구인데요. 이런 사고는 인식하는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주체가 인식하는대상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냐? 현상의 이면에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탐구해나가는 것이 존재론이라는 겁니다. 주체와 대상을전제한 그 위에서 무엇이 가장 근원적인가를 탐구하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를 나누지 않고 그 전체가 다 세계라고 말한 것이지요. 주체와 객체로 나누기 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존재론의 가장 큰 특징은 주체와 객체를 전제로 깔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식 과정, 경험, 인식 활동이 곧 우리가 말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바로 세계다, 라고 부처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달마의 법 : 관념적 존재를 해체하는 기준

이야기를 다시 초반으로 돌려서, ‘법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법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법의 자상입니다. 모든 법에 공통되는 성질인 법의 공상은 찰나 찰나 생하고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달마에서 불교라는 것은 관념적 존재를 법으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왜 해체하는가?우리가 흔히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런 ‘나’, ‘책’, ‘산’과 같은 관습적인 실재를 법으로 해체하면 허상이며 환(幻)이라는 것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체득하기 위해 법으로 해체하는 것이고, 각각의 법 역시도 공상으로써 찰나 생 찰나 멸하는 무아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찰함으로써 법 자체의 공함도 체득하고 열반에 이른다고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철학적인 사고를 하는 이유와 목표는 분명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말한 관념적 존재, 관습적인 실체,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없다’는 것을 법으로 해체하는 과정으로 아공을 체험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비달마 불교입니다.

5온, 12처, 18계는 법을 해체하는 각각의 범주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아비달마 불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존재는 궁극적인 실체 즉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비달바 불교에서 법으로 해체되는 대상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존재이며 개념적으로 재구성된 것이 바로 대상입니다. 이것이 법으로 해체되어 공의 도리를 깨치게 되는 것인데요. 

5온이다, 12처다, 18계다 하는 것들은 따지고보면 법을 온, 처, 계라는 나름대로의 틀로 범주화한 것입니다.

5온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색온은 물질현상, 식온은 마음, 수상행온은 마음에 부수되어 따르는 마음부수, 한자로는 심소(心所)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합쳐서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이 유위법에 무위법인 열반을 합쳐서 큰 네 가지 덩어리가 제법입니다. 제법을 물질, 마음, 마음부수, 열반의 네 가지로 분류하여 궁극적인 실재라고 아비달마에서는 말합니다. 

반대로 말해 이 궁극적인 실재 네 가지를 ‘온’이라는 기준으로 나누면 물질은 그대로 색온이 되는 거고, 마음은 식온이 되고, 마음부수인 심소는 수온 상온행온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은 빠져있지요.  

제법을 ‘처’라는 기준으로 나누면 12가지가 됩니다. 이 12처를 5온과 관련해서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물질현상인 색온은 ‘안, 의, 비, 설, 신’ 5가지 내입처와 ‘색, 성, 향, 미,촉’ 5가지 외입처에 해당합니다. 식온에 해당하는 마음은 ‘의’이고요. 마음부수에 해당하는 것은 ‘법’입니다.

 여기에서 좀 미묘한 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색온이라는 물질현상에는 총 28가지의 법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중에서 10가지(안의비설신 내입처와 색성향미촉 외입처)가 ‘처’의 기준으로 나눌 때에는 물질현상에 해당하고, 나머지 18가지는 ‘법’처로 분류합니다. 이 나머지 18가지와 마음부수, 그리고 무위법이라고 말하는 열반을 합쳐서 ‘법’처로 묶고 나면 하나가 남습니다. 안의비설신의 할 때 ‘의’처는 마음의 감각장소라 해서 5온에서는 식온에 해당하고 네 가지로 나누는 궁극적 실재에서는 마음에 해당합니다. 

18계는 ‘계’ 즉 ‘element’, ‘요소’라는 기준으로 ‘마음’이라는 부분을 7가지로 더 세분화 하는 것입니다. 물질현상인 10가지는 그대로이고, 앞에서 말한 법처에 관련된 부분도 그대로 법계로 가고, 의처에 관련된 부분을 안식계, 의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 의계 등 7가지로 나누는 것입니다. 

핵심은 5온이나 12처, 18계는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관념적 세계를 법으로 해체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부처님께서 제시한 법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룹핑하는 다른 기준인 셈입니다. 

결국 불교에서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인식되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행위로 인해서인식하는 주체가 있는 것이고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명과 색이라는 모양을 가진 인식대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과정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착각을해서 인식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인식하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달마, ‘법’을 객관적인 실재로 규정

아비달마 불교, 남방불교에서는 ‘법’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면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원소 비슷한 느낌이지요. 그리고 그 법은 찰나 생 찰나 멸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라는 공통된 특징 즉 공상을 가집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법을 객관적인 궁극적인 실재로 간주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비판하면서 법은 도구일 뿐이며 그 법 자체도 허구라는 일체유부라 주장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법 자체를 물질현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규범이나 틀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남방불교나 북방불교가 법을 이해하는 법은 조금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같습니다. 법의 공상을 통찰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길은 같지만 법에 대한 이해는 좀 다르더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남방불교에서는 시작할 때부터 5온, 12처, 18계를 객관적인 실재로 확실하게 정의하고 갑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비달마 불교의 체계를 이어갈 수가 없습닌다.

대승불교, 법이 ‘실재’하다는 아비달마를 비판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이것을 하나의 법유설로 다룹니다. 일체항유, 제법항유 등 모든 법이 항상 ‘있다’고 하는 아비달마의 관점을 비판합니다. 이 두 인식이다르다보니 이것을 어떻게 융합할 것이냐가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승불교 수행 전통에서 근 20년을 수행한 사람의 입장에서 법유설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혼선이 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중표 교수 같은 경우에는 12연기에서 말하는 명색, 그리고 6입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6근, 6경 등을 실제 감각대상으로 이해할 것이냐, 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상당히 강조를 하는데요. 법의 공상을 통찰하는 수행의 과정에있다면 법의 실재성, 구체적으로 말하면 6입처가 6근과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생각하기에는 법의 실재성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으나 법의 공성을 통찰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똑같으며, 결국 열반을 증득하는 것 역시 법의공성을 통찰하는 것도 같습니다. 

철학적 논쟁 의미 있지만 수행에선 부차적 문제

어느 쪽이든 열반으로 가는 길이 같기 때문에 법의 실재성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비생산적인, 사변적인 논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법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비달마 불교를 공부할 때는 초기불교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대승불교로 확장하여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정리를 한 후에 5온, 12처, 18계를 보면 이해가 아주 쉽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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