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⑧ 집성제 (集聖諦) 4  욕계, 색계, 무색계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몇 가지 질문들.
윤회와 사후세계는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일반 중생들은 죽으면 어느 곳에 나는지 그 장소[사후세계]를 궁금해 하지만, 지은 업에 따라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장소가 바뀐다는 개념을 이해하면 윤회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
부처님은 윤회의 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분했다. 욕망의 세계인 욕계는 중생들이 육도윤회하는 세계이고, 욕망은 털어버렸으나 아직 있다 없다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색계에 태어난다. 욕망과 집착을 끊어냈으나 아직 무명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한 자가 태어나는 곳이 무색계이다.
이들 세계는 현대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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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무명(無明) · () · ()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 · () · () · () · () · () · 노사(老死)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원인은 같은가 다른가?

지난 시간에 무명과 행은 과거의 원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생기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현재 생의 식이 생긴다고 말입니다. 무명과 행이 과거의 원인이고 현재의 원인은 갈애 즉 애와 취, 유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원인은 따로 있는가? 애 – 취 – 유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원인이지만 다음 생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무명과 행이 아니라 애 – 취 – 유란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의 결과는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이고, 다음 생에 과보로 받는 것이 생과 노사이지 않습니까. 현재의 결과와 다음 생에 받는 결과가 서로 다른 것이 되는데, 과연 그러한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를 이야기할 때는 삼세양중인과설이 반드시 함께 등장합니다. 같은 원인과 결과가 두 번 중복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만약 과거의원인과 현재의 원인이 다른 것이라면 같은 것이 중복된다는 뜻의 삼세’양중’인과설이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선 원인 부분을 살펴봅시다. 과거생의 원인이 무명과 행인데 과거생의 원인에는 애와 취와 유가 없는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통해 원인은 무명 – 행 – 애 – 취 – 유라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전생에서는 무명과 행이 두드러지므로 두 가지만 이야기한 것이고, 현생에서는 애 – 취 – 유가 두드러지므로 이 세 가지만 이야기한 것입니다. 즉 무명 – 행 – 애 – 취 – 유 모두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입니다. 

다섯 가지 원인과 다섯 가지 결과의 반복

무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경우는 필연적으로 갈애가 생겨날 수밖에 없고, 갈애가 생기면 이어서 취착이 생깁니다. 과거의 원인에서말하는 행과 현재의 원인에서 말하는 유는 업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의 원인에서는 행이라 하여 ‘작용하는 업’을 강조한 것이고 현재의 원인에서는 ‘업의 결과로 받는 오온’까지를 포괄하여 유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원인 두 개 따로, 현재의 원인 세 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개의 원인이 십이연기에서 작용하고 있되 과거와 현재에서 각각 두드러지는 원인을 제시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결과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결과는 명색이고 내생의 결과는 생과 노사입니다. 생과 노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식 – 명색 – 육입- 촉 – 수입니다. 결과를 이루는 다섯 개의 요소를 현재의 결과에서는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했고, 내생의 결과에서는 생이라는 글자로‘재생’을 표현한 것입니다. 색 – 노사는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지요. 

이렇게 십이연기에서는 원인 다섯 가지와 결과 다섯 가지가 전생과 현생 내생 등 삼생을 거치면서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과거의 원인현재의 원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결과 내생의 결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다르게 한 것일 뿐입니다. 

재상찰나인가 49일인가

또 지난 시간에 재생연결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생의 마지막 찰나, 죽음의 마음이 조건이 되어 다음 생의 첫 마음인 재생연결식이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구조에 따르면 현생에서의 죽음과 다시 태어나는 다음 생[재생] 사이에는 한 찰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이야긴데요. 

죽음과 재생에 한 찰나밖에 없다면 우리는 49재를 왜 지내는 걸까요?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면 7주 동안 중음신의 상태로 있다가 7주 뒤에 다음생을 시작하므로 그 사이에 정성껏 재를 올려주지 않습니까. 십이연기를 이야기할 때는 지금 생과 다음 생에는 찰나의 간격 밖에 없는데 현실에서는 49일의 긴 간격을 설정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기간의 차이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남방불교)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태국, 미얀마 등지의 남방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바로 다음 찰나에 다음 생을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한국, 중국, 일본, 티베트, 베트남 등 대승불교권에서는 49일간의 중음신 상태를 상정합니다. 

49일이라는 기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49일간 다음 생을 준비한다는 의식이 자리잡아 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당대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윤회를 부정하지 않았고, 윤회를 기본 전제로 여러 가르침을펼쳤다는 것을 상기할 때, 49일이라는 기간이 인도 전통 사상과 맞닿아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윤회와 사후세계는 같은가?

우리가 윤회와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의문은 이런 것입니다. 제사를 지낼 때 “극락왕생 하십시오.”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왕생극락 역시도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이번 생에 사바세계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다음 생에는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윤회보다는 사후세계의 존재에 관심을 갖습니다. 천당이나 극락,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에 천착하여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궁금해 합니다. 윤회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관점이 아닙니다. ‘윤회는 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과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같은 범주로 이해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윤회의 세계욕계 색계 무색계

이러한 의문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크게 욕계와 색계, 무색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욕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육도윤회의 세계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세계으로 나뉘지요. 천상세계는 하나의 천상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33천을 비롯하여 화락천, 타화자재천, 도솔천 등 여러 세계가 있습니다. 그 중 도솔천은 부처님께서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가기를 준비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이런 천상세계를 포함하여 육도윤회의 세계를 모두 욕계라 합니다. 욕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색계는 욕망은 떨쳐냈으나 있다없다는 것[형색]에 대한 집착은 떨쳐내지 못한 상태의 존재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는 있다 없다는 집착마저도 떨쳐냈지만 무명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한 중생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한편 욕계는 크게 선처와 악처로 나뉩니다. 악처[나쁜 곳]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세계이고 선처[좋은 곳]는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이와 관련하여 깨달음을 얻는 단계를 제시합니다. 금강경에 등장하는 깨달음의 네 단계는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인데요. 수다원은 더이상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단계입니다. 사다함은 한 번 윤회하고 나면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하고, 아나함은 이 생이 끝나면 윤회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단계를, 아라한은 이 생에 즉시 윤회를 벗어나나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지점은 부처님께서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세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현세의 업에서 내세가 결정된다

어떤 중생이 다음 생에 악처에 태어나고 어떤 중생이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나고 어떤 중생이 색계에 태어나는가? 하는 논의에 있어서 ‘죽은 다음에 사후세계가 있나요?’라는 질문은 참으로 현생만을 사는 중생 기준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는 윤회의 관점으로는 단지 다음 생일뿐입니다. 

누군가 “어떻게 하면 다음 생에 색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일단은 불교적 관점에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다음 생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번 생의 업입니다. 지금 생을 살면서 갈애에 충실하게 얽매인 삶을 산다면 육도 윤회 중 한 군데에 랜덤으로 떨어지게 되겠죠. 특히 부정적인 번뇌를 많이 쌓았다면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최소 다시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수다원과에 들고자 하겠지요. 깨달음의 네 가지 단계를 알고 그러한 과를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두 번째인 사다함과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일래과(一來果)라 합니다. 한 번 윤회한 뒤에는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인데요. 그 마지막 한 번의 윤회에서 색계정거천에 태어납니다. 사다함과를 증득한 자는 부정적인 감정, 번뇌를 털어냈으므로 더이상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는 불환과(不還菓)라 합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과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생에서 어떤 업을 짓는가에 따라 다음 생을 시작하는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생 전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순간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이전 생에서 받은 과보를 바탕으로 그 다음 생에서 또 다시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지금생에 부정적인 업을 많이 지어서 다음 생의 출발이 좋지 못하더라도 좋은 업을 많이 쌓으면 그 다음에는 보다 좋은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는것입니다. 

증명하지 못하면 없는 세계일까?

문제는 이러한 윤회의 구조를 현대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징적인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극락은 아미타 부처님이 열심히 수행한 과보로 만든 세계를 상징하듯,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역시 어떠한 상징성을 내포하고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중요한 지점은 극락과 지옥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증명하지 못한 세계는 여전히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한 세계입니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우리 인류는 3차원이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하여금 우리가 4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지요. 우리 눈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과학에서는 증명되었습니다. 원래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던 차원이라는 세계가 하나 둘 베일을 벗고 있는 셈이지요. 

현재 과학계에서는 11차원까지 이야기합니만 우리는 전혀 체감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단지 우리가 모를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전의 지옥세계 역시 현재로써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현대의 물리학이나 과학도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2,500년 전 수행자들이 어떻게 발견했는가? 여기에서 불교는 삼매를 이야기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전생을 본다든가 태아 상태의 자기 자신을 본다든가 했다는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제가 그 지점까지 수행해보지 못했기때문에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없기에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수행을 통해 정신의 힘을 고도화시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벗어나는 또 다른 경험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관점에서 이해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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