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는 극락이다

지금은 없지만 광주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 지어진 인공 저수지 ‘경양방죽’이 있었다. 당시 광주 목사 김방은 경양방죽을 만들던 중 발견한 개미굴을 무등산으로 옮겨주었고, 개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경양방죽을 완공할 수 있었다.
또한 개미들의 힘으로 세종대왕이 현몽을 꾸고, 그 덕으로 목숨을 구한 김방 목사는 무등산 증심사에 오백전을 건립할 것을 염원한다.
무등산 증심사와 오백전과 경양방죽은 빛고을 광주 자체가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땅을 극락으로 여기고 극락으로 만들었던 백성들의 굳건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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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빛고을 광주는 극락이다’를 제목으로 법문을 해보겠습니다. 증심사 오백전을 창건한 김방과 관련된 설화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김방과 관련된 설화는 미니시리즈로 치면 2부작입니다. 1편은 경양방죽을 만들 때 개미들의 보은에 관련된 이야기, 2편은 배고픈 다리와 관련한 닭과 개미들의 갈등입니다. 

  미니시리즈 1부부터 보시죠. 경양방죽을 다들 알고 계시지요? 예전에는 있었지만 1967년도에 매립을 하여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매립을 할 때 그 앞에 있던 태봉산을 완전히 밀어서 그 자리에 광주시청을 지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확하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미 3분의 2정도를 매립했다고 하고요. 나머지 3분의 1을 66, 67년도에 매립했다고 합니다. 

경양방죽과 개미의 은혜

  경양방죽은 인공 저수지입니다. 세종대왕이 조선을 다스리던 1430~40년, 3년 넘게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었습니다. 요즘처럼 식량이 비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가뭄이 들면 백성들은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이때 당시에 광주 목사 김방이라는 사람이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든 것이 경양방죽입니다. 무등산을 기준으로 서남쪽 방향이고요. 축구장 30개가 들어가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였습니다. 전라도 일대의 저수지 중 가장 큰 저수지였고, 수심은 깊은 곳은 10미터나 됐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중장비로 금방 만들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손수 만들었을 겁니다. 1400년대 전라도 인구가 40만 명이었는데, 경양방죽을 만들 때 투입된 인원이 53만 명이었다고 하니 경양방죽 공사가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몇 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면 잘 먹여야 하는 것이 관건 아니겠습니까? 가뜩이나 가뭄으로 굶고 있는데 수십만 명을 먹여 살려야 하니 김방 목사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느 날은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다가 개미굴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김방 목사가 자비심이 있어서 이 개미집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떠서 지금의 무등산 장원봉이라고 하는 데다가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김방 목사는 또 백성들 먹여 살릴 걱정에 잠을 못 자는데, 어느날 새벽에 나가서 보니까 뒤뜰에 하얀 쌀이 산만큼 쌓여있는 겁니다. 

무슨 일인가 싶지만 일단 쌀이 생겼으니까 그 쌀로 백성들을 먹였어요.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쌀이 뒤뜰에 쌓여있는고? 궁금해진 김방 목사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어찌 된 영문인지를 지켜봤습니다.

  그랬더니 개미 수천 수억 마리가 어디선가에서 모르게 쌀을 나르고 있더랍니다. 개미들의 도움으로 수십만 명이나 동원되었던 방죽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세종대왕의 현몽과 배고픈 다리

  미니시리즈 2부의 무대는 증심사로 바뀝니다. 김방 목사가 큰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보니까 개미들한테 너무 고마운 겁니다. 개미들이 쌀을 물어다 나르지 않았으면 경양방죽 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잖아요. 개미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김방 목사는 증심사에 오백전을 짓겠다는 원을 세우고 열심히 불사를 합니다. 

  불사를 잘 하고 있는 와중에 김방 목사가 병에 걸립니다. 용하다는 의사들이 다 와도 병명을 모르고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한 의사가 와서 진단을 하고 말하기를, 불사를 하느라고 기가 허해서 그러는 거니까 닭똥집을 먹어야 낫는다는 겁니다. 김방 목사는 망설였지만 주변에서 성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닭똥집을 먹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에서는요. 하루는 세종대왕이 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닭들이 수백 마리가 나타나서 “전라도 광주 땅에 김방이라는 위인이 있는데, 이 양반이 무등산 산속에 장정들을 수천 명 모아다 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 지금 당장 금부도사를 내려보내서 저 역적을 처형을 시키라!”고 말합니다. 

  세종대왕은 깨자 마자 금부도사를 광주로 보내며 김방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날 밤 꿈에는 사미승 수백 명이 나와서 “김방은 백성을 위하는 어진관리다. 처형을 하면 아니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석보상절 같은 경전을 한글로 찍어낼 만큼 알고 보면 은근 불자이지 않습니까? 큰일났다 싶어서 천리마를 보내 금부도사의 명을 중지시키라는 파발을 보냅니다.

  한편 왕의 명령을 받고 광주에 당도한 금부도사 일행이 광주천을 건너서 무등산으로 가려고 하는데, 타고 온 말들이 광주천을 건너지 않고 꼼짝을 하지 않는 겁니다. 2박3일 동안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없이 굶으며 배를 곯고 있는데 있는데, 천리마를 탄 사람이 당도하여 사형 중지 명령을 전달하지요. 이 이야기의 무대가 일명 ‘배고픈 다리’입니다. 

  이 일화를 전해 들은 김방 목사는 ‘개미들이 세종대왕 꿈에 나타나서 나를 살렸구나!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여 더 열심히 불사를 해서 오백전을 짓고 마무리를 했다고 합니다. 

염원과 자비심은 한몸 

  이제 미니시리즈를 바탕으로 불교적인 생각을 해봅시다. 첫 번째, 만약 개미들이 돕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경양방죽을 만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개미들은 왜 저수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김방과 백성들을 도왔을까요? 

  김방이 개미집을 파괴하지 않고 무등산 자원봉에다 옮겨주는 자비심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개미들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김방을 도운 겁니다. 

  우리가 뭔가를 염원을 하고 소원하는 바가 있을 때는 기도를 하죠. 그런데 염원을 가졌다고 해서 소원이 그냥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김방 목사처럼 자비행을 해야 합니다. 내가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상주하는 곳, 광주

  두 번째, 개미들의 도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광주 사람들이 지금 여기 이곳을 극락으로 가꾸고 키워나가자고 하는 열망이 개미로 표현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광주는 빛 광(光)에 고을 주(州)를 씁니다. 광주의 별칭이 빛고을입니다. 무등산에는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무등산에 ‘무등’은 아미타불의 12가지 이름 중 하나인 무등광불의 그 무등입니다. 무등광 부처님이 상주하는 곳이 무등산이고, 그 아미타부처님의 빛이 쫙 퍼지는 무등산 앞의 넓은 벌판이 빛고을 광주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서방 정토죠. 무등산에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고 있으니 광주가 바로 서방정토입니다. 지금 여기가 극락이에요. 극락은 원래 범어로 ‘스카바티’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번역하면 극락, 정토, 안양이라 합니다. 극락은 지극히 즐거운 곳이며, 정토는 깨끗한 땅입니다. 안양은 편안하게 살고 자라는 곳을 의미하고요. 화순에 안양산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무등산이 화순 쪽으로 이어져있는 산이어서 그렇습니다. 

  보통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사바세계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세계입니다. 반대로 극락세계는 지극히 즐거운 곳이고 행복한 곳이에요. 우리 중생들은 스스로 사바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다 보면 미륵불이 하생하셔서 우리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광주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극락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 벌판에 있는 크고 웅장한 산이 아미타 부처님이고, 우리는 극락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극락에 가뭄이 들어 사는 게 힘들어지니까 ‘큰 저수지를 만들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라고 마음을 낸 것이 광주 사람들입니다. 그런 마음에 부처님이 감응한 것입니다. 개미들을 보내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한 것은 무등산 부처님이 한 일 아니겠습니까. 

여기를 극락으로 만들고자 하는 염원

  미니시리즈 2부에서 왜 김방은 증심사에 오백전을 지으려고 했을까요?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개미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을 해봅시다. 저수지를 만들면 그 저수지를 만든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혜택을 받습니다. 혜택은 대대손손 가는데 보답은 딱 한 번만 하면 나쁘죠. 매년 개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뭔가가 창구가 있어야 하니까 오백전을 지으려고 마음을 내지 않았을까요. 

  그걸 왜 무등산에 있는 절에다 지었는가? 이 부분부터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무등산에 상주하시는 아미타 부처님이 감응해서 가피력으로 개미를 보내줬으니, 당연히 무등산에 있는 사찰에 오백전을 지어서 아미타 부처님께 감사를 표한 겁니다. 조선시대에 무등산에 있는 많은 절들 중에서 증심사가 큰절이고 대표 사찰이니까 굳이 증심사를 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왜 하필이면 오백전인가? 김방 목사가 생각하기를 많은 불보살님들한테 감사를 표현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처님에게 다 할 수는 없고, 불보살님들 중에 숫자가 많은 게 뭘까 생각해보니 나한님들이 있는 겁니다. 금강경에 보면 1250 아라한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라한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라도 땅 광주 땅의 백성들의 염원, 그리고 우리 백성들이 광주를 극락으로 가꾸고 키워나고자 하는 열망이 개미로 표현됐고, 그런 개미가 우리 오백전의 부처님들로 화현한 것입니다. 결국 오백 나한님들은 광주를 지키고 키워가려는 백성들의 염원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증심사에서는 매년 오백대제를 엽니다. 그 때가 오면 무등산에 상주하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잘 섬기고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증심사가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나한님들에게 공양을 정성껏 올리겠다는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더불어서 ‘이곳이 바로 극락이다’라고 생각한 우리 선조들의 염원과 열망을 잘 이어서 우리 후세에게 물려주겠다는 또 다른 염원도 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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