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3 집성제 멸성제

사성제 중 멸성제는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반야심경 첫구절에 따르면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고통에서 벗어났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육바라밀이다. 지혜 바라밀이 나머지 지계, 인욕, 선정, 정진, 보시바라밀을 포함한다. 육바라밀은 곧 계정혜 삼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계와 인욕은 계를, 선정과 정진은 정을, 혜에 해당한다. 육바라밀과 계정혜 삼학은 곧 팔정도이기도 하다. 이것들을 닦음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다른 누구에게 보거나 듣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실참해야만 하는 정정과 정념 즉 정진은 반드시 마음을 내어 직접 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경전, 나는누구인가, 반야심경, 수행, 알아차림

지난 시간 사성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성제는 고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끊을 수 있고 그것이 멸한 상태는 무엇이다 라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그냥 진리가 아니고 고통과 번뇌에 관한 네 가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이야기했지,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구는 무엇이고 중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오로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을 다시 말하면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것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관심을 가진 것이지 그 외의 나머지는 주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멸하는 방법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반야심경의 첫 번째 문장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통이 무엇인지[고성제], 그것이 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멸성제]에 대해 아쉬우나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집성제와 도성제를 주제로 고(苦)가 어떤 과정에서 생겨나고 고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무엇을 해서 일체고액을 건넜습니까?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였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반야심경의 첫 번째 줄에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육바라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반야바라밀다를 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을 말합니다. 육바라밀을 꾸준히 실천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 바라밀을 말합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입니다. 파라미타는 ‘건너가다’, ‘완성하다’, ‘수행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밀을 수행 혹은 완성을 뜻합니다.

육바라밀의 여섯 가지를 수행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마지막 지혜바라밀은 앞의 다섯 개 바라밀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대로 삶을 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입니다. 반야는 ‘프라즈냐(prajñā)’라는 인도말을 한역한 것입니다.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곧 계정혜 삼학

한편 육바라밀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계정혜 삼학입니다. 계(戒)는 계율을 지키는 것, 정(定)은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선정), 혜(慧)는 지혜입니다.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으면 지혜가 밝아집니다.

육바라밀에서 계에 해당하는 것은 지계와 인욕입니다. 인욕은 고통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괴롭지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아버리면 인욕이 아니지요. 계는 나의 행을 올바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행은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신, 구, 의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 마디로 줄이면 신구의 삼업입니다. 여기에서 말로 행하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은 계에 해당합니다. 좋은 말을 하고 남이 듣기에 기쁜 말을 하고, 거친 행동이나 도둑질이나 사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를 잘 지킬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육바라밀 중 정에 해당하는 것은 선정과 정진입니다. 정진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하기 싫어도 하고 기분이 좋아도 하고 화가 나거나 슬퍼도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선정은 앞서 말했듯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입니다. 보시는 무엇입니까? 계를 지키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선정을 증진시켜 지혜가 밝아지면 그때 하는 행동이 그 자체로 보시입니다. 욕심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보시하는 마음, 바라는 바 없는 자비심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육바라밀을 잘 지키고 익히면 나의 모든 행이 그 자체로 보시하는 행입니다.

계와 정을 겸비해야 비로소 보시바라밀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비록 마음으로는 바라는 바 없이 하는 무주상보시를 할 수 없을지라도 그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치켜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재보시를 하는 것이 바라밀행입니다. 그러다보면 무주상보시의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육바라밀은 곧 팔정도

이처럼 계정혜 삼학이 곧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은 곧 팔정도(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계정혜 삼학과 육바라밀을 여덟 가지로 표현한 것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에서는 계-정-혜 순서가 아니라 혜-계-정의 순서로 표현됩니다.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 처음 두가지인 정견과 정사입니다. 계에 해당하는 것은 정어, 정업, 정명입니다. 나머지 정정진, 정념, 정정은 선정에 해당합니다.

왜 팔정도에서는 지혜가 먼저 나올까요? 먼저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알아야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알아야 걸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면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때문에 팔정도에서는 먼저 목적지를 지식으로써 제안합니다.

정견(政見)과 정사(正思)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무명)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털어내야겠다고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신구의 삼업으로 나의 행동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어는 말 그대로 올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불을 볼 때 읊는 십악참회와 같은 것입니다. 정업에서 업을 현대 용어로 바꾸면 행위입니다. 정업은 몸으로 하는 올바른 행동이라는 뜻이지요. 정명은 먹고사는 일입니다. 내 목숨, 생계, 명줄을 지키기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하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올바른 생계수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정과 정념, 정정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선정입니다. 정정진은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고, 정념은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차리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나의 행동뿐만 아니라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를 잘 알아차리는 것이 정념입니다.

정정은 집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이것저것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하라고 해서 조는 데에 마음을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촛불을 본다던가 나의 호흡을 지켜본다던가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정정은 이런 수행을 말합니다.

팔정도가 일상이 될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것들은 금방 이해가 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념과 정정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직접 해봐야만 이것이 정념이고 정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참 명상

일전에 명상이란 눈을 감고 편안한 마음자세로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념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눈을 감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정정도 한 번 해볼까요? 참선이나 간화선을 해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막연합니다. 그러니 호흡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정해서 집중해봅시다. 편하게 눈을 감고 콧구멍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억지로, 의도적으로 숨을 쉬지 말고 내 콧구멍 위에 센서가 하나 달려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센서 아래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감지해봅시다.

이것이 어렵다면 아랫배에 손을 얹어보십시오. 숨에 의해 배와 손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느끼면 됩니다. 이렇게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하다보면 삼매에 듭니다. 이것이 바로 정정, 집중수행입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꾸준히 하는 것이 힘들 뿐입니다.

삼매 ; 주변의 모든 것이 영화가 되는 순간

끝으로 정정과 정념에 관한 내 경험담을 들려드리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제가 출가하기 전에는 불교의 불자도 몰랐습니다. 하루는 오후에 일을 보다가 시간이 남아서 카페에 들어가 창가에 앉았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창밖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일치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어느 순간 낯선 곳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치 주변이 모두 멈춘 것만 같은 묘한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영화 같고 나 혼자 관객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담배를 피워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깨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출가를 해서 선방에 앉아 화두를 드는데, 화두가 잘 들리는 상태가 바로 그 카페에서의 순간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부의 인식대상과 나의 감각이 차단되면서 마음이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집중된다는 말은 외부로부터 차단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보고 듣고 있어도 내 머리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외부와 차단될 때 비로소 내 자신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상태로 들어갑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출가 전 불교가 무엇인지 명상이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지만 어느 순간 일종의 삼매에 경지에 들었듯이, 여러분도 좌복 위에 앉거나 잠시 마음을 내어 눈을 감는 것으로 정념과 정정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대단한 수행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정념이고 정정이라는 것을 꼭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요약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선정을 유지하면 지혜가 밝아집니다. 지혜가 밝아지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이 곧 육바라밀이며, 육바라밀인 동시에 팔정도입니다. 계정혜 삼학과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닦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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