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1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반야심경은 반야부 대승경전의 정수로써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압축해놓은 경전이자 불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경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경전이기도 한 반야심경을 8회에 걸쳐 자세히 알아본다.
불교의 깨달음은 안다와 모른다로 나뉜다. 무엇을 아는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제대로 아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모르면 괴롭고 알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모르는 불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지 내 삶을 바꾸는 깨우침인지를 스스로 진단해보자.

#경전, 반야심경, 수행, , 지혜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

지난 2019년 ‘반야심경의 핵심’을 주제로 반야심경의 첫 구절을 두고 한 시간 동안 법문을 한 바 있습니다. 이의 연장선상으로 2022년 백중기도 기간 동안에는 8번에 걸쳐 반야심경을 자세하게 해설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반야심경은 팔만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는 경전으로 조석예불을 포함하여 절집의 의례에서 일상적으로 독경하는 경입니다. 그런데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실존인물이 말씀하신 내용이 아니라 후대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데도 하나의 경전으로 인정되고 나아가 팔만대장경에까지 들어가 있는 것은 반야심경의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서기 200~300년경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반야부’라 하여 ‘금강반야바라밀다’라는 내용이 들어가는 경전이 많이 만들어졌는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금강경도 반야부 경전의 일종이며, 반야심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400~~500년이 지난 그 시기에 어째서 반야부 경전들이 등장하게 됐을까요? 부처님 사후의 불교 흐름이 너무 출가자와 승원, 교학을 중심으로 흘러가자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지 일부 출가승 개인의 열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자성의 목소리였지요.

여기에서 기존의 불교는 소승, 새로운 불교를 대승이라 칭하게 됩니다. 소승(小乘)이란 작은 수레입니다.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새로운 흐름인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와는 다른, 무언가 부처님의 참뜻을 담고 있는 경전을 내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반야부 경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것 담은 첫 구절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모든 내용이 반야심경 260자 안에 다 들어간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불교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금부터 반야심경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반야심경의 첫 구절 안에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 그리고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2019년 반야심경 법문 당시에는 6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추가적인 내용만 짚어보겠습니다.

로봇청소기의 삶

우리 절 취백루에 로봇청소기가 있습니다. 혼자 왔다갔다 하면서 그 넓은 공간을 스스로 청소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진공청소기는 청소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청소기는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먼지를 빨아들입니다. 하루하루 청소를 하는 것이 청소기의 삶이지요. 청소기가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배터리 안에 저장된 전기입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그의 삶의 원동력은 전기라는 것입니다. 짧은 예로 청소기가 태어난 이유, 청소기의 삶, 청소기의 삶의 원동력을 알아봤습니다.

한편 로봇청소기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자체 진단과 자가 충전이 가능합니다. 청소를 하다가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해가기도 하고, 청소를 하다가 배터리가 부족하면 충전기로 돌아갑니다. 사람으로 치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현이 다를 뿐이지 사람이 하는 것과 참 비슷합니다.

로봇청소기가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똑똑한 로봇청소기에 자의식이 있다면 어떨까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법합니다. “나는 누굴까? 나는 왜 매일 똑같은 장소를 왔다갔다 하는 거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마치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습니다.

조금 더 가정을 해봅시다. 로봇청소기가 너무 똑똑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청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줄 알고, 자기를 만든 사람은 S전자 ○○○대리인 줄 안다면 말입니다.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이 했던 생각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신의 뜻이라고 믿었었지요. 이렇게 믿으면 사는 데에 별다른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역경과 고난이 닥쳐와도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니까 말입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로봇청소기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컵 안에 물이 있습니다. 물은 무색, 무취, 무미입니다.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물은 독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A는 이 물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B는 거리낌 없이 물을 마실 것입니다. 물을 마시지 않은 A는 살고 물을 마신 B는 죽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단지 그 물이 독인 줄 알거나 몰랐을 뿐입니다. A는 알아서 살았고 B는 몰라서 죽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안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은 두 개의 산소와 한 개의 수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을 몰라도 물을 마시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 D.C라는 지식은 광주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목숨이 오가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떤 지식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생사를 가르지 않지만 다른 어떤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컵 안에 든 물이 독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어떤 순간에는 생사를 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앎과 모름, 깨달음과 무명

안다는 것은 단순하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앎이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닫는다’, ‘깨친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아무 것이나 안다고 하여 다 깨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삶의 본질이라던가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와 같은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을 올바로, 정확하게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깨치다 = 앎’입니다. 무엇을 아는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압니다. 제대로 알게 되므로 내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깨친다’고 하는 말의 참 뜻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지(無知)라고 하지 않고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 = 모른다’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안다와 모른다로 나뉩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모르면 괴롭고 알면 벗어난다

다시 반야심경의 첫 번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관자재보살님이 반야마라밀다라는 행위를 해서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결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앎과 모름, 깨침과 무명의 구조로 이 구절을 다시 바라볼까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가 괴롭습니다. 컵에 있는 것이 독이라는 것을 알면 컵에 있는 액체를 마시지 않지만, 모르면 액체를 마신다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의 결과로 이 사람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면 그 결과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역으로 말하면 인생이 괴로운 것은 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인생이 괴로운가?” “네가 뭘 몰라서 괴롭다.”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반야바라밀다를 하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반야바라밀다를 알면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다는 무엇입니까?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인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지혜바라밀이 바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반야 바라밀다인 것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앞선 다섯 가지 바라밀을 모두 다 포함한 것입니다.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나의 중생심을 바꾸기 위하여 참고 견디는 인욕행을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한 곳에 집중하는 정념과 정정의 수행을 함으로써 지혜바라밀이 완성됩니다. 다시 말해 육바라밀을 열심히 수행하면 오온이 공한 것 즉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청소기와 우리 인간은 과연 같습니까? 로봇청소기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뚜렷합니다.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마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무언가를 위해서 아등바등 열심히 삽니다. 세팅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청소기처럼 말입니다.

“원래 사는 것이 그런 것 아니야?”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묻겠습니다. 인간 삶의 목적이 승진에 있습니까? 건강에 있습니까? 사업 번창이나 심지어 만사형통에 있는가요? 저는 도통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승진하기 위해 태어났나요? 건강하기 위해 태어났나요? 사업을 번창하기 위해 태어났나요? 만사형통하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인가요?

그냥 아는 것과 진짜 아는 것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반야심경이 이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내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 없이 반야심경을 본다면 앵무새처럼 외우고 있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지식은 알고 있어도 내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자각(自覺)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아는 것은 남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아는 것이 자각입니다.

태어난 이유가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아등바등 그리고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갈까? 이 질문의 답은 ‘내 자신을 몰라서’입니다. 자각에서부터 불교가 시작됩니다. 그럴 때만이 ‘오온이 공하다’는 결론이 그냥 지식이 아닌 깨달음이 될 수 있습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식과 “오온은 공하다”라는 지식을 똑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기를 바랍니다. ‘스님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알자’고 생각하는 것인지, 진짜 아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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