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 아니야

내것이라 생각한 내 몸과 내 감정이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내가 아니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분노, 욕심, 근심처럼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은 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들 감정이 나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런 감정들에 구속되어 있고 속박당하고 있다.
감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조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중생이 살아가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삶이다.
중생은 다양한 정보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에 얽매여 반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함을 멈추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수행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 이것이 알아차림이며 깨달음을 증득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다.

#감정, 분노, 수행, 알아차림

“사는 게, 내가 내가 아니야.”

이 자리에서 바라보는 단풍이 한달 전만 해도 아주 좋았는데요. 지금은 다 떨어지고 몇 잎 안 남았네요. 가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말을 자주 씁니다. “사는 게 내가 내가 아니여.” 오늘은 이 말을 가지고 짧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어제는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템플스테이에 오신 분과 차담을 했는데요.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가 나서 참다 참다 쏘아붙였는데 그렇게 화를 내고 나니까 하루종일 마음이 찜찜해서 힘들어요.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제 자신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비실비실 맥아리가 없지만 한때는 저도 화를 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지 고민하고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이 분의 말을 들어보면 본인이 화를 내는 것을 느끼고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주위에서 그분에게 ‘화를 내지 마라. 화를 내서 무얼 하겠냐’고 말한다면 그분에게는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닐 겁니다. 이미 마음속에 화가 가득 차있는데 주위에서 그렇게 말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나는 마음도 흥분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또 ‘화’라는 것에 실체가 있어서 누군가 나에게 주고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나의 감정인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화를 안 내면되는데 본인이 화를 내놓고 본인이 후회를 합니다. 누가 옆에서 말한다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후에는 조선대학교 학생들에게 법문을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법문을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서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조절이 안 되는 것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흔하게 겪는 일들인데요. 어제는 이 두 가지 경우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직접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니구나.’ 

여러분에게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자식들을 다 키워놓았더니 이제는 손자를 키워달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낮이고 밤이고 손자 뒤치다꺼리 하느라고 정신 없이 흘러갑니다. 그럴 때 ‘사는 게 내가 내가 아니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는 한차례 큰 병을 겪은 경우에 아프고 난 다음에는 걷는 것, 말하는 것, 생활하는 모든 게 너무 예전과 다를 때도 있습니다. 내 몸이 내 뜻대로 안 됩니다. 그럴 때도 ‘내가 내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화를 낸다고 할 때 이 분노는 나의 분노입니다. 남의 것이라면 마음대로 못하지만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 건데 내 마음대로 못 한다면 내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분노가 내 것이라면 화를 내고 싶을 때 버럭 화를 내다가 화를 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화를 낼 때 자신을 보면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내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올라옵니다. 그러고 나서 뒤늦게 ‘내가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렇게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화가 커질 대로 커져서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화는 내것이 아니죠. 

화를 비롯한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반대로 화라는감정에 끌려다닙니다. 화에 내가 구속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를 내가 싫은데 화를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경우도 있고 화를 참다 참다 몸에 탈이 나기도 합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런 것들이 심해지면 성격이 괴팍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방증입니다. 내 감정에 내가 끌려다니고 내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감정에 속박당하는 중생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자식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시다. 부모된 입장에서 시험 합격을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나의 욕심입니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는 게 아니고 내가 바랍니다. 만약 이 욕심이 나의 것이라면 욕심을 내고 싶을때는 냈다가 욕심을 안 내고 싶을 때는 안 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데도 텔레비전에서 재밌는 게 나오면 웃고 떠들고는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고! 아이가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부모가 되어서 조용히 해주지는 못할 망정 내가 텔레비전이나 보고 이렇게 떠들고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 대로못 하는 겁니다. 욕심도 내 마음 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과 근심 걱정은 일견 같은 말입니다. 어떠했으면 좋겠는데 잘 안 되니까 걱정을 합니다. 애시당초 ‘내 아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없으면 걱정을 안 합니다. 걱정하는 것도 내 마음이 걱정하는 것이라면 걱정을 그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중생은 조건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분노, 욕심, 걱정. 이런 것들은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이런 것들에 구속되어 있고 속박당하고 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 차있으니까‘내가 내가 아닌’ 것이죠. 왜 욕심이나 분노 같은 것들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요? 화가 나는 과정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길을 가고 있는데모르는 사람이 내 뒷통수를 때렸다고 할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나도 모르게 화가 확 치밉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화라고 하는 실체를 준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저 그의 손을 내 뒷통수에 가져다 댄 것 뿐입니다. 거기에 내가 반응을 한 것이죠. 

내가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을 그 사람이 만든 겁니다. 나는 그 조건에 따라서 즉각적으로 반응한 겁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주거나 그 사람의 화가 나에게 옮겨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조건을 만들었고 나는 반응을 한 겁니다. 

문제는 어떠한 조건에 즉각적으로, 나도 모르게 반응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화에 구속당하거나 욕심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저런 조건에 끌려다닌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가 나의 뒷통수를 때린다는 조건이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화를 냅니다. 이것은우리가 조건에 얽매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은 정보에 얽매여 반응한다

‘조건’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어제 뉴스에서 전남대학교 신경외과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내일 초하루법회 해도 되나?’ ‘저러다가 또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되겠는데.’ 두렵고 걱정되는마음이 듭니다. 2분도 안 되는 뉴스를 보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손바닥만한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 화면. 이것은 결국 아주 작은 빛나는 점들이 점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뉴스를 본다는 것은 그렇게 작은 점들을 보는 겁니다. 그런 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반짝거리면서 나에게 정보를 줍니다. 점들은 그저 깜빡거리를 뿐인데 나는 그것을 정보로 받아들이고 그 정보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이 과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뇌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보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 귀를통해서 들어온 정보. 코를 통해서 들어온 정보. 이런 것들이 최종적으로 뇌에 도착해서 그에 대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표현 바꿔 말하면 우리는 정보에 얽매여서 사는 존재입니다. 정보에 지배당하는 존재입니다. 

중생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을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에 끌려다니면서 사는 존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답니다. 

고양이 머리에 전극을 달아서 쥐가 나타났을 때 뇌의 변화를 관찰하는데요. 흔히 고양이가 눈앞에 나타난 쥐에 집중할 때 뇌의 100%가 쥐에게 집중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쥐에게 집중된 뇌의 영역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0%는 여타 다른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억누르는 데에 쓰이고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20%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상태가 되는 것이죠. 

이 말을 확대해서 이야기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자폐 스펙트럼 중에서도 그런 부분이도드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번  본 것들을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특출난 재능이고 천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이 사람의 뇌는 필요 없는 정보를 차단하는 기능이 현저하게 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눈에 다 들어오는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듭니다. 

우리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정보에 나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동시에 수없이 많은 정보 중에서 원하는 정보만 골라서 반응하는 겁니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이 세상은 내가 만든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나라고 생각하는 이 존재가 조건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많은 조건들 중에서 내가 필요한 것, 내가 집중하는 것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삶의 본질입니다. 

‘내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가 아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모든 것들과 얽히고설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과 ‘거리두기’ 하는 것이 곧 수행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보고마치고자 합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으로 온전하게 다스리려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되려면, 다시 말해서 내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내 마음과의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알아차림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순간순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 속에 들어가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과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제자로서 깨달음을 증득하는 데에 꼭 필요한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내가 내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상호작용하고 있고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얽히고 설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게 중생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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