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걱정 많은 사람들
제가 만나는 보살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불문하고 걱정이 많다는 겁니다. 작게는 버스를 어디에서 탈까, 건널목을 어디에서 건널까,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것부터 자식 걱정 가족 걱정 세상 걱정까지 무수한 걱정과 고민들을 합니다.
어느 신도분은 이런 고민을 합니다. 자식이 여럿 있는데 그중 장남이 젊을 때부터 사업에 수완이 좋아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 장남에 대하여 저렇게 일하다 몸이 상하면 어떻게 하나, 경기가 안 좋은데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입니다. 본인이 걱정을 한다고 해서 자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는 부모도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걱정이 많을 때는 무슨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 재밌던 드라마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자식 걱정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어떻게 해도 그 생각이 떨쳐지지 않고 머리가 무겁습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 불안 속에있으면 누구나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본능적으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강도 높은 에너지의 ‘걱정’
몸이라도 좀 놀리면 괜찮을까 싶어서 청소를 하기도 하고 외출을 나가기도 하지만, 집 밖에 나와서도 주변이 눈에 잘 안 보이고 심란하지요. 어떤 분들은 가까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속 시원한 해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그냥 무거운 머리를 털어내고 싶은 마음에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습니다. 잠깐은 좋은데 친구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면 마음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은 것이지요.
여러 가지 고민이 있겠습니다만, 특히 자식 걱정은 에너지의 강도가 높습니다. 그냥 잡생각과는 달라요. 딴 생각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다른 일을 해도 근심 걱정의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에너지를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그보다 더 큰 정신적인 에너지를 내 안에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경허스님의 참선곡에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화두를 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 명 있는 자식 중에 하나만 잘 안 되어도 종일 마음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거운데, 나이 70 먹은 과부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냈을 때는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화두를 들라고 하는 것은 화두를 드는 힘이 그만큼 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식 걱정으로 마음이 가득 차있을 때 주변에서 어떤 조언을 합니까? 마음의 상태를 잘 보아서 내가 지금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 내면을 통찰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깊은 근심 걱정에 빠져 있을 때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기 힘듭니다. 오히려그러한 근심 걱정의 에너지를 수행의 길로 가져가야 합니다.
여러분. 근심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한한 애정을 가진 대상을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말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머리로참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의 근본 바탕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애정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비심이기도 합니다. 이 강한 근심의 에너지, 그러나 자비의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수행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불자의 태도입니다.
걱정의 힘을 수행의 힘으로 전환하라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울 때는 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내가 내 안의 근심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관세음보살님께 하소연하는 겁니다. 천수경은 엄밀하게 말하면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진언을 하기전에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기도(진언)에 앞서 천수경을 통해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고, 그 이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고, 다라니가 끝난 후에는 참회를 하고 그 다음에 발원을 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전후를 구성하고 있는 천수경의 내용을 한글로 읽다 보면 하소연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는 마음으로 전환됩니다. 시작은 하소연이나 과정은 찬탄과 참회가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근심 걱정의 에너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관세음보살님을찬탄하는 기도와 에너지로 바꾸는 겁니다.
자식 걱정이 왜 듭니까?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자비심이 이기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참회하고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위해서, 중생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을 내보시기를 바랍니다.
위안과 휴식은 해결책이 아니다
템플스테이에는 젊은 여성 참가자가 많습니다. 이들과 차담을 하면 우리 보살님들과 마찬가지로 근심과 걱정, 불안이 많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처음에는 이분들이 털어놓는 고민에 논리적인 해답을 제시하려고 했는데요.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나에게 답을 얻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힘든 상태에서,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스님이라는 존재가 앞에 있으니 그냥 막 이야기를 쏟아내는 겁니다. 그 스님이 공감하고 있다고 표현해주면 순간 힘들고 걱정스런 마음이 위로 받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에 짓둘려 있던 중압감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괴롭다, 힘들다, 불안하다는 하소연의 핵심 요소는 불안입니다. 불안은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괴롭고 힘든 상황이나 느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깨달을 수만 있으면 그 괴로운 상황에서 절반 이상 벗어나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천수경 독송이 바로 나 자신을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혜와 자비를 기르는 수행
불교는 자비의 종교가 아닙니다. 지혜만의 종교도 아닙니다. 지혜와 자비를 둘 다 갖춘 것이 불교입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교가 아닙니다.
지혜만의 종교란 어떤 것입니까? 내가 하는 자식 걱정에 대해서 남편이 “이제 다 컸으니 신경 쓰지 마. 당신이 신경 쓴다고 잘 되는 것도아니고 신경 안 쓴다고 못 되는 것도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저 인간은 30년넘도록 살아도 생각을 저것 밖에 못해. 대화가 안 되는 거지.’ 지혜만 가지고 있으면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자비만 있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공감만으로는 어렵지요. 오히려 상대방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더 깊이 빠지게 만들 수도있습니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통찰하는 힘은 지혜의 힘이고 모든 중생을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비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자식에게 가지는 근심 걱정은 바로 이 두 가지 힘을 모두 기를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입니다.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평생을 평탄하게만 살 수는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 올라올 때마다 여러분은 ‘아, 수행을 할 시간이 왔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가 자리를 잡았는데 둘째가 속을 썩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또 수행을 할 시간이 왔구나.’
이런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습관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 습관이 안 되어 있는데 힘들 때 갑자기 수행이 될까요? 안 됩니다.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천수경을 옆에 놓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독송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