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2019년 8월,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과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으로 돌아보는 우리 사회의 관용 정신.
관용은 존중이다. 나와 당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본 우익들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일부 타종교인들의 ‘나랏말싸미’ 배급 중단 요청 등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발생한 일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관용의 정신이 바로서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른 타인과 토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하게 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본적 없엇 낯설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동체, 사회, 의지, 희망

일본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헤프닝

관용. 프랑스말로 똘레랑스(tolérance)라고 합니다. 오늘은 최근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가지고 관용과 존중의 정신이 과연 우리 안에 살아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일본 나고야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전시회가 강제로 전시 중단되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시에 ‘평화의 소녀상’이 출품되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 뒤로 ‘내가 소녀상이다’ 하고 개개인이 소녀상이 되어서 찍은 사진을 세계 각지에서 SNS에 게시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왜 허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함께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이것이 예술작품입니까? 아닙니다. 예술작품이 되려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야 합니다. 전시회에 걸리거나 화랑에서 팔리거나 음악의 경우는 공연을 열어서 연주를 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해서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의 역할; 사회를 성찰하는 것

사회에서 예술작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중세 유럽 왕궁에 있던 피에로가 하는 일은 왕이 하는 일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광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어도 충분한데 그것을 굳이 사회에 유통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의미가 있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되돌아보라는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힘을 받을 때 예술작품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관용;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은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려면 그 전에 관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관용이라는 것은 내가 싫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용인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주장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는 보장하겠다는 것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인이 합리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감정에 이끌리고 정에 이끌리고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이 있어야만 관용정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관용정신은 집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습니다. 개인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을 때 관용이 통용되고 그러한 관용이 전제될 때 표현의 자유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일본의 경우처럼 개인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어떤 여론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누군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반역자라는 식의 눈초리를 보내곤 하지 않습니까?

영화 <나랏말싸미>에 불어온 역풍

또 한 가지 이슈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비화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입니다.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역풍을 맞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종대왕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성군’이라는 이미지를 영화에서는 박탈했습니다. 세종으로부터 카리스마를 벗겨내면서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일반인들이 가진 세종대왕에 대한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한글창제에 신미대사라는 승려가 역할했다는 스토리를 두고 일부 타종교를 중심으로 역사왜곡 논란을 야기시키며 영화 보이콧 등의 반대 움직임들이 나타났습니다.

관용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설령 <나랏말싸미>에 나오는 세종대왕의 이미지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한글창제에 숨은 조력자가 있다는 영화적 상상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영화를 내려라’, ‘해외 배급을 하지 말라’, ‘상영관을 줄여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두 사건을 통해 과연 이 사회에 관용의 정신이 통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적 윤리나 도덕이 해체되고 이제는 모든 것을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하는 시점에서 그 기준이 될 가치관이 바로 관용의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똘레랑스(tolérance), 존중의 태도

프랑스어사전에 나와 있는 똘레랑스의 정의는 첫 번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핵심은 존중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원에 가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가면 ‘존중하시오. 존중하게 하시오.’라고 써놨다고 합니다. 잔디를 존중하면 당신도 존중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프랑스 똘레랑스의 핵심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가령 이주노동자 관련 이슈가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으려면 먼저 외국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외국인들에게도 내국인들과 같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관용의 정신에 입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존중을 받으려면 상대방이 믿는 종교를 먼저 존중을 해야 합니다. 내 종교는 존중을 받는데 상대방의 종교를 무시한다면 상대방은 당연히 내가 믿는 종교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깁니다. 이것이 관용의 정신입니다.

물론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습니까? 힘으로 겨룬다거나 숫자로 밀어붙여서 다수결대로 따르라고 하는 것은 존중하는 게 아닙니다. 존중은 폭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합리적인 토론으로 결론을 봐야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논쟁하는 걸 엄청 좋아한다고 합니다. 내 주장을 설파를 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상대방이 정 굽히지 않으면 누군가는 포기합니다. 다만 힘으로 억누르거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의 힘이 똑같다면 토론을 해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겠지만 한쪽의 힘이 훨씬 약할 때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똑같은 조건을 주고 똑같은 경쟁을 하자고 한들 이것은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운동장을 바로 세운 후에 똑같이 경쟁을 하자고 해야 평등한 것입니다.

관용, 약자에 대한 보호

즉 관용정신의 두 번째는 약자에 대한 보호입니다. 성(性)이나 국적 문제 등에 있어서는 권력이 법적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약자, 소수자, 가난한 자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며 그들이 존중받으려면 제도적으로 보호받아야한다 라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 아니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관용은 우리 개개인에게도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사회는 정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아는 사람끼리는 어떤 문제든 통용되고 잘 모르는 사람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합리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이 성장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아 저는 보살님 생각하고 좀 다른데요.”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섭섭합니다. 서운합니다.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합리적인 개인이 뿌리내리기가 쉬운 조건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나혼자족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똑똑해서 혼자 사는 합리적인 개인 아니야?’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합리적 지성으로 무장되어 자발적으로 혼자 있는 개인이 아닙니다. 독거노인, 기초수급자, 취준생, 실직자… 저마다의 이유로 집단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 튕겨져 나온 사람들입니다. 튕겨져 나온 사람들은 방치되기 십상입니다. 관용의 부재는 지금 우리들 개개인을 힘들게 하고 있는 내밀한 고민과 고통, 고충과 결코 멀지 않습니다.

남이 아닌 나의 생각을 관용적으로 주고받기

관용의 정신이 통용되지 않는 이러한 폐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낯설더라도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나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이 다를 때는 토론을 통해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고야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전시가 ‘평화의 소녀상’을 이유로 취소됐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길 일이 아니라 과연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지, 왜 저 판단은 논란이 되는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해야 합니다. 불매운동 시국에서 불매운동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옳은지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 옳은지 스스로 고민하고 나의 생각을 정립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면 ‘어 맞아’ 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저 멍청이’ 하고,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그냥 누가 그렇다던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는 장단점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럴 때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줄여야 합니다. 개인간 끈끈한 유대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토론하여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사회에서 건강한 개인이 자리잡기가 힘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머리를 많이 굴리고 토론을 많이 합시다. 그런가보다 하지 말고 내 생각을 스스로 다듬는 연습을 합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도 그 자체로 용인하고 인정합시다. 그것이 관용의 정신을 개인의 삶에, 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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