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님에 관한 세 가지 질문
오늘은 관세음보살님과 관련하여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 의문은 이런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관세음보살 정근은 관음전이나 원통전에서 관음청을 할 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시예불 때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서 관음정근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번째,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수행의 과보로써 만들어 주재하시는 분이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사바세계에 계시는 분들입니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른데 왜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서방정토의 아미타부처님을 보좌하는 것일까요?
세 번째, 관세음보살님만큼 이름이 많은 보살님도 없습니다. 이름만 많은 것이 아니라 생긴 모양도 다양합니다. 손이 천개인 경우, 얼굴이 열한 개인 경우, 하얀 옷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경우, 호리병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식과 머리에 쓰는 보관, 이름도 다양합니다. 왜 그럴까요?
질문 1.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에서 관음정근을?
첫 번째 의문을 해소하는 키워드는 반야심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라는 첫 구절 뒤에 ‘사리자여!’라며 뒤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반야심경은 고통에서 건너간 관세음보살이 사리불 존자에게 법을 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일체 고통을 건너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깨달은 후에 윤회의 수레바퀴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 가서 보니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번뇌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여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와 중생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원력을 세운 분이고 관세음보살은 우리와 같은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살피고 들어주는 분입니다. 아주 쉽게 비유하자면 이웃종교의 신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실제 대승불교의 <법화경>에서는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대승불교에서 ‘신’으로 상정한 관세음보살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관념이 있었기에 불교가 종교라는 외피를 입고 이를 흡수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며, 불교도들에게 마치 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불교는 기존의 인간들이 가진 사고방식을 배척하지 않고 부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흡수했습니다. ‘신적인 존재’ 역시 재해석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적으로 재해석한 관세음보살은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종식하고 윤회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서 저 언덕으로 넘어갔으나 뒤돌아보니 중생들의 삶이 너무 괴롭고 가슴이 아파 사바세계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나의 깨달음도 완성된다는 원력을 세워 우리와 함께 있는 존재로 상정한 것입니다.
깨달은 수행자가 신적인 존재가 됐다는 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불교의 중심에 고통이 있다는 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행은 끊임없이 변하고,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집착합니다. 변화하는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집착하고 자성이 없는데 있다고 집착하는 데에서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일체가 개고입니다. 이것이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핵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괴로움을 털어내기 위해서 무언가를 합니다. 행을 한다는 것을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에는 과보가 따릅니다. 고통의 본질을 모르면 본의 아니게 악업을 행하게 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계속 기분이 좋기를 바라고 마음이 슬프면 기쁨을 바랍니다. 이렇게 지은 어리석은 업에는 과보가 따릅니다. 이것이 인과응보입니다.
내부적으로는 항상 변화하는데 변화하지 않는다고 집착하고 모든 존재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를 힘들게 합니다. 외부적으로는 나의 악업으로 인한 업보가 나를 괴롭힙니다. 이런 고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선업을 쌓으면 선한 과보가 따르고 선한 과보는 업보를 덜어줍니다. 따라서 선업을 쌓는 것은 수행의 선순환을 이루는 것입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인도하길 서원한 관세음보살
헌데 관세음보살님은 공성을 깨달았는데도 계속 괴롭습니다. 자신은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다른 중생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자비(慈悲)의 화신입니다. 자비의 비(悲)는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중생들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자(慈)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에 공감하는 마음, 즉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와 함께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우리를 살피고 다스립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다스림은 신과 같이 벌을 주고 칭찬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중생들이 원하는 마음에 따라 나투어 그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이처럼 중생들은 기대고 의지하는 존재를 먼저 찾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세음보살님을 찾습니다.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며 관세음보살을 믿고 따르는 의미에서 사시예불에서도 관음정근을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중생계에서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불이 나거나 홍수가 나거나 태풍이 부는 등 자연의 작용으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자연재해가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재난도 있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거나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 사회에서 살아다가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개인적인 재난이 있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을 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거나 혹은 분노가 치솟아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황, 또는 아이를 너무나 원하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등 내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이럴 때도 중생들이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마음의 동요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부처님처럼 고요하게 수행하여 공성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극한 상황에서 간절하게 믿을 수 있는 관세음보살
이런 극복하기 힘든 상황에서 중생들이 찾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법화경>에서는 관세음보살님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이 화답하여 괴로움에서 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미타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종의 순간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아미타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라고 합니다. 핵심은 불보살님을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생각하고 명호를 부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힘이 나옵니다. 일례로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첫째, 분노는 윤리적인 범주가 아닌 내 안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는 자비심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님이 필요합니다.
관세음보살님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에게 자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소에 관세음보살님을 믿고 있어야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화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수행을 하는데 몸으로는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고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억지로 자비심을 끌어내어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심을 보이는 것이 바로 수행인데, 그런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자비심을 내고 수행을 하고 내 안의 번뇌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질문 2.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
두 번째 의문을 풀어볼 차례입니다. 왜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일까요?
앞선 설명으로 관세음보살님이 이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누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어떨까요? 서쪽으로 9만8천 리를 가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가 있는데 거기에 가기만 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을 수 있을까요? 설령 누군가 다녀온 경험담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웃기는 이야기라고 코웃음을 칠 일입니다.
그런데 서방정토의 제2인자가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믿고 의지하는 관세음보살님이 서방정토에 계신다면 분명 그 말도 믿을만 해.’라는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불인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둘째, 아미타부처님은 사바세계에 있지 않고 서방정토에 계십니다. 아무리 불러도 사바세계로 와 중생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사바세계에서 누군가 간절하게 원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관세음보살님이 그 불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의 아픔을 다독여줍니다. 서방정토에 계신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실현해주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중생들이 관세음보살님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적인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3. 명칭이 여러 개인 관세음보살?
세 번째 의문은 관세음보살님의 다양한 화현(化現)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대 인도 힌두교의 신을 불교식으로 수용한 결과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면 백의관세음이 출현합니다. 불교가 종교의 외피를 입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웃종교와 토착문화를 흡수한 것입니다. 그 최전선에 관세음보살님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가 서구로 넘어갔다면 예수의 형상을 한 관세음보살도 등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관세음보살님은 이름만 보살이지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같은 존재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경전에도 관세음보살을 ‘믿으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각하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 이상의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 내 안의 자비심을 끌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을 위시하여 내 안의 자비심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은 완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믿음은 다만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믿음은 다만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
내가 가슴으로 느끼고 그것에 관세음보살님이 응하여 서로 통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내 소원을 이뤄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절대로 소원성취를 할 수 없습니다. 소원성취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무엇을 하겠다고 발원하고 그 발원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기도하고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 느껴야지만 관세음보살님이 응합니다.
그 다음 단계가 해(解)와 인의 상응입니다. 우리는 분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밖에 있는 관세음보살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내 안의 중생심이 사라지고 자비심이 살아납니다. 내 안에 수행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곧 관세음보살의 마음이며 그 마음이 커지면 내가 바로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응하면 응하는 대로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이 단계까지 밟아가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라는 말과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우라는 말에 들어있는 참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생각할 때, 그 명호를 부를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마음에 새겨 슬기로운 신행생활을 일궈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