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동호회와 나눈 ‘공동체’ 이야기
불교는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가, 개인주의를 지향하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한 등산동호회의 요청으로 청양 칠갑산에 다녀왔습니다. 칠갑산 정상에 올라서 전망대 한쪽에 자리를 펴고 점심 도시락을 나눠먹는데 학창시절 친구들과 반찬을 나눠먹듯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한 법문으로 했습니다.
요즘 사회가 힘든 것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공동체정신이 훼손되고 모두 개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공동체 단위에서 할 수 있던 것들을 이제는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법령, 혹은 민간서비스로 대체하고 있으며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희미해져있던 공동체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면 참 좋은 미담인데 지나고 나서 곰곰이 곱씹어보니 ‘공동체정신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눙칠 수 있는 자리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산우회에는 처음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존에 안면이 있고 계속 모임을 함께 해온 사람들끼리는 끈끈한 정이 있고 일부러 나누어먹으려고 반찬도 신경 써서 준비해오는 반면, SNS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수한 신규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가 되는 겁니다.
개방되어 있으면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공동체 중에 개방되어 있는 공동체는 별로 없습니다. 개방되어 있으면 공동체가 아닙니다. 공동체는 대개 지연이든 혈연이든 학연이든 맨투맨의 관계로 시작이 되고 정서적인 동일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갑니다. 누구나 들어오고 누구나 나가는 것은 불특정다수의 느슨한 모임이지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산행 같은 경우는 칠갑산에 간다고 모집을 하니 개인이 접수를 한 겁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자주 나오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친밀감이 있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더라 이겁니다. 그럴 때 새로 온 사람들은 따로따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기존의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그 안에서 끈끈한 유대가 있는 반면에 요즘 공동체는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지 않아도 그 단체가 표방하는 목적 내지는 내가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끈끈한 공동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면서 외연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기존 사람들끼리의 자연스러운 폐쇄성은 벌써 조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존 멤버들 사이에서는 공동체주의가 자연스럽게 관철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어딘가 언발란스 하지 않습니까.
불교는 공동체주의인가?
불교는 공동체주의를 우선하는가 개인주의를 우선하는가.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숫타니파타의 게송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물에 젖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는 자기중심이 확고하고 사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휘둘리지 않고 갈 길을 갑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회적인 편견, 습관, 터부, 도덕, 윤리 등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내 할 바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의 갈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멋진 황금 팔찌를 팔에 하나만 끼우면 팔을 아무리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데 두개를 끼웠을 때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납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고 잡음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개인주의는 나쁜 것인가?
이렇게 놓고 보면 ‘불교는 개인주의를 우선시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집단보다 공동체보다 전체보다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고 개인을 주체로 삼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불교가 파급력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전통과 잘 부합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개인주의는 나쁜 것입니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주의입니다. 개인주의는 집단이나 전체나 조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우선시 하는 겁니다. 이기주의에는 없지만 개인주의에는 꼭 필요한 것이 배려입니다.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우선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개인이 중요한 만큼 타인 역시 한 사람의 주체적인 개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입니다.
자비심은 ‘차가운 배려’
실제로 불교 학자 중에는 자비심의 현대적 해석을 배려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비심은 사랑이 마음속에서 넘쳐흐르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엄마가 어린 자식을 볼 때 가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것이 자비심이라면 일 년 365일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순간 식어버리는 감정을 자비심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자비심은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 차가운 배려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는 개인주의다’라고 말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개인주의는 배려를 전제로 하며, 그 배려를 불교에서는 자비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가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칠갑산 산행을 통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공동체 정신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개인의 자율성과 개인에 대한 배려, 개인의 주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1번 혹은 2번 중에 선택만 하면 되고 더 이상의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 행태입니다. 예스(yes) 아니면 노(no)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정신의 폐해입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도 물론 필요하지만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안에서도 생각과 견해, 주장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공동체가 이미 와해되었다고 하지만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라도 다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뭉칠 수 있는 여지가 뿌리깊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배려심과 자비심, 그리고 주체적인 개인을 존중하고 자율적인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을 냉철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