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재물과 여색은 반드시 정념으로 대할지니라. 몸을 망치는 데는 여색보다 더함이 없고 도를 망치는 데는 재물에 미칠 바가 없느니라.
따라서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여 재물과 색에 대한 욕망을 엄금하시되 “여색을 보거든 독사나 호랑이처럼 여기고, 금과 옥이 생기더라도 나무나 돌을 대하는 것 같이 하라” 하셨으니, 비록 어두운 방에 홀로 있어도 어려운 손님을 대한 듯 하고, 속마음과 겉 행동이 언제나 일치하고 으슥한 곳에서도 드러난 곳에서도 한결같이 할지니라.
마음이 깨끗한즉 호법성중이 반드시 수호하고 여색을 생각하면 천신이 모두 외면하느니라. 신장이 수호하면 험한 곳에서도 어려움이 없어지고, 천신이 외면하면 편안한 곳이라도 불안하게 되느니라.
송하여 이르되 탐욕은 지옥 가는 쇠고랑 되고 청정한 행은 아미타불이 연화대로 맞이하시니 고랑차고 지옥가면 고통이 한이 없고 반야용선 올라타고 극락정토 태어나면 복락이 끝이 없네.
견우와 직녀, 사랑의 본질
칠월칠석이 되면 견우와 직녀가 만나 반가워서 눈물을 흐리고 밤이 되면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립니다. 견우는 소 키우는 목동이고 직녀는 베 짜는 여인입니다. 견우는 소 키우는 데 있어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고 베 짜는데 있어서는 직녀를 따라올 여자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일을 잘 하는 남녀를 두고 옥황상제가 중매를 서서 결혼을 한 것인데, 둘 다 일을 팽개치고 서로에게만 빠져 살고 있으니 둘을 아예 못 만나도록 떼어놓아버린 것입니다. 하여 견우와 직녀는 일 년 내내 상대방을 그리워하다가 칠월칠석날 딱 한 번 만나게 됩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애달파 하니, 까마귀와 까치들이 천상으로 올라가서 다리를 놓아 오작교를 만들어주어 견우와 직녀가 마침내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하는 것이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입니다.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에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고 있으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든지 과하면 탈이 난다는 것입니다. 견우와 직녀가 서로 너무나 사랑하여 자기의 일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떨어지게 됐듯이 말입니다.
자경문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물과 여색은 반드시 정념으로 대할지니라.’ 왜 여색만을 말하지 않고 재물과 여색을 하나로 이야기했을까요? 또한 다른 것보다 왜 정념으로 대하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3단계, 성욕-친밀감-집착
여색은 요즘말로하면 성욕입니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할 때 견우와 직녀가 말 그대로 성욕에 끌려서 죽고 못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욕보다 더 폭이 넓고 복잡한 관계를 이룹니다. 사랑은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견해 중 하나로 사랑의 3단계를 꼽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세 가지 단계를 거쳐 간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성욕입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이 맞았을 때, 한 번에 필이 꽂혔다 하는 상태가 성욕입니다.
여기에서 좀 더 발전하면 2단계 친밀감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자기만의 어떤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기의 반경 안에 누군가 들어오면 경계를 하고 마음이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친밀하다는 것은 자기 영역의 반경 안에 누군가 들어와도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없이, 오히려 거리낌이 없고 더욱 기운이 좋은, 흔히 말하는 스킨십의 단계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썸을 타는 단계가 되겠지요.
세 번째 단계는 애착의 단계입니다. 애착이란 집착입니다.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단계의 친밀감만으로는 힘들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성욕이 발동되어야 하고, 친밀해져야 하고, 그 외의 여러 가지 다른 감정들이 섞여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독특한 집착이 만들어집니다.
김치를 담글 때 먼저 배추의 숨을 죽여야 하듯이, 사랑이 시작되려면 스파크가 튀듯 끌리는 감정이 있어야 하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애착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지요.
집착을 버리고 팔정도를 닦아야
자경문에서 말하는 재물 혹은 여색이라는 것은 소유욕을 말합니다.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애착입니다. 물건을 소유하려는 마음이나 사람을 소유하려는 애착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물과 여색을 같이 묶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념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팔정도에서 들어봤습니다. 팔정도는 도에 이르는 길을 말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세분화하면 팔정도가 됩니다.
계는 신, 구, 의, 삼업으로 지킵니다. 계를 입으로 지키는 것이 정어입니다. 일상생활을 계를 지키는 데에 입각해서 행하는 것이 정업입니다.
정에 해당하는 것은 꾸준히 수행하는 정정진입니다. 위빠사나에 해당하는 정념, 사마타에 해당하는 정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눈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마음의 눈이 무엇을 보는지는 잘 모릅니다. 지금 이 찰나의 내 마음이 직전 찰나의 마음이 무엇을 했는지를 보는 것이 정념입니다. 정념은 보는 것이고, 정정은 사마타 즉 집중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합치면 불교 고유의 수행인 지관이 됩니다.
나머지 정견과 정사는 지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 아는 것이 정견입니다. 정사는 정사유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정사입니다.
이런 여덟 가지를 꾸준히 수행하면 궁극적인 지혜가 생겨나며 고통을 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간에는 팔정도 중에서 정념을 콕 짚어서 여색과 재물을 대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앉아 정진하는 상태에서 재물과 여색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할 때에 그것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재물과 여색에 관심이 가려는 순간 ‘아! 내가 눈길이 돌아가려고 했구나.’ 하고 정념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보살님들의 경우에는 여색보다는 재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쇼핑 중독, 물건 못 버리는 것이 욕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 있는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언젠가는 다 요리해먹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욕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념, 초지일관의 마음가짐
여색을 보거든 독사나 호랑이처럼 여기고, 금과 옥이 생기더라도 나무나 돌을 대하는 것 같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정념해야 합니다. 정념하지 않으면 여색에 빠져도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생활 자세를 가져야 정념하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어두운 방에 홀로 있어도 어려운 손님을 대한 듯 하고, 속마음과 겉 행동이 언제나 일치하고 으슥한 곳에서도 드러난 곳에서도 한결같이 해야 합니다. 홀로 있는 것을 삼가라는 것은 혼자 있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않은 것 같은 마음가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념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초지일관의 마음가짐입니다. 남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재물과 여색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