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을 바꾸는 공부
이전에 동산스님이 글을 지어 가로대,
거룩하다는 이름도 구하지 말고 재물도 구하지 말고, 영화스러운 것도 구하지 말고 그렁저렁 인연을 따라 한세상을 지어내서 옷은 떨어지거든 거듭거듭 기워 입고 양식은 없거든 가끔 가끔 구하여 먹을 지로다. 턱어리 밑에 세 마디 기운이 끊어지면 문득 송장이요 죽은 후에는 헛이름 뿐이로다. 한낱 허황된 몸이 며칠이나 살 것이관대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고 내 마음을 깜깜하게 하여 공부하기를 잊어버리리요.
하시니라.
앞 시간에 경허스님께서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강조했는지 납득이 되어야 그 말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시간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지식을 쌓는 공부를 합니다. 지식을 쌓아 놓으면 나이 들어 치매가 오지 않는 이상에는 머리속에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할수록 쌓이는 공부와는 달리 불교에서 말하는, 경허스님이 말하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쌓이는 공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왼손잡이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왼손잡이를 고치기 위해서 밥 먹는 습관, 물건을 잡는 습관, 글씨 쓰는 습관을 다 고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평상시에 열심히 오른손 쓰는 연습을 하다가 한 일주일 캠프에 다녀와서 보니 그동안의 연습은 말짱도루묵이 되어왼손을 쓰는 겁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몸에 배면 잘 빠지지 않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라 습관을 바꾸는 공부입니다. 내 몸에 익을 대로 익은 습관을 바꾸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 공부는 습관을 바꾸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습관을 만드는 나 자신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쉬운 공부가 아니라 참 어려운공부입니다. 한번 하고 마는 공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에서 수행을 표현할 때, 묵은 것을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 몸에 익숙한 것은 최대한 낯설게, 처음 하는 것처럼 여기고, 내 몸에 낯선 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수행이라는 것은 간절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바로 원상복귀 되기가 십상입니다. 큰스님들이 ‘간절하게 공부하라’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불교의 공부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 습관을 만드는 나 자신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꾸준히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농담할 때도 하고 밥먹을 때도 하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해야 합니다.
중생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 경허스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첫째는 이름을 구하지 말고, 둘째는 재물을 구하지 말고 셋째는 영화스러운 것 즉 명예욕과권력욕이 종합된 것입니다. 누가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을 구합니까? 중생심이 이런 것들을 갈구합니다. 중생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중생심을 쫓아가면 깨달음과는 구만팔천 리 멀어지고 마는데, 왜 우리는 중생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무엇을 굳이 하려고 하지 말고 인연 따라 살며, 멋내지 말고, 맛있는 것 몸에 좋은 것 잔뜩 챙겨 먹지 말라고 하는데요. 먹고 입는 것은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옷은 입어야 하고 무언가를 먹어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입고 먹고 자는 것은 기본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 없으면 살 수가없습니다.
여기에서 욕심이 과하면 문제가 됩니다. 먹고 싶은데 기왕이면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기왕이면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싶습니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만 먹으면 되는데 꼭 탕수육까지 시키고 마는 것이 탐욕입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는 것에서 넘어서 무언가를 더바라는 것이지요.
왜 우리가 중생심을 못 버리는가? 중생심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이마음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욕심이 나옵니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욕심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욕심이 탐욕이 되고 탐욕이 애착이 되고 애착이 집착이 되는 겁니다.
목숨은 허망한 것
그런데 경허스님께서는 그런 중생심을 털어내야 불교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생심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살고 싶다’고 하는 본능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중생심을 털어내는가?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목숨이라는 것이 ‘세 마디 기운이 끊어지면’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허스님은 말합니다. 목숨이 정말 소중한 것이라면 모르겠지, 숨 한 번 못 쉬면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 목숨인데 무에 그리 애지중지 하느냐 이겁니다.
다시 말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를 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몹시 귀중하게 여기는 목숨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끊어지게 됩니다. 그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절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명제를 정확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아무리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고, 혹은 매일매일 좋은 일만 일어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인생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면 중생심을 털어낼 수 있고 중생심을 털어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깨달음을 얻으면 생사를 면할 수 있고, 생사를 면하면 불로장생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불로장생하는 삶을 지향해야지, 왜 잠깐의 즐거움에 빠져있느냐 이겁니다.
죽으면, 살아서 그토록 추구하던 명예욕, 재물욕 같은 것들은 다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그처럼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고 마음을 깜깜하게 합니다. 마음이 어두워 내 마음을 보지 못하니까 중생심을 털어내라고 합니다.
내 세계는 내가 만든다
내 마음을 깨달은 후에 항상 그 마음을 보전하야 깨끗이 하고 고요히 하야 세상에 물들지 말고 닦아 가면 한없는 좋은 일이 하도많으니 부디 깊이 믿으며 죽을 적에라도 아프도 않고 앓지도 않고 마음대로 극락세계에도 가고, 가고 싶은 대로 가나니라.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남자나 여인이나 노소를 물론하고 이 법문을 믿고 공부하면 모다 부처가 되리라 하시니 어찌 사람을 속이리오.
극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100명이 똑같은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극락에 살면 극락이고 내가 지옥에 살면 지옥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이 세계가 결정됩니다.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하느냐는 내 마음에서 결정되는 일입니다. 즉 극락은 가는 것이 아니라 내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대사 말씀이 내 마음을 궁구하면 깨달을 것이라 하시고 맹서하시되, 너희가 내 말을 곧이 아니 들으면 세세생생에 호랑이에게 죽을 것이요 내가 너희를 속이면 후생에 지옥에 떨어지리라 하시었으니 이런 말씀을 듣고 어찌 믿지 아니하리요.
옛날 사람들에게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홍인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만큼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합니다. 반대로 부처님 공부를 하면 반드시 불로장생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 움직이기를 산과 같이 하고 마음을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지혜로 불법 생각하기를 날과 달같이하야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끄달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참견 말고 좋은 일이 당하든지 좋지 아니한 일이 당하든지 마음을 평안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봄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에 절로 망상이 없어지나니라.
앞에서는 중생심을 털어내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중생심을 털어낸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옆에서 지원하고 지지하고 공부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계속 방해만 하니 나는 공부를 못하겠어요, 라고 한탄하니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면 중생심을 털어내고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건데요. 마음 움직이지 않기를 산 같이 하고, 마음 쓰기를 허공과같이 하고, 불법을 생각하기를 해와 달 같이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두 멋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요.
마음 움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끄달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남이 나에게 ‘잘못하는 거야.’ ‘잘하는 거야.’라고 하는 평가에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산은 바람이 분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뭐라고 하든 신경을 끄는 겁니다.
마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는 말은요.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분별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남을 평가하고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행태를 보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편단하지 않는 것이 마음을 넓게 쓰는 것입니다.
잘난 놈 못난 놈 똑똑한 놈 멍청한 놈 착한 놈 나쁜 놈 상관 없이 다 품는 것이 마음이 넓은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으로는 분별하면서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다는 말은 아무리 남이 진상을 부려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숙맥처럼 지내면 망상이 걷힌다
지혜로 불법 생각하기를 해와 달같이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하늘에 해가 없으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해가 있으면 모든 것이 환하게 잘 보입니다. 달도 깜깜한 밤에 무언가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빛입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것을 명명백백하게 훤하게 들여다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부처님 법도 해와 같이 달과 같이 명쾌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무심히 가지는 것은 해와 달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심하지 못하면 주변 상황을 차분하게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보지못하고 당시 마음을 끄는 것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 짜증, 잡생각, 불안감에 젖어드는 것은 해가 구름에 가리는 것과같습니다. 좋은 일을 당하면 기분이 좋아서 딴생각을 하고, 나쁜 일을 당하면 기분이 나빠서 세상을 명확하게 보지 못합니다. 마음을 평안하고 무심하게 해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해를 가리는 구름 같은 것이 망상입니다. 구름 없이 마음을 평안하고 무심하게 가지려면 숙맥같이 병신같이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됩니다. 이렇게 지내서 망상이 없어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보이고, 깨달음을 얻고 영생불멸하게 됩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부터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지내면 다 부처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조차도 비유입니다. 사람이 숙맥같이 벙어리같이 지내면 아이는 어떻게 키우고 회사는 어떻게 다닙니까? 이런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멈추라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자신을 성찰하라는 이야기를하는데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관광과 여행의 차이를 알면 이 비유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 관광이 아닌 여행
프랑스 파리에 간다고 합시다. 관광이라 함은 주로 여러 사람이 같이 다니면서 파리에 가서 에펠탑 보고, 루브르박물관 가고, 식당은어디에 가고, 시간표 대로 다니는 겁니다. 3박4일 안에 관광지를 모두 섭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때 일정은 가이드가 다 짜놓고요, 버스가 스탠바이 하고 있으면서 싣고 다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설정하는 목표나 성취는거의 이런 것입니다. 관광과 같습니다. 이런 목표는 밖을 향하는 삶입니다.
여행은 조금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혼자 가고요. 여러 군데를 도장깨기 하듯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 동네에 있으면서 그동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느지막이 밥 먹고 나서 공원에 가서 몇 시간 동안 사람들 노는 것을 구경합니다. 나 자신은 완전히 제3자이고 관찰자입니다. 다만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관찰합니다.
여행은 내가 가보지 않은 낯선 환경에 있는 것입니다. 처음의 시선으로 관찰자가 되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관광과 여행의 차이입니다. 관광은 내 밖의 대상을 향해서 질주하는 것이고, 여행은 가만히 앉아서 관찰만 하는 것입니다.
낯선 장소, 전혀 모르는 장소에 뚝 떨어져서 관찰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떻게 보일까요? 벙어리나 귀머거리와 다름 없어 보일 것입니다. 숙맥이라는 말은 실은 콩과 보리를 뜻합니다.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숙맥이라 하지요. 여행하는사람은 밥을 먹고 싶어도 여기가 식당인지 저기가 식당인지 모릅니다. 식당에 들어가도 메뉴판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살면 이런 모습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산다는 말은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멈추고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인다는 겁니다. 관찰하는 나 자신에 마음이 오롯하게 집중되는 겁니다. 이런 관찰자 모드가 될 때야 비로소 내 마음을 가리고 있는망상들이 없어집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이런 마음을 유지하는 것 또한 수행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혼자서 여행을 떠나보십시오. 관광 말고 여행이요. 3~4일 동안 글도 못 읽고 소리도 못 알아듣는 상태로 지내보십시오. 저절로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됩니다. 옆에서 어떻게 떠들고 있든 무슨 소리인지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신경쓰이거나 불쾌하지 않습니다. 여행이란 무엇인지 감이 올 것입니다.